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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5화)
2. 인연(3)


딩동딩동!
“아름아, 문 좀 열어 주렴.”
“네.”
마중나간 영진이 돌아온 것이다.
한씨 집안 가족 모두는 어떠한 기대감에 차서 현관문으로 몰려들었다.
앞으로 최소한 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할 사람이다.
관심이 없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
“자자, 들어와라. 여기가 우리 집이다. 오늘부터 정현이가 살 곳이기도 하지.”
“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뒤, 초저녁의 어둠을 해치고 두 명의 남자가 집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크다!’
매일 보던 영진의 모습은 자동으로 필터링되었다.
셋의 시선은 그 뒤에서 들어오는 한 남자에게 고정되었고, 첫 감상은 모두가 동일했다.
‘180㎝? 181㎝? 고1이라면서 엄청 크네.’
아직 한참 더 성장할 때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키였다.
‘윽, 얼굴도 잘생겼네.’
처음 우월한 키를 보고 질투심을 느낀 재성은 외모마저 뛰어난 방문객을 보고 기가 죽어 버렸다.
반면, 아름은 다른 쪽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두꺼운 옷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균형이 잡혔어. 게다가 신체조건도 좋고…… 만만치 않은데.’
180㎝를 넘는 신장과 호리호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통통하지도 않다.
적당히 균형 잡힌 것이라 짐작되는 신체는 아름으로 하여금 상대방의 실력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하하, 자기소개들부터 하지. 정현아, 이쪽은 우선 내 와이프란다.”
“안녕하세요. 이미숙이라고 해요.”
꾸벅!
미숙이 인사를 하자 정현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예의가 바르다고 느꼈는지, 만족해하는 미숙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재성이 나섰다.
“올해로 15살인 한재성이라고 합니다. 저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하구요.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이! 앞으로 하루 이틀 같이 있을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세요. 제가 두 살 어리니까 편하게 말 놓으세요.”
“아, 아…… 네.”
재성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말끝을 흐리는 정현이었다.
이어서 마지막 차례인 아름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서로 머쓱하고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둘이 서로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재성이 끼어들었다.
“에이, 둘이 무슨 미팅 나왔어요? 옆에서 보기가 더 부끄러워 가지고 원. 그냥 이름하고 나이 소개하고 앞으로 잘 지내면 되는 거죠.”
“한재성, 너!”
“킥킥!”
순간적으로 발끈하다가 옆에 있는 정현의 존재 탓에 성질을 죽이는 아름과 그것을 확인하고는 앞으로 재미있겠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재성이었다.
“……그쪽하고 동갑인 17살이고 이름은 한아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최정현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소개가 끝나자 영진이 얼른 들어가자고 손짓하고는 2층에 있는 두 개의 방 중 하나를 가리키며 앞으로 그 방을 쓰라고 알려 주었다.

“후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정현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과 대담한 성품을 지녀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사이에다가 아버지의 쪽지 하나만 믿고 신세를 지려고 온 것이다.
그것도 보통 신세가 아니라 3년이나 생면부지의 사람을 돌봐 주는 것이니, 얼마나 부담이 되겠는가.
‘그냥 무시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감악산을 내려오면서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떠올린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영진은 너무도 따뜻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 주었으며, 조금의 부담도 가질 필요 없으니 당장 서울로 올 것을 이야기했다.
게다가 방금 첫 대면했던 영진의 가족들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따뜻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려 봤을 듯한 정겨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부드럽고 고운 어머니와 틱틱거리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아껴 주는 남매, 거기에 든든한 아버지까지.
그중 하나도 가지지 못한 정현이었기에 더욱 부러움을 느꼈고,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혹시나 ‘조금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을.
‘후, 쓸데없는 생각을…… 일단 내 앞날부터 걱정해야지.’
잠깐 동안의 감상적인 기분에서 빠져나온 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한민국에서 성인이 되지 못한 청소년은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제한되기에 성인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그것은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신용카드를 만들거나 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다양한 제한들이 원활한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해 아버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탁을 하신 것일 테고.’
정현에게는 아버지가 남겨 주신 통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 있는 액수는 천만 원이 전부다.
17살의 나이임을 생각한다면 큰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여긴다면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20살이 넘어서 바로 독립을 하려면 돈을 모아야 한다.’
하지만 정현은 결코 무리를 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가 바라던 평범한 삶은 곧 정현의 소망이나 다름없었고, 그것은 무리하게 능력을 사용한다거나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해서 사람들의 눈에 띄면 그것만큼 큰일도 없지. 평범하게 일해서 평범하게 벌고 평범하게 살자. 소소한 행복…… 그것이면 충분해.’
시대가 변했고 사회가 변했다.
더 이상 과거처럼 뛰어난 무예와 용맹을 가진 장군이나 신출귀몰한 지략을 지닌 책사들이 활약하는 무대는 없었다.
오로지 잘 훈련된 병사들과 첨단과학의 힘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이 군사력으로 대변되었고, 강력한 경제력과 더불어서 뛰어난 문화가 갖춰진 나라를 강대국이라 불렀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더 이상 제천문의 역할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 중에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피의 저주다.’
정현은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다만 현인의 주술로 인해서 만들어진 피의 저주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는 현재의 정현에게 유일하게 확신을 주는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천심법(天心法)을 익혀야지. 죽을 때까지 완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정현은 배낭에 넣어서 가지고 온 물건 중 가장 소중하면서도 둘도 없는 보물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책을 떠올렸다.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구되어 바로 아버지의 대에 완성된 천하제일의 공부(工夫)였다.
현인이 걸어 놓은 피의 저주를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
제천문의 그림자를 모두 지워 버리고 싶은 정현이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천심법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방구석에 숨기고 주술을 걸어 놔야겠다.’
제천문의 공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정신적인 능력을 크게 강조하는 주술과 신체적인 능력에 집중하는 무술이 바로 그것이다.
정현은 주술에는 별로 재능이 없어서 간단한 것만 익혔는데, 정해진 위치에 환상을 보여 주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어서 큰 무리 없이 펼칠 수 있었다.
똑똑!
“……?”
그렇게 짐을 정리하고 조금 쉬려고 하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궁금해하다가 문을 연 정현은 영진의 부인인 미숙을 볼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움직이느라 아직 식사를 못했을 것 같아서 준비를 해 놨는데, 생각이 있나요?”
“아,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호호, 그럼 따라오세요. 아직 집의 구조를 잘 모를 테니까요.”
생각지도 않은 불청객에 귀찮을 법도 한데, 친절한 미소와 말투에서는 정이 넘쳤다.
정현은 문뜩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살짝 우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미숙의 뒤를 졸졸 따라서 걸었다.
“바로 옆방이 아름이 방이에요. 호호, 사춘기의 숙녀가 사용하고 있으니 조심을 좀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낮춰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그래,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
미숙도 자식뻘인 정현이기에 말을 놓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는지 바로 말을 낮춰서 사용했다.
정현은 계단을 지나서 1층의 작은 방에 사는 재성이와 함께 이용할 욕실 겸 화장실을 안내받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자, 차린 것은 많지 않지만…….”
“아닙니다. 정말 진수성찬입니다.”
미숙이 하는 겸양의 말을 끊고 재빠르게 대답하는 정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숙의 말과 다르게 고기 반찬만 두 종류에 정갈하게 담겨 있는 십여 가지의 다양한 반찬과 따뜻하게 김이 올라오는 국을 본다면 아무도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집에서 아버지가 해 주는 것 말고 다른 사람이 해 준 밥을 먹는 것은 참 오랜만이네.’
새삼 감회에 젖어서 잠시 멈춰 있던 정현은 옆에 서 있던 미숙이 어서 수저를 들라는 듯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자 가장 먼저 국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맛있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미역국이었다.
젓가락을 들어 김치를 입으로 가져왔다. 그다음은 가까이 있는 고등어조림이었다.
지금껏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차갑게 식어 있는 밥통의 밥이 정현을 반겼다.
냉장고에 담긴 오래된 반찬을 꺼내 대충 식사를 때우고는 수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향하는 정현의 모습은 1년 365일 동안 변함이 없었다.
그런 정현에게 숙련된 가정 주부의 음식 솜씨는 무서운 마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빨라지고 있는 식사 속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밥 한 공기를 다 비워 버린 정현은 문뜩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숙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후훗, 맛있게 먹어 줘서 정말 고마워. 정현이가 사용할 칫솔은 파란색으로 새로 준비했으니까, 어서 가서 양치하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먹은 것은 직접 설거지를 하겠습니다.”
“저런, 아직 나는 젊으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단다. 게다가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어서 씻고 쉬려무나.”
미숙의 말을 듣고도 몇 번 더 나선 정현이었지만 워낙에 완강하게 거절하는 그녀였고, 결국 배려를 받아들여 화장실로 가 양치질을 하게 되었다.
‘정말 고마우신 분들이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걱정을 한 정현이었지만, 이들 가족과 함께라면 왠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후우, 그럼 오늘은 일찍 올라가서 쉬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꾸나. 방학이긴 하지만 다음 주면 끝나니까, 전학 수속도 밟아야 하고.”
간단하게 양치와 세면을 끝낸 정현은 미숙과 영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최근 일주일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크게 지쳐 있던 정현이었고, 더군다나 오늘은 새로운 환경의 변화로 인해 더욱 많은 피로를 느끼고 있었기에 사실 꽤나 피곤한 상태였다.
‘그럼 좀 쉬어 볼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침대 하나만 달랑 있는 외로운 방이었지만, 그것을 보는 정현은 결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없는데.’
터미널에서 만난 영진은 오랫동안 비어 있던 방이어서 가구가 없다며 내일 당장이라도 필요한 것을 구입하자고 이야기하여 정현에게 부담감을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