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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21화)
Chapter 09 이별(3)


카론은 부러진 상처에 포션을 부었다.
뼈가 부러진 상처에 효과가 있을까 싶었는데 순식간에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보니 포션은 골절상에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격이 비싸다는 게 흠이긴 하나, 저것을 한 병 들고 다니는 것은 여벌의 목숨을 들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같다고 시온은 생각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자유 훈련을 하든 술을 마시든 마음대로 하고 내일 보자!”
“수고하셨습니다!”
기사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카론이 손을 휘저으며 시온을 향해 다가왔다.
“가자고.”
“그래.”
시온은 카론을 데리고 서재로 왔다.
서재는 시온이 가장 애용하는 공간으로 지금까지 익힌 말이며 상식까지 모든 것이 있는 장소였다. 이따금은 여기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것도 오늘로 끝…….’
담담하게 생각하며 하인이 내오는 차를 카론과 함께 마셨다. 카론은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은 쿠키 머핀을 우걱우걱 먹다가 흘끔 시온의 눈치를 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게 무게만 잡는다고 내가 알아들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
시온이 피식 웃었다.
“변함없이 언변이 좋군.”
“사람을 통솔하는 위치란 게 원래 그래. 벙어리도 달변가로 만들어 주지.”
“넌 달변가는 아니잖나, 카론.”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카론이 우물거리던 머핀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할 말이 뭐냐?”
“궁금한가?”
“궁금해. 일부러 찾아와서 대련까지 해 주고 하는 말이라면 중요한 얘기일 테지?”
“뭐, 중요하다면 중요한 얘기지. 나는 내일 떠난다.”
“뭐?”
카론이 홍차가 든 찻잔을 집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정색을 하며 시온을 봤다.
“떠난다고? 어디로?”
“모른다. 일단은 신성교국으로 가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꼭 가야만 하는 거냐?”
“가야 한다. 나는 지금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건 여기에서도 충분히 알아갈 수 있어.”
“아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온이 차를 한 모금 후륵 마셨다.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을 믿는다. 이 세계의 가장 더러운 것과 가장 깨끗한 것을 모두 볼 것이다. 귀족의 이름으로 걸러낸 가공품만을 보면서 평생을 지낼 순 없어.”
“그러다 훌쩍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그전에 꼭 이곳에 한 번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미리엔 아가씨는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도 안 한다.”
“미리엔 아가씨는…….”
“카론.”
시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메이켄 남작과 같은 말을 하려고 드는군. 미리엔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고 그건 미리엔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지만 더한 것을 주었다. 떠난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어.”
“……너, 미리엔 아가씨에게도 그렇게 말했냐?”
“그녀에겐.”
시온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에겐 말하지 않고 떠날 거다. 메이켄 남작과 네가 했던 말을 쓸데없이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도망치려는 거군.”
“도망이 아니다. 그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도망치려는 거군.”
“…….”
시온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카론.”
“시온, 하나만 물어보자.”
“말해라.”
“넌 미리엔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카론의 음성은 더없이 진지했다.
시온은 잠시 숨을 삼키며 대답을 말을 골랐다.
“미리엔은 분명 좋은 여자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남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을 만큼 착하고 아름답지. 하지만 그녀를 여자로서 좋아하고 있는가를 묻는 거라면 아니다. 난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
“이유가 뭐지?”
“난,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이제는 만날 수 없지만…….
시온은 마치 버릇처럼 튀어나오려던 뒷말을 꿀꺽 삼켰다.
“그런가.”
카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합니다, 아가씨.”
“……?”
시온이 멈칫했다.
느닷없이 ‘아가씨’가 왜 나온단 말인가?
이 서재에 미리엔이 있단 말인가?
잠시 후.
서가 뒤 깊숙한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미리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숨죽여 울었는지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미리엔, 듣고 있었나?”
“……흐흑.”
미리엔은 대답 대신 눈물을 떨구었다.
시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는지 자기 자신의 허술함에 대한 자책도 컸지만, 그녀의 우는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참담하게 아려왔다. 이유는 그도 몰랐다.
“미리엔, 언제부터 거기에…….”
“아아아앙!”
미리엔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서재를 뛰쳐나갔다.
그녀는 펑펑 울고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시온을 대하는 마음이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카론도 의외로 놀랐다.
카론이 황급히 말했다.
“뭐해? 어서 따라가 봐.”
“……아니, 됐어.”
시온은 한숨을 쉬며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러는 편이 나아.”
“진짜 안 따라갈 거냐?”
“그렇게 따라가고 싶으면 카론 네가 가라.”
“…….”
카론은 이마를 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널 존중하겠지만, 너란 놈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
시온은 다소 쓰게, 그렇지만 웃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뒤.
시온과 카론은 그렇게 서재에서 밤이 깊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 밤이기 때문에 마셔줘야 한다면서 시온을 술집으로 데려간 카론이 한 시간 만에 혼자 뻗어버려 시온의 등에 업혀서 돌아가야 했던 것은 그들만의 비밀이 되었다.

“제길. 어젯밤은 페이스 조절이 살짝 딸려서 일어난 실수야. 네놈이 다시 돌아오면 설욕해야 하니까 주량이나 잔뜩 키워 와라.”
“지금도 나한테 안 되면서 말은 잘 하는군.”
투르르르르!
다소 싸늘한 새벽 공기에 말이 몸을 떨며 투레질을 했다. 시온과 카론은 한 차례 포옹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메이슨이 시온에게 두툼한 보따리를 건네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겠다고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알았다. 그런데 이건 뭐지?”
“보존 식량이랑 옷가지를 좀 쌌습니다. 제 마음대로 고른 거긴 하지만요. 여행할 땐 아무래도 이게 없으면 곤란하죠.”
“고맙다. 잘 쓰도록 하지.”
시온은 웃으며 메이슨과도 포옹을 나누었다.
어제의 싸움에서 진 것 때문에 새침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이미 완전히 털어 버렸는지 그의 태도는 제법 살가웠다.
배웅을 나온 사람은 메이슨과 카론. 둘이었다. 번잡한 것이 싫어서 딱 그들에게만 알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카론이 말에 고삐를 걸어 시온에게 건넸다.
“그나저나 어쌔신을 데리고 가다니. 네가 좋아한다는 여자가 저 여자였냐?”
“그런 건 아니다.”
“그런 ‘건’ 아니라고? 그럼 뭔데?”
“시끄럽다. 카론.”
시온은 핀잔을 날리며 마차에 올랐다.
메이켄 남작은 말 이외에 2인승 마차도 준비해 주었는데, 마치 옆면을 도려낸 상자처럼 정면이 뻥 뚫린 마차였다. 표현은 좀 그렇지만 마치 리어카에 소파를 넣고 뚜껑을 덮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시온의 옆 좌석엔 어쌔신인 레이첼이 앉아 있었다.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그녀는 새침해 보이는 인상을 제외하면 흠 잡을 데 없는 미인이었다. 카론이 어제 일을 들먹이며 음흉한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있었다.
시온은 마차에 앉아서 잠시 두리번거렸다.
“미리엔은…… 역시 안 나왔나.”
“교활한 놈. 이제 와서 아쉬운 거냐?”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이번에도 그런 ‘건’ 아니냐?”
“시끄럽다. 카론.”
카론이 자꾸만 이죽대자 시온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 인상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변했다.
“그동안 고마웠다. 다음에 보자.”
“그래. 너무 늦으면 찾으러 갈지도 모르니까 잊히기 전에 돌아와라!”
“부디 몸조심 하십시오.”
두 사람의 인사를 뒤로 하고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삐를 쥔 레이첼이 말 등을 세차게 후려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려!”
저택의 담장 모퉁이. 안 보이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미리엔이 마차 앞으로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레이첼은 하마터면 마차로 그녀를 들이받을 뻔했다.
“워, 워!”
레이첼이 황급히 마차를 세웠다.
시온이 놀란 눈으로 미리엔을 보았다.
미리엔은 추운 날씨에도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 게다가 꽤 오래전부터 나와서 떨고 있었는지 입술이 온통 파랬다.
“미리엔?”
“이거…… 잊고 갔잖아. 바보.”
미리엔이 소중히 들고 있던 상자를 건넸다.
그녀가 시온에게 선물한 팔찌가 든 케이스.
시온이 어젯밤 그녀의 방문 앞에 놓아두고 온 것이었다. 자신에게 사랑받기 위해 준비한 선물이니, 그 마음을 거절한 이제는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들고 나타난 미리엔의 표정은 어제와는 달리 제법 차분해져 있었다.
“그건 잊고 간 게 아니다.”
“그럼?”
“…….”
‘놓고 간 거다.’
이 한마디면 되지만 시온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물을 준 당사자의 앞에서 그것을 버렸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미리엔도 그것을 알기에 표정이 새침해졌다.
“이건 내가 시온을 위해서 만든 것……. 그러니까 시온이 가지지 않겠다면 버리는 수밖에 없어. 갖기 싫으면 대신 버려 줘.”
“그건 또 엄청난 말이군.”
“됐으니까! 받아!”
미리엔은 강제로 케이스를 떠넘겼다.
시온이 그것을 열었다.
안에는 미리엔이 선물한 사금팔찌 외에도 비슷한 모양의 금반지가 하나 더 들어 있었다.
“이건 뭐지?”
“내 마음이야.”
“…….”
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레이첼이 피식 웃었다.
미리엔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꼼지락거렸다.
“봐. 나도 같은 걸 끼고 있어.”
미리엔이 손가락을 세웠다. 하얗고 귀여운 약지에 케이스 안에 든 것과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시온에게 준 것은 발그스름한 빛이 감돈다는 것이고, 미리엔의 것은 파르스름한 빛이 감돈다는 것뿐이었다.
미리엔이 말했다.
“이걸 끼고 있으면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미리엔.”
“애인이 아니라도…… 우린 친구잖아?”
시온이 멈칫했다.
“친구가 아니라도…… 시온은 우리 메이켄 영지의 은인이잖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해?”
“…아니. 이상하지 않다.”
“1년이야.”
“뭐?”
“1년 뒤엔 이 반지의 빛이 사라져. 이 반지는 끼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느낄 수 있게 해. 하지만 1년이면 사라져. 그러니까 나도 1년만 기다릴게. 그 안에 돌아와서, 나한테 대답을 줘.”
“후으읍.”
미리엔이 볼에 숨을 들이켰다.
“난! 시온을!! 좋아해애애!!!”
멍.
어안이 벙벙한 채로 굳어 있는 시온.
미리엔은 남들 보는 곳에서 있는 힘껏 소리치고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도망쳐 버렸다.
한 박자 늦게 카론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청춘이구만! 청춘이야!”
“…아가씨한테 저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메이슨도 중얼거렸다. 미리엔을 어릴 때부터 지켜 온 그였지만 미리엔의 저런 모습은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
시온은 말없이 반지만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레이첼, 출발해.”
다각. 다각다각.
말이 다시금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잘 다녀와라―!”
뒤에서 카론이 힘껏 손을 들었다.
시온은 이미 마차에 가려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온은 그 점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지금 카론이 정면에 있다면,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엄청나게 폭소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