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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
제천문



제천문 1권(1화)
프롤로그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흐려진다.
한 방울, 두 방울…….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한 빗물 소리가 시린 가슴을 움켜쥐도록 만들었다.
“하아…… 거기 있느냐?”
작은 목소리.
하지만 너무도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울림을 들으며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제발, 제발…….’
찢어질 것같이 아픈 심장을 움켜쥐며 소년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허, 있으면 대답을 해야지. 이제 어린아이도 아닌 녀석이 장난기는 여전하구나.”
“…….”
인기척을 느꼈는지 부드러운 미소로 소년을 향해 곁에 앉으라고 손짓하는 중년의 남성은 몹시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 원인을 알고 있는 소년은 피가 나올 정도로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요즘 건강은 괜찮더냐? 날씨가 많이 추워진 것 같…….”
“그만! 제발 그만하세요! 이까짓 게…… 이까짓 게 뭐라고!”
소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
순간적으로 말이 끊긴 중년의 남성은 당혹스러웠는지 입을 닫았고, 소년도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
쏴아아!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흐르며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다시 그때처럼만……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소년의 눈이 중년 남성의 모습을 훑었다.
파리한 안색을 보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중년 남성의 눈동자는 소년을 직시하지 못한 채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과 발은 미세하긴 하지만 끊임없이 작은 경련을 일으켰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했지만 한 번씩 움찔거리는 눈썹과 입매는 중년의 남성이 결코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모두 알고 있다니, 이야기하기 편해졌구나.”
“…….”
소년은 침묵으로 답했다.
갈수록 짙어지고 있는 그리움과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참아 낼 수 없는 것이다.
당장에라도 흐느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아니, 사실 이미 눈가에는 빗물이라고 속일 수 없는 물방울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결코 네 탓이 아니다. 내 욕심이지.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왜, 왜 그랬죠? 내가 언제 그렇게 해 달라고 무릎 꿇고 절이라도 했습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핑계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지만, 이런 선택밖에 할 수 없는 날 이해해 다오.”
“못합니다. 아니, 절대로 안 해!”
평소 소년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놀랄 정도로 반항적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이유가 중년 남성에 대한 애정과 집착임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보잘것없는 가문의 숙원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아버지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뚝, 뚝!
결국 차오른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소년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세상의 유일한 혈육을 흐려진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 혼자……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
“미안하구나.”
슬픔에 젖은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버지인 중년 남성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더듬거리는 손길로 겨우 붙잡은 손을 꼭 움켜쥐는 것이 전부였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구나. 잘 들어야 한다.”
“……듣기 싫습니다.”
“어리광 피우지 말고 들어!”
움찔!
죽어가던 사람의 기세가 아니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혼탁하게 변했던 눈동자가 강한 안광을 발했다.
“넌 이제 혼자다. 강해져라. 마음을 굳게 먹고 울지…… 마라.”
스윽!
남자의 손이 소년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한 보물을 대하듯…… 무리한 도전으로 망가진 시야를 대신하여 손끝으로라도 아들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너에게까지 무거운 짐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후후, 결국 이렇게 끝이 났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아버지…….”
“내가, 내가 죽고 나면 침상 아래의 상자를 열어 보거라. 그러면 몰랐던 가문의 비사(秘事)를 알 수 있을 거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마지막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제발, 제발…… 하늘이시여, 좀 더 시간을 주세요.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고작, 고작 이런 마지막이라니!’
울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을 다무는 소년.
턱이 덜덜 떨려 왔다.
그 흔들림이 붙잡은 손을 타고 전해진 것인지, 소년의 아버지는 씁쓸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정현아, 행복…… 해야 한다.”
“으으으.”
입을 벌리지 않기 위해서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하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
“아, 아버지!”
허공을 응시하던 공허한 시선이 어느새 닫혀 있었다.
눈을 감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모습을 보며 소년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한 사람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1. 제천문(1)


1219년,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최우가 야별초를 설립.
1231년, 몽골의 침략 시작.
1232년, 강화도 천도.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통합하여 삼별초를 조직.
1232년, 몽골의 2차 침략.
1235년, 몽골의 3차 침략.
1247년, 몽골의 4차 침략.
1251년, 몽골의 5차 침략.
1254년, 몽골의 개경 환도 요구.
1254년, 몽골의 6차 침략.
1258년, 최의 사망.
1259년, 고려와 몽골 사이의 강화 성립.

책장을 넘기는 눈빛이 날카롭다.
정현이란 이름을 가진 소년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빛이 바랜 종잇장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최충헌(崔忠獻).
최우(崔瑀).
최항(崔沆), 만종(萬宗).

아무것도 모른 채 읽었다면 단순히 고려시대를 다룬 역사책이라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아니었다.
“이자인가?”
만종(萬宗)이라는 이름을 보며 정현의 눈빛이 멈췄다.
고려시대의 무신정권을 이끌었던 최우의 서자로, 승려가 되어서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만종이라는 법명을 갖게 된 인물이었다.
“…….”
이름을 찾아낸 정현에게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할 말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정현은 지금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랜전에 죽어 버려서 화풀이도 할 수 없는 오랜 조상(祖上)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빌어먹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부친을 가슴속에 묻어 버린 것이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
세상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상실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멍하니 집안 구석에서 식음을 전폐하며 쓰러져 있던 정현을 일깨운 것은 바로 부친이 이야기했던 한 권의 책이었다.
“이것인가?”
가문의 비사(秘史)가 기록되어 있다는 책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몇 번이고 보수를 했는지 군데군데 누런 종이와 섞여서 새것 같은 페이지들이 보였다.
오래된 종이에는 한문으로 빼곡하게 새것에는 한글로 쓰여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한문을 배운 정현이기에 읽는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다.

정말로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강요로 승적(僧籍)에 이름을 올린 뒤 계속되었던 지루한 나날들.
그 우연하고도 기적과 같은 만남은 변화에 목마른 나에게 있어 일탈을 꿈꿀 수 있는 짜릿한 감로수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기록된 페이지와 족보(族譜)가 나온 페이지를 지나 한 편의 일기와도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랜 조상인 만종이 적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
정현은 그것을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 승려 생활을 시작한 단속사는 무척이나 따분한 곳이었다.
그것은 절이 위치한 지리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 것은 무뢰한들을 모아 놓고 사냥을 즐기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같이 친하게 지내던 놈 두엇을 데리고 사냥을 즐기고 있는데, 갑작스레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벼락이 하늘을 갈라 버렸다.
때마침 내리친 벼락이 옆에 있던 나무를 때리자 혼비백산한 나는 일행들도 신경 못 쓰고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다가 풀숲 앞에 가려진 비탈길을 발견 못하고 그대로 굴러 떨어지게 된 것이다.
충격으로 인해서 정신을 잃고 다시 의식을 찾은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희미한 시선 너머의 존재!
그것은 정말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새하얀 빛의 광채들이 파도의 포말처럼 일어나 허공으로 치솟다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는 몽환적인 모습 속에서 무릎을 꿇고 양팔을 하늘로 벌리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아아! 정말 다시 생각해 봐도 놀라운 경험이요, 만남이었다.
인세(人世)를 통틀어서 그런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
이야기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한글로 된 부분이 끊어졌다.
이번에는 누런 종이 위로 한문이 적혀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한글보다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다 보니 정현은 절로 짜증이 치밀었다.

그…… 아니,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다시없을 운명을 느꼈다.
천상에서 인세로 내려온 선녀(仙女)가 이러할까?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그 미모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그것밖에 없으리라.
개경(開京)에서 날고 긴다는 미녀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던 나였지만 그녀의 앞에서는 모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을 확신했다.
그렇게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미(美)를 접하며 멍해져 있는 나에게 그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인연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