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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린 1(23화)
9. 인재 영입의 시작(2)
아폴로의 말이 끝나자 또다시 떠드는 학자들을 조용히 시킨 제라린이 생각에 잠겼다.
‘음… 여기 와서 처음으로 현실성 있는 생산성 향상 방안이 나오는군. 그동안 조사해 본 결과 저 방식은 여기서 적용이 가능하다. 두엄으로 지력을 북돋우고 콩들을 번갈아 심는다면 굳이 휴경지를 둘 필요가 없지. 잘 하면 이모작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천천히 실험을 해 봐야 하고, 우선 두엄 같은 건 전 영지에 당장 도입해도 별 문제가 없을 터… 내년부터 내가 다스리는 영지에 시행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필요한 자가 나타난 거 같군.’
그런 생각을 하는 제라린을 향해서 아폴로의 옆에 있던 약간 뚱뚱한 체격의 루이스도 입을 열었다.
아폴로가 아직 쫓겨나지 않은 것을 봐서는 제라린은 그들이 이제까지 봐 왔던 다른 영주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님, 그렇게 두엄을 이용하면서도 농기구의 개량이 필요합니다. 먼저 바퀴 달린 쟁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쟁기의 바퀴 바로 뒤에 종으로 날을 달아서 지면을 두 갈래로 긋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그 뒤에 달린 편평한 날이 땅을 완전히 갈아엎도록 하고 또한 그 뒤에 판자를 달아서 골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땅을 갈면 땅속 깊숙이 있는 기름진 땅이 지표로 올라와서 농사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여기까지 말한 루이스는 제라린이 여전히 그를 똑바로 보면서 그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자 신이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이 바퀴 달린 쟁기는 소가 끌어도 좋지만 말이 끄는 게 훨씬 효율이 좋습니다. 비록 말이 사료를 많이 먹긴 하지만 소보다 훨씬 일을 많이 하니까요.”
그러자 또 학자들이 우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기사님들이 타는 귀한 말을 농사일에 쓴다니요…….”
“저자가 미쳤나?”
“흥, 말을 모는 농부들이 이제는 칼을 들고 기사를 하겠다는 날도 멀지 않았겠군.”
그들은 근래에 무력으로 이름을 떨친 제라린이 여기서는 반드시 크게 화를 내고 아폴로와 루이스를 쫓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큰 키에 보통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투핸드소드를 가지고 다니는 제라린은 뼛속까지 기사로 보였다.
학자들은 기사들이 전투를 하는데 쓰는 말을 농사에 쓰자고 한 저 루이스가 제라린의 심기를 건들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다시 손을 올려서 좌우를 진정시킨 제라린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오늘 명망 높은 여러 학자들로부터 귀한 말씀을 들어서 기쁘기 한량없소. 이 먼 길을 오셔서 귀한 말씀을 해 주신 여러분에게 내가 적으나마 성의를 보이고 싶소.”
시종을 부른 제라린은 학자들에게 하나씩 골드가 담긴 주머니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하나당 10골드가 담긴 주머니로 하나를 건네줄 때마다 제라린의 심정은 몹시 아팠다.
게다가 이들 중에서 명망이 높다는 루아노와 산바라에게는 30골드가 담긴 주머니를 건네줬다.
총 300골드가 넘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오늘 투자하는 금전 이상의 인재를 발견했기에 돈을 모두 건네주고 학자들을 치하한 뒤의 심정은 무척 흡족했다.
제라린에게 주머니를 받던 학자들은 자기들만 주머니를 받고 제라린이 아폴로와 루이스에게는 주머니를 건네주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폴로와 루이스도 제라린이 학자들에게 주머니를 건네준 후 자신들을 보지 않자 힘이 빠진 채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들은 돈을 못 받은 게 아쉬운 게 아니라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오늘도 못 만난 것이 무척 아쉬웠던 것이다.
의기양양한 채로 제라린의 집무실을 나가는 학자들, 그들의 제일 마지막에 힘없이 나가는 아폴로와 루이스를 제라린이 불렀다.
“잠깐, 그대들은 어디로 가는 것이오?”
그런 제라린의 물음에 아폴로와 루이스가 어리둥절했다.
“예? 영주님?”
“영주님, 무슨 일로……?”
그런 그들에게 제라린이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그대들이 나에게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좋은 방책을 알려 주었소. 그러면 당연히 여기서 그 방책을 실현시켜야 하지 않겠소?”
그제야 제라린이 자신들을 붙잡은 이유를 알아챈 아폴로와 루이스가 감동의 신음을 터뜨리며 제라린을 쳐다봤다.
“영, 영주님.”
제라린이 벅찬 감동을 터뜨리며 서 있는 아폴로와 루이스의 손을 잡고 탁자로 이끌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서 펼쳤다.
그간 부하들을 시켜서 제작한 율리우스, 글라토스, 클래치스, 주노 영지의 지도였다.
“지금 내가 다스리고 있는 영지들이오. 아시다시피 우리 영지들은 대륙의 남부에 위치해서 대체로 따뜻한 기후요. 따라서 그대들이 말한 두엄과 바퀴달린 쟁기 등을 이용한다면 이모작도 가능할지 모르오. 하지만 이모작은 여러 차례의 실험을 거친 다음에 전 영지에 적용해야 하고 우선은 그대들이 말한 두엄과 여러 시비법, 그리고 바퀴 달린 쟁기와 말 등의 사용의 도입을 먼저 해야 하오. 또 한편으로는 이곳과 이곳의 수로를 확대하여 물의 공급을 원활히 하고 이곳과 이곳의 수로를 개선해야 하오.”
그렇게 제라린은 농사법과 농기구의 개량과 영지의 전반적인 상태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영주의 입에서 나올 거 같지 않은 현실적인 말들이 제라린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아폴로와 루이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어느덧 제라린의 분위기에 휩쓸린 그들도 자신의 신분을 잊고 평소에 자신이 생각했거나 그간 실험했던 사항들을 열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제라린은 아폴로와 루이스를 영지의 문관으로 임명하고 어제 저녁 늦게까지 상의한 농사법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제반 사정 확인을 위해서 각각 주노령과 클래치스령으로 파견을 보냈다.
그리고 바로 주노 자작과의 영지전에서 응원군을 보내기로 했다가 약속을 어긴 케릭 자작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기사들을 소집했다.
앨버트를 비롯하여 하나씩 도착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제라린은 생각에 빠졌다.
‘음… 아폴로와 루이스. 어제 늦게까지 얘기를 해 본 결과 확실히 일에 대한 능력과 열정은 있는 거 같더군. 문제는 과연 청렴하게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지가 문제인데… 이건 천천히 일을 시키면서 두고 봐야 알겠지. 그러나저러나 이제는 학자들이 더 이상 오지는 않겠지? 그렇게 허투루 돈이 나가는 건 질색인데…….’
마침내 모든 기사들이 집무실에 도착했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먼저 성격이 급한 글랜이 화가 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응원군을 보내 주기로 약속했던 케릭 자작이 자신의 개인 사정을 이유로 갑자기 응원군을 안 보낸 것은 신성한 귀족의 명예를 떨어뜨린 배신행위입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반드시 응징을 해야 합니다.”
전사한 토마스와 친했던 앨버트 주니어도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갑작스럽게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우리 영지군의 피해가 많이 커졌습니다. 반드시 보복을 해야 합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제라린도 저번 전투에서 켄스, 토마스, 제킨스 등을 잃었기에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휴… 좀 조용히 영지를 발전시키려고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구나. 나는 전쟁을 몰고 다니는 사람인가? 음… 확실히 그 케릭 자작이라는 작자가 나를 배반했다. 이대로 두면 내가 웃음거리가 될 터… 영지전을 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이길 수 있으려나? 하긴 이번에는 내가 공격을 하는 거니까 싸우다가 안 되면 뒤로 살짝 물렸다가 패하는 걸로 하지 뭐. 그깟 영지전에 패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렇게 최소한의 보여 주기 위한 영지전을 하기로 결심한 제라린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귀족간의 신성한 약속을 어겼다. 따라서 영지전을 신청한다. 안토니 경!”
“예!”
제라린이 영지전 신청을 위해서 케릭 자작에게 안토니를 보내려는 순간에 갑자기 휴렌 집사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영주님, 수도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잠시 뒤 제라린의 집무실로 안내된 전령이 고개를 숙이면서 왼쪽 무릎을 꿇고 오른쪽 팔꿈치를 직각으로 만들어서 앞으로 내미는 예를 차린 다음에 제라린에게 공손히 문서를 내밀었다.
제라린이 이 문서에 밀납으로 찍힌 아시렌 왕가의 문장인 포효하는 사자를 확인하자 문관인 사무엘이 문서를 열어서 읽기 시작했다.
“아시렌 왕국의 동쪽에 있는 제논 왕국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따라서 왕국의 전 영주들은 군사력 확충에 힘을 쏟기 바라며, 앞으로 6개월간 영지간의 사사로운 다툼은 금지한다.”
칙령의 내용을 들은 제라린이 그 내용을 주위에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음… 당분간 영지전을 금하는 칙령이오. 따라서 케릭 자작에 대한 영지전은 당분간 보류하겠소.”
기사들은 영지전 보류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냈지만 칙령에 의한 영지전 금지였기에 불만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런 기사들을 보면서 제라린이 생각에 잠겼다.
‘음… 이런 칙령이 내려온 게 오히려 다행인거 같군. 이제야 조용히 영지를 발전시킬 수가 있겠어. 아니지. 혹시 모르니 기사들의 방어구부터 확충해야겠다. 이건 제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그리고 제라린은 안토니를 급히 수도로 보냈다. 안토니의 임무는 왕과 귀족원에 주노 자작과의 영지전에 대한 결과 보고였다.
그런 후에 제라린은 통합된 대장간에서 나오는 강철로 기사들이 입을 플레이트 메일을 만들 것을 명했다.
질 좋은 강철들이 대량으로 나올 것이기에 조만간 기사들의 방어력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강철이 대량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사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비싼 플레이트 메일을 대량으로 만들 것을 명령한 제라린의 재정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어린아이같이 기뻐했다.
모두들 무인이기에 전투와 관련해서 좋은 장비를 가지게 되면 그만큼 자신이 죽거나 다칠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었다.
10. 추수 감사 축제(1)
제라린은 주노 자작과의 갑작스러운 영지전으로 미뤘던 축제를 시작했다.
총 5일간의 축제 기간을 선포하고 다신교 사회를 이루고 있는 영지민들이 좀 더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각각의 날을 기념하는 신들도 같이 발표했다.
첫째 날은 대지의 여신인 다이지스에게 올해의 추수에 대해서 감사하는 의미로 그녀를 그날의 신으로 기념했고 둘째 날은 주신인 메젠스의 날로 정했다. 셋째 날은 태양의 신인 솔라의 날로 정했고 넷째 날은 달의 여신인 무나의 날로 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날은 내년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다시 대지의 여신인 다이지스의 날로 정했다.
이 축제를 위해서 제라린은 영지민들에게 밀, 보리, 소금에 절인 쇠고기, 돼지고기, 노루 고기, 물고기, 닭, 신선한 채소, 포도주, 맥주 등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는 제라린이 각 마을별로 나눠 주는 식량들을 보고 영지민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제라린이 수확에 따른 세금을 낮추고 영주들이 각종 명목으로 수탈하던 세금들을 없애 그들에게 무척 좋은 영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렇게 축제를 위해서 음식까지 내려 주자 이전까지 이런 영주를 보거나 소문으로도 듣지를 못했기에 영지민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것을 뺏어 가는 다른 영주와 달리 영주가 이런 식량을 나누어 주고 영주성에서 나온 세금징수원들이 축제일의 나머지 날에도 이렇게 식량을 나누어 준다고 말했다.
세금징수원이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따로 말하라고까지 하자 모여서 그의 말을 듣던 영지민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야 제라린의 진심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 중에는 항상 자신의 것을 뺏어 가던 세금징수원이 무언가를 주고 또 더 필요한 걸 준다는 말에 이것이 꿈인지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던 사람도 있었다.
먼저 남자들이 제라린이 내놓은 식량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마을의 공터로 옮기자 이번에는 여자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모두들 각자의 집에서 커다란 솥과 여러 가지 조리 기구들을 가지고 오는 사이 남자들이 공터에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야외 아궁이를 비롯하여 취사 환경을 만들었다. 이윽고 여자들이 아궁이에 솥을 걸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처음 만지는 재료들도 많았지만 그중에 솜씨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내 맛있는 냄새가 주위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며 그 주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