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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25화)
10. 추수 감사 축제(3)
축제 이틀째.
영지에서 흔하디흔한 농사를 짓는 농부인 아불스. 그런 아불스의 막내아들인 14살 된 지크가 아침부터 떼를 쓰고 있었다.
“엄마∼ 엄마∼ 빨리∼ 빨리 가자고∼”
지크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면서 평소에 효과가 좋은 막내 재롱을 피우는데 그의 어머니 루이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이 준비하던 것을 마저 챙겼다. 그녀의 옆에서는 딸인 이사벨라가 그녀를 돕고 있었다.
몸이 달아오른 지크가 이번에는 이사벨라에게 매달려서 그녀를 재촉한다.
“누나∼ 누나∼ 이러다가 늦겠어!!”
이사벨라가 그녀보다 2살 어린 막내의 이마에 꿀밤을 가볍게 한 대 때리면서 핀잔을 줬다.
“기다려 봐, 이것아. 엄마랑 같이 이거 다 준비해야지 가지. 두고 봐. 오늘은 꼭 우승을 할 거야.”
어느새 자기에게 하는 다짐으로 바뀐 그녀의 말을 듣던 지크가 이번에는 그녀들이 준비하는 주방 기구들을 자기가 둘러메기 시작했다.
“엄마, 누나. 이것들만 준비해서 가면 되는 거야? 내가 다 들게. 그럼 준비 다 됐네. 빨리 가자.”
그때 문이 열리면서 이 집의 가장인 사십 대 초반의 아불스와 큰아들 터크, 둘째 아들 루크가 들어왔다.
아불스는 아침에 아들들을 데리고 마을 장정들과 같이 여자들이 마을 공터에서 음식을 할 때 필요한 물과 땔감 등을 날랐던 것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떼를 쓰고 있는 막내의 모습을 본 아불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저 녀석 또 떼쓰네. 그러게 아침 일찍 애비랑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더냐?”
아불스의 말에 둘째 아들 루크가 지크의 이마에 꿀밤을 때리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아버지. 이놈이 아침에는 일어나기 싫어서 늦잠을 자더니… 게을러 가지고 큰일이에요.”
꿀밤을 맞자 지크가 루크를 노려보면서 화를 내었다.
“이씨, 둘째형. 아까 맞은데 또 때렸어. 그리고 이사벨라 누나는 안 아프게 때리는데 형은 왜 이렇게 세게 때리는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루이스가 지크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정말 영주님이 또 식량을 내려 주셨어요?”
그러자 옆에 있으면서 지크의 눈 흘김을 당하던 루크가 얼른 끼어들었다.
“예, 엄마. 공터에 또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요. 밀가루랑 고기들도 엄청 많아요.”
루크의 예상대로 지크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도 금방 잊고 그의 말에 흥미를 나타냈다.
“응? 정말? 형 정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루크가 두 팔을 벌리면서 한껏 크게 휘두르며 원을 그리면서 대답했다.
“그럼, 정말 이만큼 쌓여 있어.”
지크의 동그랗던 눈이 더 커졌다.
“우와, 우와.”
루이스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들었다는 듯이 감격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정말… 정말… 어제 내려 주신 것만 해도 엄청난데… 너무 좋으신 분이시네요.”
아불스가 맞장구를 쳤다.
“그럼, 우리 영주님 정말 좋으신 분 같아. 이번 추수에서도 정말로 세금을 내려 주셨잖아. 그리고 세금징수원들이 정해진 세금만 거두어 가도록 엄격히 감시하시고… 여보. 앞으로는 점점 더 살기가 좋아질 거야.”
어느새 루이스가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는 정말 이대로만 살아도 충분해요.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착한 영주님을 만났으니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감지덕지예요.”
제라린이 영주가 되고 난 뒤에 생활이 눈에 띄게 좋아지자 감격을 하면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루이스. 오히려 더 이상 바라면 지금의 생활이 깨어질 거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그녀를 보면서 아불스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느덧 눈가가 촉촉한 그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아불스는 오히려 쾌활하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참! 준비를 하는데 마을 남정네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어서 순식간에 끝이 났어. 하하,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남자들 처음 봤어. 여편네들한테 단단히 주의를 받은 모양인데. 하하.”
약간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그의 목소리에 루이스가 눈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어쩜, 어쩜…….”
그때 옆에 있던 맏아들 터크가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모두들 이따가 있을 경기 때문에 연습한다고 일찍 마친 거예요. 준비 마치고 다들 공터에서 지금 연습한다고 정신없어요.”
그의 말에 완전히 관심이 돌려진 루이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참, 오늘 남자들도 경기한다면서요? 당신은 안 나가요?”
아불스가 고개를 뒤로 재치며 거들먹거리면서 대답했다.
“아, 나도 나가야지. 하지만 나는 연습 같은 거 안 해도 돼. 꼭 실력 없는 것들이 이럴 때 연습하다고 그러지. 하하하!”
말하던 그가 이번에는 터크에게 은근히 도발적인 말을 했다.
“참, 터크야. 너는 연습 안 해도 되냐? 나야 소시 적에 이름 꽤나 날렸는데 넌 연습이 많이 필요할거 같은데…….”
사실 마을에서도 장사로 소문난 터크였지만 아불스는 아직도 자신의 사내다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지 이런 말을 던졌지만 터크가 대답할 새도 없이 아내 루이스에게 핀잔을 들었다.
“으이구, 터크가 아마 당신보다도 나을 거예요. 당신 걱정이나 하세요.”
아불스가 어색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옆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을 하는 동안에 이사벨라도 루크에게 묻고 있었다.
“오빠, 아빠랑 큰오빠는 오늘 경기에 나간다던데 오빠는 안 나가?”
그러자 어머니와 이사벨라가 챙기던 요리 기구들을 들던 루크가 대답했다.
“응? 경기? 20살 이하의 청년부와 소년부는 내일 있어. 나와 지크는 내일 경기에 나갈 거야.”
“아, 그렇구나. 오빠 내일 꼭 잘해. 오빠 경기할 때 내가 꼭 응원 갈게.”
“하하, 고마워.”
이윽고 이것저것 짐을 든 일가족이 집을 나가서 마을 공터로 향했다. 다른 집에서도 남자들과 여자들이 짐을 들고 나왔다.
일가족을 이끌고 가던 아불스가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앞에서 짐을 들고 걷는 맏아들 터크의 넓은 등판을 보면서 생각했다.
‘녀석, 많이도 컸구나. 마을에서는 장사라고 소문이 났고 요즘은 영주님의 군대에 들어간다고 아침저녁으로 무예를 연습하는 거 같던데… 저 녀석 황소고집을 꺾을 수도 없고… 이제 좋은 영주님도 만났으니 그냥 나처럼 이렇게 농사나 지으면서 살면 좋으련만…….’
남자들을 위한 여러 운동 경기와 여자들을 위한 본격적인 음식 대회가 진행되었다.
남자들은 달리기, 멀리뛰기, 높이뛰기, 원반던지기, 활쏘기가 진행되었고 각각의 경기에 참여한 남자들이 서로의 기량을 겨루었다.
처음해 보는 경기들은 어색한 면도 있었지만 어차피 상대들도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조
금씩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해서 시합에 열중했다.
여자들도 어제에 이은 본격적인 음식 만들기에 나섰다. 평소에 손맛이 있다는 여인들을 중심으로 팀을 만들어서 각자의 솜씨를 뽐내었다. 자기들이 만들 음식들이 결국은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이 포함된 마을 주민들이 먹을 것을 알기에 온갖 정성을 쏟아서 음식 만들기에 집중했다.
그녀들의 주위에는 어느새 침을 흘리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간혹 자기의 아이들이 보이면 몰래 만들던 음식을 건네주는 여인들도 있었지만 모두들 배고픈 아이들을 잘 알기에 그러려니 눈감아 주었다.
축제 삼 일째.
16세 이하의 소년들과 20세 이하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어제와 같은 달리기, 멀리뛰기, 높이뛰기, 원반던지기, 활쏘기의 5종목의 경주가 진행되었다.
어제는 목청껏 응원만 하던 남자아이들이 나서서 자신의 기량을 뽐내었다.
축제 사 일째. 다시 20살 이상의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이번에는 레슬링, 원반던지기, 활쏘기의 단 3종목만을 대상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레슬링은 마이센 대륙의 평민들 사이에 전래되는 경기로 맨몸으로 두 손을 사용하여 상대를 넘어뜨리면 이기는 경기였기에 사람들에게 무척 친숙한 경기였다. 누구나 어릴 때 동네 아이들과 레슬링은 해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반던지기와 활쏘기는 제라린이 일부러 중복되게 넣은 것인데 둘째 날의 달리기, 멀리뛰기, 높이뛰기에서 영지민들의 기초 체력을 기르고, 원반던지기와 활쏘기를 통해서 그들의 전투력을 높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활쏘기는 제라린이 중점을 두었기에 이번 축제가 끝나서도 평민들 사이에 활쏘기가 성행하기를 제라린은 기대하고 있었다.
원반던지기 경기를 하는 마을 남쪽의 빈터.
추수가 끝난 뒤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밭이 펼쳐져 있었고 제라린의 영지민들이 이곳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경기에 참가한 한 사람이 원반을 던질 때마다 사람들의 감탄사가 같이 나왔다.
“와!”
“우와, 정말 대단하다. 한 80미터는 날라가는 거 같지 않아?”
“그러게… 정말 엄청나네.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는 더 멀리 던지는 거 같아.”
그곳에는 제라린도 호위기사들과 같이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원반을 던지는 사람은 율리우스 영지의 한구석에서 나무로 생계를 이어가는 나무꾼인 빅터였다. 키는 2미터가 약간 넘어서 160에서 170센티미터인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통이 두 개는 더 크게 보였고 180센티미터인 제라린이나 그와 비슷한 글랜보다도 머리통이 하나는 더 컸다.
그는 약 2킬로그램의 넙적한 형태의 원반을 던지고 있었다.
새로운 대장간에서 찍어 낸 원반이었다.
모양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경기에 쓰이는 대부분의 원반들이 거의 비슷한 모양과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빅터의 마지막 세 번째 기회였다.
이번에는 그의 원반이 앞의 두 번보다 조금 더 멀리 81미터 부근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다시 터져 나오고 그걸 보던 제라린도 그의 엄청난 힘에 감탄했다.
‘휴∼ 엄청나군. 운동신경이 좀 있는 사람들은 지금 원심력을 이용해서 몸을 완전히 회전시키면서 던지는데, 저자는 몸을 단지 좌우로 흔들어서 원심력은 조금만 사용하고 순전히 힘으로만 저렇게 던지는군. 이건 강화된 내 힘과 비슷할 정도인데…….’
빅터도 방금 자기가 던진 원반이 떨어진 자리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자신의 기록 근처에 가는 사람도 없으니까 본인의 우승이 유력했던 것이다.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원반을 던지고 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빅터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빅터! 빅터!”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쓰다듬던 빅터가 갑자기 제라린의 앞으로 와서는 양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면서 말했다.
“영주님, 저는 나무꾼 일을 하고 있는 빅터라고 합니다. 영주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그의 말에 제라린이 물었다.
“음… 그대는 기사가 되기를 원하는가?”
제라린의 질문에 빅터는 주저했다.
“기…기사는 아니고 단지 영주님을 따라다니면서 호위하고 싶습니다.”
제라린이 보기에 빅터는 용력이 일반인들에 비해서 뛰어나 보였다. 그래서 기사로 성장하지는 못할지라도 한 명의 훌륭한 병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흔쾌히 허락을 했다.
“좋아, 빅터. 그대는 오늘부터 나의 호위병이다.”
제라린의 허락에 빅터가 다시 머리를 쑥이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고 주위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감, 감사합니다.”
“와!! 와!!”
그 모습을 보던 음유시인 라리타가 내심 흡족해했다.
‘우와, 이거야말로 영웅에게 용맹한 기사가 찾아온다는 스토리잖아. 좋은 소재가 되겠어. 그리고 저 빅터란 작자가 빨리 이름을 날려 줘야지 하는데… 그래야 내 새로운 노래도 함께 뜰 테니…….’
축제 오 일째.
제라린이 그동안 경기의 우승자들을 모아서 특별히 치하했다.
그리고 올해는 활쏘기의 참가자들의 기량이 많이 미흡했지만 내년부터는 더욱더 발전할 것을 기대하면서 우승자들에게 시상을 했다.
마지막으로 마을 주민들을 모아서 대지의 여신인 다이지스에게 내년에도 풍작을 내려 줄 것을 같이 기원했다. 축제 마지막 날이어서 이제까지보다 더 성대한 잔치가 개최되었다.
시상과 제사를 마친 제라린이 호위 기사들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음유시인인 라리타와 사루타가 제라린을 따라가지 않고 선술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선술집에서는 라리타가 얼마 전에 만든 ‘용감한 제라린’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술집의 남자들은 모두들 들어 본 적이 있는 노래였기에 바로 흥에 겨워서 박수를 치거나 탁자를 치면서 음유시인들과 같이 어울려서 노래를 불렀다.
‘용감한 제라린’이 끝나자 라리타가 손을 들어서 주위를 조용히 시키더니 말했다.
“자! 자!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내가 새로운 노래를 하나 더 만들었는데 한 번 들어 보시겠소?”
그의 말에 그를 둘러싼 남자들이 환호성을 울리면서 찬성을 했다.
“와!! 와!! 빨리 해 보라고…….”
“그려, 빨리 불러 봐!”
다시 사루타와 눈빛을 나눈 라리타가 기타를 치면서 이번에도 그와 번갈아 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존에 없던 축제를 선포하고 축제 기간 동안 영지민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준 제라린에게서 영감을 얻어서 이삼 일 만에 급하게 만든 노래였다.
제라린 영주님은 바보∼ 짝! 짝! 그는 영지민에게 고기와 밀을 나눠 준다네. 짝! 짝!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선술집 안에 있던 남자들의 얼굴색이 흙빛이 되었다. 노래 속에 제라린을 ‘바보’라고 부르는 ‘불경스러운 노랫말’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자나 같이 듣는 자는 걸리면 영주의 직권에 의해서 바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분위기가 무거워졌지만 라리타와 사루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불렀다.
제라린 영주님은 바보∼ 짝! 짝! 그는 영지민에게 포도주와 맥주도 나눠 준다네. 짝! 짝!
다른 영주들은 다 거두기에 바쁜데 그는 바보인가 보네.
바보 제라린∼ 짝! 짝! 그는 곧 가난해지겠네. 짝! 짝!
노래가 진행되자 사람들이 어느새 진정을 했다. 비록 불경스러운 말이 노래 중간에 있었지만 제라린을 칭송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이내 흥겨운 멜로디에 그들도 ‘짝! 짝!’ 박수를 치거나 탁자를 치면서 흥을 돋우었다.
자애로운 제라린의 성격을 봐서 이런 노래를 부르다가 걸려도 크게 화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런 노래는 불러도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제라린』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