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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24화)
10. 추수 감사 축제(2)
각 마을별로 인구수에 따라 축제에 사용할 음식들을 골고루 나누어 준 제라린은 첫째 날 저녁 무렵이 되자 영주성 밖에 있는 글라티노 마을로 갔다.
글라티노 마을은 대략 오천 명가량이 사는 마을로 제라린이 다스리는 영지 내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제라린이 말을 타고 기사들과 기병대를 이끌고 마을에 도착했다.
축제를 준비하던 마을 사람들이 제라린을 보고는 바닥에 엎드려 영주에 대한 예를 표했다.
제라린이 자신을 보고 얼어붙은 영지민에게 자신을 편하게 대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생각했다.
‘그래, 차츰 바꾸면 될 것이다. 차츰…….’
이윽고 마을의 정중앙에 도착한 제라린, 그곳에는 미리 지시해 놓은 대로 나무로 높다란 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제라린이 그곳에 올라서 축제의 시작을 선포했다.
“올해도 자애로운 대지의 여신 다이지스의 축복으로 풍년이 들었다. 이런 풍년은 다이지스의 축복만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바로 모든 영지민들과 특히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한 농부들의 노고가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도록 5일간의 축제를 선포한다.”
대리인을 통해서 축제의 선포를 하고 제라린은 영주성에서 가신들과 축제를 즐길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렇게 영지민들과 같이 즐기는 게 훨씬 더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제라린 자신도 마을로 온 것이다.
그 다음에 제라린은 기병대 중에서 나이가 차고 실력이 일취월장한 제프, 젠, 레오를 앞으로 불렀다. 이 축제 기간 중에 이들에 대한 기사 서임식을 실행하려는 것이다.
원래 이제까지의 기사 서임식은 영주성 안에서 영주가 대상자의 목이나 머리를 자기의 손으로 한 번 치는 것이 끝인 매우 단조로운 의례였었다. 그렇기에 제라린이 좀 더 경건하고 각 기사들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여기에 와서 기사 서임식을 거행하려는 것이었다.
제라린이 부르자 제프, 젠, 레오가 제라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왼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오른쪽 무릎은 세운 자세였다.
제라린이 미리 준비한 세 자루의 롱소드 중에서 하나를 잡고는 제프의 앞에 섰다.
이 롱소드들은 새로 만든 대장간에서 나온 강철을 슈미트 영감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여러 날을 두드려서 만든 명검들이었다.
“제프, 너는 이제 기사가 될 것이다. 너는 어떤 기사가 될 것을 어떤 신에게 맹세하느냐?”
제프가 고개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저는 항상 영주님의 칼이 되기를 주신 메젠스와 전쟁의 신 마르스 그리고 번개의 신인 뇌르에게 맹세합니다.”
기사다운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인 제프는 그의 성향에 맞게 마르스와 뇌르를 선택했다.
주신은 제일 높은 신이였기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꼭 넣었고 전쟁의 신 마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제삼의 신으로 거론되는 신이 각 기사들의 성향과 그들이 은연중 바라는 것을 잘 나타내 주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제라린이 롱소드를 제프의 머리와 양 어깨에 차례대로 치면서 그를 기사로 임명했다.
“제프를 기사로 임명한다. 기사 제프는 주신 메젠스, 전쟁의 신 마르스, 번개의 신인 뇌르의 가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제프에게 그가 들고 있던 검을 하사했다.
그 다음에는 젠이 기사의 맹세를 자신이 바라는 신들에게 청했다.
“저는 항상 영주님에게 충성하고 영지민들을 보호하는 기사가 될 것을 주신 메젠스와 전쟁의 신 마르스 그리고 대지의 여신인 다이지스에게 맹세합니다.”
젠은 오늘 아침까지 고민을 하다가 이곳에 오면서 축제를 준비하는 영지민들을 보고는 이들을 풍요롭게 만드는 대지의 여신인 다이지스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꼭 영지민들을 보호하겠다는 다짐을 속으로 했다.
마지막은 레오의 차례였다.
“저는 항상 영주님에게 충성하고 약한 레이디들을 보호하는 기사가 될 것을 주신 메젠스와 전쟁의 신 마르스 그리고 미의 여신인 이브에게 맹세합니다.”
순간 단 위에 있는 제라린과 제프, 젠, 레오 등을 둘러싸서 그 광경을 엄숙하게 보고 있던 기사들과 기병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약간의 술렁임과 함께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하.”
고개를 숙인 레오의 양볼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제라린도 기분 좋게 웃으면서 레온의 말을 받아 주었다.
“하하하, 레오는 낭만의 기사라고 해야 되겠군.”
그러면서 역시나 레오에게 하사할 롱소드로 그의 머리와 양 어깨를 치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레오를 기사로 임명한다. 기사 레오는 주신 메젠스, 전쟁의 신 마르스, 미의 여신인 이브의 가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제라린이 마지막으로 그 검을 레오에게 하사했고 레오는 공손하게 검을 받아서 자신의 왼쪽 옆구리에 찼다. 그러자 이런 기사 서임식을 처음 보는 마을 주민들과 어린애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 와!!”
모두들 여기서 끝난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제라린이 계획했던 새로운 기사 서임식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고 한쪽에서 몇 명의 여자들이 음식들을 가지고 단위에 있는 제라린에게 공손히 바쳤다. 빵과 닭고기, 그리고 포도주였다.
제라린은 그것들을 들고 크게 말했다.
“올해 우리의 영지에서 난 것들이다. 가장 잘 만든 빵, 가장 맛있는 고기 그리고 가장 질 좋은 포도주다. 그대들은 이것을 먹으면서 오늘의 맹세를 늘 생각하기 바란다.”
그러자 제프, 젠, 레오는 제라린이 주는 음식을 그 자리에서 먹기 시작했고 주위의 마을 주민들이 조금 전보다 더 큰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 와!!”
축제 선포와 기사 서임식을 마친 제라린이 세바스찬과 글랜만을 데리고 마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항상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제라린이었기에 앨버트가 기병들 중에 솜씨가 좋은 세바스찬을 제라린의 호위로 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같이 축제의 혼잡함을 대비하여 기사인 글랜까지 제라린의 호위로 임명했다.
그와 마주친 마을 주민들은 처음에는 땅바닥에 몸을 엎드리는 예를 표했지만 제라린의 명령에 이제는 고개만 숙이는 간략한 예만을 표하고 있었다.
제라린은 자리를 옮기면서 이런저런 음식을 먹으면서 그중에 특별히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을 만든 여자들에게 일이 실버씩 상금으로 내렸다.
그러자 제라린 내린 상금을 받은 여자들과 그렇지 못한 여자들 사이의 분위기가 갈라졌다.
상금을 받은 여자들은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많이 아쉬워하면서 내일은 좀 더 맛있게 만들 것을 다짐했다.
이런저런 곳에서 음식을 맛보면서 자리를 옮기던 제라린이 근처의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힘센 제라린∼ 짝! 짝!
그는 커다란 투핸드소드를 한 손으로 ‘휙∼ 휙∼’ 휘두르네.
짝! 짝!”
경쾌한 선율에 힘 있는 목소리가 잘 어울려져 듣는 이들이 어느새 흥을 느끼는 노래였다.
노래의 내용은 그동안 영지전에서 세운 제라린의 무용담에 대한 것이었다.
제라린의 옆에 있던 성질 급한 글랜이 칼자루를 움켜쥐고 선술집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아니, 이런 무도한 놈들을 봤나? 감히 존귀하신 영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제라린이 그런 글랜의 어깨를 잡아서 말리고는 조용히 선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선술집 안에는 약 이삼십 명가량의 남자들이 테이블에 제각각 앉아 있었고 그 가운데의 테이블에서 두 명의 음유시인들이 기타와 비슷하게 생긴 악기를 연주하면서 서로 번갈아 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용감한 제라린∼ 짝! 짝! 그는 항상 기사단의 선두에서 돌격하네. 짝! 짝!
겁 없는 제라린∼ 짝! 짝! 그가 내지른 검에 더글라스가 꼬꾸라지네. 짝! 짝!
용맹한 제라린∼ 짝! 짝! 그에게는 남부 제일의 기사 주노 자작도 상대가 안 되네. 짝! 짝!
그들의 노래 중간 중간에 선술집 안의 남자들이 간간히 따라하거나 ‘짝! 짝!’에서 힘껏 박수를 치면서 흥을 돋우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탁자를 두드리면서 박자를 맞추기도 했다.
시끌벅적했다. 모두들 흥겨운 분위기였다.
제라린이 조금 푼 맥주와 포도주를 마신 남자들이 술기운이 오르자 오랜만에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제라린이 세금을 적게 거둔 덕에 모두의 주머니가 약간은 두둑해져서 한 달에 한 번 오기가 힘든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마침 영지의 축제 소식에 급히 온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한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들은 방랑민족인 지고시안 일족이었다.
선술집의 주인도 기쁜 마음에 손님들이 시킨 맥주를 나르고 있었다. 여행자들 외에 영지민들은 정말 간혹 가야 그의 손님이 되었지만 오늘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던 음유시인 중의 하나가 마침내 제라린을 발견하고는 노래를 멈추었다.
옆에 칼을 차고 있고 범상치 않은 호위들을 거느린 그가 결코 보통 주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맥주를 마시던 주민들이 음유시인의 눈길을 따라서 눈을 돌리다가 자신들의 영주를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탁자에서 일어나서 바닥에 몸을 엎드리면서 예를 취했다.
음유시인도 그제야 그의 신분을 눈치채고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몸을 엎드리는 찰나에 제라린이 만류를 했다.
“모두들 일어나도록 하라. 과한 예는 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으로만 해도 충분하다.”
제라린의 말에 하나둘씩 일어나는 주민들과 음유시인을 보면서 제라린이 두 명 중에 나이가 좀 더 들은 음유시인에게 물었다.
“음… 그 노래는 처음 들은 노래 같군. 자네가 만들었나?”
제라린의 물음에 이십대 중반의 라리타가 대답했다.
“예. 영주님. 이번에 영지전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주님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혹시… 기분이 언짢으시더라도 용서해 주시길…….”
라리타는 아무리 좋은 내용이더라도 고귀한 자신에 대해서 천한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걸 싫어하는 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제라린에게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이 전혀 없는 제라린은 그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아니, 노래하는 거 가지고 내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나저나 자네는 목소리가 참 좋더군.”
제라린이 이번에는 라리타의 옆에 있는 이십대 초반의 음유시인에게 말을 걸었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노래를 부르던 음유시인들이었지만 그의 파트를 부를 때 확실히 목소리가 고왔던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음유시인들을 치하한 제라린은 그들에게 약간의 상금을 내려 주고는 곧 선술집을 나왔다.
자신이 있으면 이들이 마음껏 못 즐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가는 제라린에게 이십대 중반의 음유시인이 갑자기 외쳤다.
“영주님, 소원이 있습니다.”
나가던 제라린이 몸을 반쯤 뒤로 돌리면서 물었다.
“응? 소원? 무슨 소원인가?”
음유시인이 갑자기 자기의 소개를 하더니 열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저는 라리타라고 합니다. 옆에는 제 동생 사루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영주님을 따라다니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제라린이 의아해서 묻었다.
“응? 그대들이 왜 나를 따라다니는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자 라리타가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와 제 동생은 음유시인입니다. 음유시인으로서 영주님을 따라다니면 많은, 좋은 노래들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꼭 허락해 주십시오.”
어느새 무릎 꿇고 있는 라리타의 옆에 사루타도 같이 무릎을 꿇고 자기도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제라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음… 나를 창작의 소재로 사용하려는 것인가? 뭐… 광고 효과도 있고 괜찮을 거 같은데… 혹시 첩자는 아니겠지? 일단 허락은 하고 당분간 조용히 지켜봐야겠군.’
그렇게 결심한 제라린이 입을 열었다.
“음유시인들이 나를 따라 다닌다라… 재미있을 거 같군. 앞으로 그렇게 하라.”
제라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리타와 사루타는 서로 몸을 얼싸 앉으면서 기뻐했다.
“감, 감사합니다. 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