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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6화)
2. 인연(4)


‘고마운 사람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정현의 머릿속으로 오늘 새롭게 만난 인연들이 계속해서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에 대한 의리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영진과 그런 남편의 뜻을 존중하며 헌신하는 자상한 성품의 미숙.
약간은 장난스러운 인상이지만 첫 대면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친화력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다가온 재성과 조금 새침한 느낌의 아름까지도 모두 좋아 보였다.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나도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작은 결심을 하며 정현이 잠을 청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
어느덧 늦은 시간이었다.
창밖으로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집 안은 조용하게 변해서 별다른 소음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는 너무도 뚜렷하게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질문을 던지며 정현은 방문을 향해 걸었다.
문을 열자 놀랍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쉬잇!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
정현은 많이 놀랐다.
어둠 사이로 보이는 가녀린 실루엣과 앳된 목소리는 미숙이나 영진의 것이 아니었다.
“예의가 아닌 것은 아는데, 나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
바로 영진의 딸이자 옆방에 거주하는 아름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방문인데다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정현이지만,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이야기를…….”
“따라와. 안내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휙 몸을 돌려서 계단을 내려가는 아름의 모습이 약간은 쌀쌀맞게 느껴졌다.
정현은 왠지 모를 찝찝함에 뒤통수를 살짝 긁으며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아름의 뒤를 따랐다.

끼익!
“음?”
처음에는 아름의 방이라고 생각하다가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쳤다.
하지만 집을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점점 더 당황하는 정현이었다.
“멀리 안 가. 바로 옆이야.”
“…….”
정현이 잠시 멈추자 뒤를 돌아서 재촉하던 아름은 이내 집과 붙어 있는 바로 옆 건물로 들어갔다.
‘여긴?’
외관은 흔하게 볼 수 있는 현대식 건물이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마룻바닥이 나무로 이루어진, 오래된 도장 같은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우리 도장이야. 한빛도장이라고 하지.”
“…….”
궁금증이 풀리긴 했지만 정작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하는 정현의 눈빛을 읽었는지, 살짝 한숨을 내쉰 아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저녁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솔직히 말해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난 불만이었고 반대를 했지. 얼굴도 본 적 없는 동갑내기 남자애와 한집에서 최소 3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었거든.”
정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름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영진과 미숙이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강압적으로 일을 밀어붙인 건 처음이야.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합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현은 아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사과부터 했다.
그러자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아름은 ‘쳇’ 하고 혀를 한 번 차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흠, 아무튼 상당히 의외네.”
“……?”
“체격도 좋고 인상도 차가운 느낌이어서 한 성질 할 줄 알았는데, 쉽게 넘어오질 않아.”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름은 이내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정현에게 말했다.
“일단 한판 붙어서 기를 꺾어 주려고 했거든.”
“…….”
황당한 발언이었다.
얼핏 겉모습만 봐도 정현은 180㎝나 되는 당당한 체격에 얇은 옷 내부로 비치는 근육들도 잘 단련된 느낌이었다.
반면, 아름은 팔다리가 길게 쭉 뻗은데다 제법 근육의 양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160대 후반의 신장에 커다란 눈망울이 귀여운 소녀가 어딜 봐서 위협적인가.
“왜? 내가 못할 것 같아?”
“…….”
도발적인 말을 하며 빤히 정현의 눈을 바라보는 아름의 태도는 적극적이다 못해 저돌적이기까지 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상황에 정현은 살짝 당황하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작정을 했군.’
갑작스럽게 말을 놓는 행동이나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투 등은 모두 의도적인 것이라 판단되었다.
그렇기에 정현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한 눈빛으로 아름을 응시했다.
“뭐, 뭐야? 왜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
무반응에 가까운 정현을 보며 사실은 아름도 당황하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을 말하자면 일부러 티격태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정현을 때려눕힐 작정이었다.
처음부터 기를 꺾어 놓아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아름도 크게 야박한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정현의 사정을 알고 난 뒤 쫓아내려는 생각은 접었다.
다만, 기존의 생활을 최대한 보장받기 위해서 본인이 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현을 변화시키려 한 것이 문제였다.
“…….”
“…….”
야심한 시간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아름은 일이 의도대로 풀려가지 않자 입을 다문 것이고, 정현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결국 먼저 결정을 내린 것은 아름이었다.
“흐으…… 아, 모르겠다. 일단 한판 붙자.”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윽! 그, 그건…….”
아름도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쪽팔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처음 알게 된 동갑내기 남자애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유추해 본다면 당장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질 것이다.
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을 답답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정현을 확실하게 제압해야만 집에서라도 마음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러한 생각에 아름은 재차 결심을 하고서는 자세를 잡았다.
“몰라. 난 공격할 거야. 막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
아름은 자신감이 넘쳤다.
벌써 10년을 넘게 배워 온 무술이었다.
그것도 태권도나 유도처럼 경기에 써먹기 위해서 배워온 것이 아닌, 실전 무술에 가까운 가전(家傳)의 것이었다.
그 효과와 위력은 여태껏 수많은 남자들을 꺾음으로써 입증된 상태였다.
“후우…….”
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상상도 못한 상황이었다.
얼굴은 예쁘장하고 눈동자도 큼지막한 것이, 귀염성이 넘치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비록 의도한 것이겠지만 하나같이 도전적이고 저돌적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공격하겠다는 선언까지 해 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런 복잡한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리한 시선으로 정현을 주시하고 있던 아름이 순간적으로 앞발을 내딛으며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터엉!
재빠르게 찔러 오는 아름의 정권을 왼손을 바깥쪽으로 휘두르는 모양새로 가볍게 튕겨 내는 정현이었다.
“……!”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 너무도 손쉽게 무위로 돌아가자 아름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잠시 뒤 차라리 잘되었다고 느낀 것인지, 살짝 미소마저 지은 채로 다시 한 번 공격을 시작했다.
쒜에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주먹이 바람을 갈랐다.
전문적으로 격투기를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른 주먹이었다.
하지만 정현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가슴인가? 아니, 아래로군.’
오른쪽 가슴 앞까지 쏘아져 오던 주먹이 멈칫 하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아름의 오른발이 채찍처럼 휘둘러지며 정현의 왼다리 안쪽을 걷어차 왔다.
주의를 위로 돌리면서 아래를 치고 들어오는 멋진 공격이었다.
‘좋은 센스다. 하지만…….’
휘익!
“……!”
정현이 왼발을 살짝 들어 올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르는 아름의 공격이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정현은 두 걸음 정도 더 물러나서 거리를 벌렸다.
“이제 그만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
정현에게 이러한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름이 어릴 적부터 최고의 놀이로 무술을 선택했다면, 정현에게는 무술이 삶 자체였다.
게다가 보통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강력한 ‘힘’까지 가지고 있으니, 신체적인 무력을 따진다면 아름에게 주어진 승률은 한 없이 0%에 가까울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승부가 난 것처럼 구는 거야?”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정현의 태도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아름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 점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정현이었지만 이미 잔뜩 기분이 상한 아름은 듣지 않고 재차 달려들었다.
휘익!
주먹이 얼굴의 왼편을 스쳤다.
길게 뻗은 옆차기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오른쪽 옆구리를 훑었다.
얼핏 보면 수세에 몰린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정현이 의도한 대로였다.
최고의 방어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면서 곧바로 반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필요 이상의 회피는 적에게 계속된 공격의 기회를 주는 셈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하지만 완벽하게 피해 봐야 무엇을 하겠는가. 상대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정현으로서는 함부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난감하군.’
정현은 성난 망아지와 같은 아름을 보며 마음속으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영진의 집에서 살게 된 첫날부터 이러한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말로 설득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정현은 아직 아름을 잘 몰랐다.
그렇기에 그녀가 앞으로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기선제압을 하려 한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그러한 관계가 정작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아, 하아…….”
3분쯤 지났을까.
정현에게는 찰나에 불과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름에게는 결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격투를 하면서 완력이나 스피드, 순발력 등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체력이다.
그렇기에 매일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며 체력을 단련한 그녀였지만, 난공불락의 성을 연상케 만드는 정현의 방어와 회피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고 그만큼 지쳐 갔다.
실제의 체력보다 정신적인 피로와 압박감이 아름을 기진맥진하게 만든 것이다.
‘이럴 수가…….’
아름은 정말 놀랐다.
쩍 벌어진 입을 다시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