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제천문 1권(4화)
2. 인연(2)
내심 둘이 서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영진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고대무술협회에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고문(顧問)이 한 분 계시지. 정말 놀라운 정도의 지식과 식견을 지니셔서 그분을 아는 모든 무술인들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헤에, 그런 분이 있으셨어요? 혹시 한 번 뵐 수 없으려나? 그렇게 대단하시다면 한 수 지도를 받고 싶은데.”
“아쉽게도 연락이 왔단다. 일주일 전에 별세(別世)를 하셨다고 말이야.”
“저런, 안타까운 일이네요.”
영진의 부인이 남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뜻을 전했다.
그것을 느끼며 피식 웃음 짓는 영진의 모습이 부부 사이의 화기애애함을 보여 주었다.
“사실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약속드린 게 하나 있는데, 나중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아들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지.”
“네?”
“아, 아들이요?”
갑자기 화제가 전환되며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영진의 이야기에 두 남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했다.
“그래. 올해 17살의 아들이 하나 있는데, 20살이 될 때까지 부탁한다고 하셨지. 워낙 신세를 진 것이 많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
앞으로 영진이 꺼낼 이야기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파악한 부인과 두 남매는 침묵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설마 저랑 동갑인 남자애를 우리 집에서 살게 하겠다고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20살이 될 때까지?”
“미리 이야기를 못해 준 것은 미안하지만, 그렇게 해야 될 것 같구나.”
“이씨! 너무하잖아요.”
아름이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참 꿈도 많고 감수성도 예민한 17살의 여고생에게 가족도 아닌 외간 남자랑 한 집에서 살라는 것은 확실히 큰일이었다.
“그럼 언제쯤 오기로 했나요?”
“음, 아무래도 오늘 저녁 늦게쯤 도착할 것 같군.”
워낙 바른 성품의 부인인지라 크게 걱정은 안 했지만, 혹시나 바가지를 긁히게 될까 긴장하던 영진은 담담한 부인의 목소리에 안도하며 점심쯤에 받은 전화를 떠올리며 답했다.
“어머, 많이 늦었네요. 빨리 이야기해 주셔야지.”
찰싹!
“컥!”
영진의 등짝을 호되게 한 번 치고는 집안 청소를 해야 한다면서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부인, 이미숙 여사였다.
“…….”
“…….”
부인 다음으로는 딸이었다.
남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영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였지만, 지금은 고리눈을 뜬 채 째려보고 있었다.
“험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잖아요. 어린애도 아니고, 저랑 동갑이에요. 지금까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갑내기랑 20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
“이씨!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꼭 우리 집이 아니라도 괜찮잖아요.”
완전 골이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치는 아름의 모습에 영진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당초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라고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 뜻밖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전 찬성이에요.”
“야!”
바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재성이었다.
손을 들고 찬성을 뜻하자 아름이 매섭게 눈을 치뜨며 소리쳤지만,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피식 웃는 재성이었다.
‘이미 아버지나 어머니의 뜻은 굳어지신 것 같으니, 지금 반대해 봐야 손해지. 그리고 집에 다른 사람이 하나쯤 있다면 누나의 저 폭력적인 성향도 조금은 줄어들 거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 내숭덩어리니까.’
과연 학년 1, 2등을 다투는 수재다웠다.
재성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끝내고 찬성의 뜻을 표한 것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 딸만 남았구나.”
“싫다니까요. 흥!”
영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콧방귀와 함께 고개를 돌리는 아름이었다.
사실 그녀도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격렬하게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랑 한집에서 살면 얼마나 신경 쓸 것이 많은데요. 목욕을 하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고, 속옷 빨래도 마찬가지예요. 그 외에도 자잘한 부분에서 수도 없이 많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테죠.”
“…….”
아름의 반항도 일리가 있었다.
생판 모르던 동갑내기 남자애가 한집에서 살게 된다면 얼마나 신경 쓸 것이 많을까.
평소 집 안에서만큼은 긴장을 풀고 남자 이상으로 털털하게 살아 온 아름으로서는 숨이 막히는 기분일 것이다.
“킥킥! 불편하거나 거슬리면 누나의 본모습을 보여 주고 확 겁을 주면 되잖아. 그러면 자연히 입단속도 될 거고, 밖에서 보여주는 이중인격자 같은 모습의 비밀도 지킬 수 있을 테고.”
“야, 한재성! 너 진짜 혼나 볼래?”
아름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그것만큼은 겁이 나는지 고개를 저으며 눈을 피하는 재성이었다.
“흠흠,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구나. 내가 젊을 적에 그분에게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기에…….”
“씨이! 싫다니깐, 정말.”
영진의 말을 끊으며 연신 볼멘소리를 내뱉는 아름이었지만, 이미 대세를 바꾸기는 어렵다는 것은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집안의 가장인 영진이 가장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으며, 그 이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 어머니도 동참하였고, 동생인 재성은 약간 중립적인 모양새지만 그나마도 수락한 뒤였다.
“이게 뭐야? 가장 불편해지는 건 난데, 내 뜻은 전혀 상관하지도 않고…….”
“우리 이쁜 딸, 너무 화내지 말고…… 그래, 이 아비가 용돈을 올려 주마. 30%, 아니, 50% 올려 주마.”
“…….”
평소라면 팔짝팔짝 자리에서 뛰어오르며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부릴 정도로 기쁜 영진의 제안이었지만, 잔뜩 골이 나 있는 아름에게는 불난 집 부채질과 다름이 없었다.
‘흥! 두고 봐. 어떤 애가 올지는 모르지만, 한 달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게 해 줄 테니까.’
겨우 아름을 설득했다고 착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영진의 뒤에서 입을 삐쭉이며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예비 동거자에게 앙심을 품는 아름이었다.
***
빠앙!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귀를 울렸다.
굽이굽이 휘어진 산길보다 더욱 심한 곡선과 경사를 그리며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도로들.
그 위를 질주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차량들과 그것의 배 이상 되는 사람들.
정현은 그 모든 광경들을 지켜보며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야, 어제 8시에 그거 봤어? 킥킥! 정말 웃다가 죽을 뻔했다니까. 그 새로 나온 개그 코너 진짜 웃기더라.”
“에이, 진짜 웃긴 건 네 얼굴이지. 한 번 개그맨을 지망해 봐라. 면접장에서 바로 붙을걸?”
“뭐라고? 웃기시네. 너야말로 얼굴만으로도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거든?”
“놀고 있네. 킥킥!”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두 학생의 시답지 않은 대화가 귀를 스쳐 지나갔다.
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좌석에 앉아서 정현은 모든 주변 환경들을 배제한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
정현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큰 화두는 그것이었다.
그다음으로 제천문의 비밀이나 피의 저주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런 머릿속이 정현의 눈살을 저절로 찡그리게 만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문의 비사를 알게 된 뒤에도 한동안 홀로 가슴앓이를 하던 정현은 이대로 계속 있으면 결국 폐인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움직였다.
오랫동안 살아 왔던 감악산의 산장을 떠나서 서울로 향한 것이다.
가문의 비사가 적혀 있던 책의 마지막 장에는 아버지가 남긴 여러 가지 당부의 말과 함께 한 사람의 연락처와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한영진이라는 이름이었지.’
정현은 그곳에 적혀 있던 이름을 중얼거렸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설명과 함께 약속을 한 것이 있으니 성인이 될 때까지 몸을 의탁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연락을 했을까?’
정현은 차창 너머를 훑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정말 무심결에 일어난 사고였다.
원래 정현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생각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워낙 폐쇄적인데다 오랫동안 홀로 생활을 해 왔기에 부친을 제외한다면 누구와도 진실된 관계를 맺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하하호호 웃으면서 지냈지만, 그것은 결국 껍데기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성향을 지닌 정현에게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타인과 한 지붕 아래서 3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라는 것은 정말 난해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후, 어쩔 수 없지.”
진한 후회감이 밀려들었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정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혼란스러운 마음만큼이나 복잡하고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도심의 풍경을 살폈다.
“한영진 씨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최정현이라고 합니다. 혹시 10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
앞뒤를 다 자르고 다짜고짜 진행된 대화였음에도 다행히 영진은 10년 전에 맺은 약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자 수화기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진심 어린 위로와 슬픔을 전하였고,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로 내려오라는 권유를 하였다.
인면수심의 인간들이 가득한 와중에도 옛 약속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잘한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정현은 혼란에 빠졌다.
과거의 정현은 스스로가 삶의 주체가 되지 못했고,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서 이리저리 이끌리는 삶을 살아왔다.
결국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자 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홀로 서야 해. 스스로의 길을 정해야 할 시점이다.’
정현은 뛰어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어릴 적부터 계속된 수양과 단련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아직은 감정을 수습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성인도 되지 못한 나이에 워낙 큰일을 당했고, 더불어서 가문의 비사를 알게 되자 알게 모르게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내리누른 것이다.
딩동!
―이번 역은 동서울터미널입니다. 오늘도 저희 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그렇게 아픈 머리를 싸매 쥐고 있을 때 버스 기사의 목소리가 종점임을 알려 왔다.
더불어서 정현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내려야지.’
잠시 뒤, 버스가 정차하며 뒷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 뒤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은 정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중을 나온다고 했던 영진을 찾았다.
“아…….”
그러다가 무심결에 시선이 가는 사람이 있었다.
동시에 정현은 기다렸던 사람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음? 아, 정현 군인가? 반갑네. 한영진이라고 하네.”
영진은 40대 후반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170대 후반의 훤칠한 신장과 다부진 체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바, 반갑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살짝 당황하면서 내민 손을 붙잡고 악수를 하고 있는 정현의 두 눈은 영진의 이마를 한 바퀴 두르고 있는 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축] 최정현 환영! [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영진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이자 주위 사람들의 소곤거림을 유발하고 있는 쪽팔림의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