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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2화)
1. 제천문(2)
펄럭!
다시 한 장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정현은 갈수록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정신없이 책을 읽어 갔다.
오랫동안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던 가문의 비사(秘史)였다.
이보다 집중할 수 있는 내용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최고의 권력자인 최우(崔瑀)를 아버지로 둔 나였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무정한 것이다.
자식마저 견제할 수밖에 없기에 팔자에도 없는 승려 노릇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나이기에 지금까지 숨겨 왔던 열등감과 박탈감이 그녀의 유혹적인 미소를 접하며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인연을 맺게 되면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솔직히 나는 그 이야기를 믿지도 않았고, 그 순간만큼은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도 있었다.
이런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와 부부가 된다는데, 무엇이 아쉬울 것인가.
“어리석은 자…….”
조상이라고 해도 독설은 피해 갈 수 없다.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상식을 벗어난 현상을 접하면 당연히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함에도 결국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미모의 여자뿐이다.
처음 보았던 빛의 기둥과 주위의 풍경을 보며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인가?
정현은 이를 갈며 다음 내용을 살폈다.
그렇게 미호(美狐)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와 나의 부부로서의 연이 시작되었다.
정말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바깥세상의 모든 것을 잊고 그렇게 행복에 겨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흘리듯 한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지 못했던 나는 호기심이 생겨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보라고 재촉했다.
‘이 땅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위대한 가문이 있었답니다. 그 누구보다 고귀하고 존엄한 분들의 가문이죠.’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고려 최고의 권력자인 최우를 부친으로 두고 있으며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는 고귀하고 존엄한 가문의 구성원 중 하나가 바로 나라는 것을.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하다는 생각에 거듭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 땅에 존재했던 위대한 가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문이 시작된 뿌리와 무엇을 위한 가문인지, 그리고 현재의 상황까지도…….
시간이 그렇게 과거로 흘러갈수록 정현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
일찍이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다양한 이유로 이루어지곤 했다.
지도층의 유능함과 무능함은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다.
역사에서 그러한 사례를 찾아본다면 가까운 근대의 역사로 조선 왕조를 꼽을 수 있다.
고려가 비교적 무(武)를 중요시했다면, 반대로 무를 천시하고 문(文)만을 중요시하였으며 허구한 날 당파 싸움에 몰두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아 임진왜란의 화를 자초하였다.
그 외에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강대국이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은 천재지변(天災地變)과 같은 재앙이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唐)나라나 고려를 짓밟은 몽골의 존재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늘 시대를 이끌어 나갈 영웅들이 등장하여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해 내곤 했다.
수나라의 대군을 살수에서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이나 당나라 태종을 안시성에서 물리친 양만춘 장군, 귀주에서 거란을 크게 물리친 강감찬 장군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다.
“허허, 그분들이 모두 당신이 말한 가문의 구성원이었단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만종은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삼국시대의 위대한 장군부터 최근 고려시대의 영웅까지 총망라하며 늘어놓는 부인을 바라보며 잠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이니, 말은 다한 것이다.
“부인 농(弄)은 적당히 하시구려. 그런 가문이 대체 어디 있다는 말이오.”
“사람들은 늘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법이지요.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겼던 분들의 희생은 당시만 기억할 뿐입니다. 오래라고 해 봐야 고작 십 년이나 될까요?”
“…….”
평소 보아오던 부인이 아니었다.
사근사근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눈을 빛내며 고집스럽게 말해 오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흠흠, 알겠소. 그렇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대단한 가문은 어떠한 이유로 드러나질 않는 것이오? 게다가 그분들의 성(姓)도 각기 다르고…….”
만종은 은근히 말을 돌려서 허점을 지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 대단한 영웅들이 모두 한 가문의 인물들이라니.
“그분들이 모두 피로 이루어진 관계는 아닙니다. 다만 피보다 더욱 진한 사제(師弟)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세상의 이목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배후의 적들을 견제해야 되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게 사실이오?”
“그러하옵니다.”
처음에는 지어낸 이야기로만 여겼던 만종도 문뜩 처음 미호와 만났을 때 보았던…… 꿈결에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한 찬란한 빛의 기둥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솔직하게 물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사실 난 그리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하오. 가문은 만전(萬全)이 이어받을 것이니, 나에게는 별다른 힘이 없소.”
“이 나라에 다시 한 번 위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예지의 힘을 지닌 무녀(巫女)입니다. 서쪽에서 일어난 강한 기운이 들판을 태우는 불길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강대한 외세의 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니, 어찌 국운(國運)이 위태롭지 않다 할 수 있겠습니까?”
“허…….”
미래를 엿본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힘이란 말인가.
만종은 인세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미(美)를 지녔지만 그 외에는 평범하게만 보이는 자신의 부인에게 그러한 힘이 있다는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예견한다는 것은…….”
“부군과의 만남을 이미 예견한 저입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
만종은 미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쏟아지는 비바람과 벼락을 피해 도망치던 와중에 비탈길을 굴렀다.
그리고 한참 뒤 잃어 버린 정신을 차리자 본 적도 없는 동굴에서 인세의 것이 아닌 듯한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광경을 접하게 되었고, 그 뒤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허허…….”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받기를, 무당과 같은 것들은 근본부터 한 없이 천하며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몹쓸 것들이고, 가끔씩 본인이 ‘선인(仙人)이오’ 하는 것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인간들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근원이니 발견하는 즉시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고 교육받았던 만종이다.
그런데 자신의 부인이 그런 존재라니.
게다가 진짜로 신통력과 같은 힘이 있다고 한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처음 인연을 맺을 때 하셨던 약조를 기억하십니까?”
만종을 기억을 되새겼다.
당시에는 별다른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내용들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셔야 한다는 약조였지요. 부군께서는 그것을 승낙하셨고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무, 무엇이 말이오?”
만종은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현실로 드러났다.
“제천문(祭天門)의 삼십칠대 계승자로서 만종을 정식 문하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이 나라입니다. 우린 민족(民族)을 지켜야 합니다.”
죽음보다 무거운 영혼의 족쇄가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
펄럭펄럭!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처음 제천문을 만들었던 존재는 삼국시대 이전 이 땅을 지배하던 ‘어떤’ 국가의 현인(賢人)이었다.
대륙의 한(韓)족을 압도하는 문화와 지혜를 가지고 있던 그 나라는 자기 욕심만 챙기려는 지도층으로 인해서 많은 혼란과 고난을 겪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현인은 지도층을 모두 몰아내고 놀라운 문화와 지혜를 자기 손으로 모두 거두었다.
그렇게 찾아온 평화.
이 땅의 민족을 사랑했던 현인은 제천문을 세워 그가 소중히 여기던 ‘가치’들이 보전되기를 원했고, 시대에 앞선 힘과 지식으로 그 뜻을 이루었다.
현인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제천문을 이끌며 나라와 민족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스스로 나서거나 뛰어난 인물들을 문하로 받아들여 힘과 지혜를 베풀어 준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냥 순탄할 것만 같던 현인의 의지는 의외의 벽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더 이상 가문을 이끌어 갈 주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놀라운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던 현인은 자신이 남긴 것들이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손들을 그 수호자로 남겼다.
신비한 주술을 사용하여 힘과 재능이 피[血]를 통해 유전되도록 하였고, 대대로 제천문의 주인은 막강한 힘과 지혜를 지녀 가르침을 받은 문도들이 나쁜 마음을 품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겸했다.
그런데 더 이상 온전한 피를 이어갈 인물이 없는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가장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여인이 의로운 인물을 택하여 혼인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과감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현인의 피가 상당량 흐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약간의 공백이 생겼고, 때마침 강성해진 당(唐)나라의 침략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했다.
그렇게 100년, 200년…… 시간이 흘러서 다시 한 번 대가 끊어질 순간이 다가왔고,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택했다.
점점 흐려지는 현인의 핏줄.
제천문의 주인이 약해진다는 것은 곧 나라를 수호할 힘이 약해지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대륙과 섬에서도 막강한 암중 세력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한 제천문은 큰 피해를 입고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런 와중에도 대가 끊길 위험에 우연히 만난 만종과 연(緣)을 맺으니, 피가 더욱 흐려져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진 몽골의 침략!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몽골의 군대는 약화된 제천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적이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6차까지 이어진 침략에서 국가의 멸망만을 간신히 막았을 뿐,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지고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그 뒤로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치열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대륙과 섬에서 태동한 암중 세력들은 그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지루할 정도로 길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점점 약해지고 있는 제천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속세와의 연을 완전 끊어 버린 채 은둔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민족의 위기가 찾아오게 되면 목숨을 걸고 등장해서 나라를 지키는…… 잔인한 운명의 굴레가 반복됐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정현은 조상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반만년에 가까운 긴 역사 동안 가문의 모든 주인들이 일괄적으로 그런 애국심을 지녔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펄럭펄럭.
“……!”
그렇게 의문을 가지다가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제천문이 유지되었던 이유를.
조상 중에서 분을 이기지 못한 한 명이 그에 대한 내용을 글로 남긴 것이다.
정현은 눈을 크게 뜨고 내용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