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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3화)
1. 제천문(3)
정말 원망스럽고 원망스럽다.
어째서 자손들에게 이런 가혹한 족쇄를 채워 버린 것인가.
피가 흐려진 뒤로 대부분 주술의 힘에서 벗어나 가문을 떠났지만, 나는 아직도 요원하다.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제천문을 이어 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이 힘을 뭐라고 해야 할까?
암시? 최면?
놀라운 것은 이것이 강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인의 의지에 반(反)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진다면 머리가 깨어져 나가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인 손오공이 금고아를 찬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저주받은 피에는 그런 강력한 주술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지쳤다.
힘들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
하루라도 좋으니, 내가 원하는…… 내 의지로 사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
나라와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인은 정말이지 존경해야 마땅할 인물이겠지만, 후손의 입장에서는 욕설이 절로 나올 것이다.
힘과 지식을 나눠 줄 문도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감시하고 가문을 수호해야 할 가주(家主)마저도 강력한 주술과 결코 끊어 낼 수 없는 혈연의 힘으로 옭아맨 것이다.
‘그럼 설마 나도?’
정현은 흠칫하다가 금방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 대한 안 좋은 생각들을 많이 하였지만, 별다른 고통을 느낀 적이 없던 것이다.
‘왜 그런 거지?’
펄럭펄럭.
“…….”
혹시나 하는 생각에 페이지를 넘기는 정현의 손짓이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
새하얀 종이가 내용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고, 그 안에 쓰여진 필체는 너무도 익숙하고 그리운 것이었다.
‘아버지!’
정현의 시선이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정신없이 흔들렸다.
아들에게…….
정현아, 정현아.
소리를 내어 이름을 불러 보고 싶지만 더 이상 부르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구나.
네가 이 글을 보고 있다는 것은 이제 가문에 대한 비사(秘史)를 어느 정도 알았다는 뜻이겠지.
고려시대 때부터 시작된 우리 가문과 제천문의 인연은 정말 끈질기다는 말만 가지고는 다 표현할 수가 없구나.
자그마치 8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어 왔으니.
이 아비는 어렸을 적부터 이런 가문이 싫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결국 이것은 희생이다.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밤마다 숨죽여 울고 계신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가끔씩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 정도였지.
그렇기에 네게는 가문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이야기도 하지 않았단다.
원래대로라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대략적인 이야기를 해 주어야 했음에도…….
정현아, 너만은 이 길을 걷지 않기를 빌었다.
“…….”
정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이 없어져야 그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달빛이 내려앉은 창가에 등을 기댄 정현은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한 글자마다 구구절절 느껴지는 아버지의 심정이 괴롭고 슬펐으며, 울화가 치솟기도 하고…… 그럼에도 결국 마지막은 자식을 생각하며 걱정하는 그 마음이 아플 정도로 심장에 박혀들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하구나.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하던 늠름한 모습은 내게 있어 평생의 자랑이란다.
처음으로 받아 온 100점짜리 시험지는 정말 기뻤지.
평범하면서도 남들이 모두 누릴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맙고 좋았단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늘을 원망했지.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언제까지 이래야만 하느냐고…….
뚝뚝.
모두 말라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정현은 거칠게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흐려진 시선 너머의 글씨를 읽어 내렸다.
평범한 아이처럼 놀지 못하고.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이 아비와 함께 늘 수련장을 지켰던 네 모습을 보며 정말 가슴이 찢어졌단다.
하지만 우리를 옭아맨 사슬은 너무도 견고했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정말 그것은 우연한 일이었지.
나에게 절망과 행복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 우연한 계기.
자세한 내용을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거라.
누가 뭐라고 해도 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들이고,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을 거다.
그것 하나만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을.
늘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놀며 학원도 다녀보고 싶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칭얼거리면 늘 굳은 얼굴로 무섭게 다그치며 수련장으로 끌고 가곤 하셨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많이 표현해 주지 그러셨어요.”
곁을 스치는 바람처럼 공허하고 허망한 혼잣말이었다.
이제는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그리움의 흔적들.
정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렸다.
수많은 조상들이 피를 타고 흐르는 금제(禁制)를 해제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
하지만 제천문을 만든 현인은 당시 생명의 기운이 풍부했던 고대시대에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인물.
지금처럼 기운이 혼탁하고 어지러워진 상황에서 그러한 인물이 직접 행한 주술을 깨뜨리기는 요원한 일일 수밖에…….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었단다.
너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으니까.
“…….”
이어진 글에는 어떤 과정으로 금제를 이겨 내기 위한 실험을 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문제점, 개선점 등 수련을 위해 참고해야 할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이, 이것을 위해서…… 그렇게 고통을 받으신 겁니까?’
정현은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시력을 잃고 전신의 근육이 통제되지 않아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며 수시로 발작을 일으켰다.
내부의 장기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문제가 생겼고, 숨을 쉬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몸이 망가질 때까지 온갖 고통들을 감수하고 참아 내며 창안해 낸 방법이었다.
“아버지…….”
꽉 다문 입술 끝에 피가 맺혔다.
오열을 참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해내고 말았다.
익혀라.
이 아비의 모든 것이다.
이것으로 질긴 사슬은 모두 풀어졌다.
정현아, 행복해라.
이제 폭력과 야만의 시대는 갔다.
이제 대화와 평화의 시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개 개인이 더 이상 고통받고 구속받는 운명은 없다.
네가 원하는 삶을 찾아라.
누구보다도 평범한 행복을 느끼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 싶던 네 소원…….
이뤄 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구나.
“내가, 내가 정말로 원했던 건…… 그 행복을 둘이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끝나 버렸지만.”
고개 숙인 정현의 목덜미를 비추던 달빛마저 사라진 쓸쓸한 밤이었다.
2. 인연(1)
달그락달그락.
평소 관리하는 사람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인지, 정갈한 느낌의 식기에는 맛있는 반찬들이 담겨 있었고, 식탁에 앉아 있는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워낙에 대식가인 탓에 양도 많았다.
“엄마, 한 그릇 더요!”
우측에서 빠른 속도로 밥을 비우던 소녀가 불쑥 빈 그릇을 내밀며 외쳤다.
“어머! 아름아, 그렇게 빨리 먹으면 탈나요.”
“너무 맛있어서 천천히 먹을 수가 없는걸요. 게다가 운동하고 와서 배도 고프고.”
“흠흠, 부인. 나도 한 그릇 더 주시오.”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익숙한 일인지 부엌으로 가서 새로운 밥을 퍼 오는 중년의 여인.
5분 뒤, 그마저도 다 비운 두 사람을 보며 이미 식사를 끝낸 소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정말 두 사람의 식사량을 보면…… 후아! 누나, 도대체 뱃살은 어디로 다 숨긴 거야? 그렇게 먹는데 살이 안 찌네?”
따악!
“악!”
“이게 어디서 하늘같은 누님한테 뱃살 이야기야. 당연히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하는 나에게 그런 흉측한 것이 존재할 리 없지.”
잔뜩 콧대를 세우며 말하는 아름이라는 이름의 소녀를 보며 소년은 남모르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저번에 2㎏ 늘어났다고 하루 종일 체중계 앞에서 살았으면서…….”
“뭐?”
“아, 아무것도 아니야. 누나 이쁘다고.”
짐짓 주먹을 들어 올리는 아름의 모습에 소년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회의 진실은 어디로 갔느냐’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흠흠. 얘들아,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에 앉거라.”
“……?”
“뭔데요?”
부엌에서 설거지 준비를 하던 중년의 여성과 티격태격하던 두 남매는 가장이자 그들의 아버지인 한영진의 진지한 목소리를 들으며 호기심에 두 눈을 빛냈다.
“이 아비가 한국무술협회 말고도 고대무술협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구나.”
“잘 알죠. 작년에 방문하신 자운도장분들도 고대무술협회 소속되어 있잖아요.”
“그래, 아름이 말이 맞다.”
영진의 딸, 아름은 여자답지 않게 어릴 적부터 무(武)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반면 아들인 재성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며 학교에서도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정도의 수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