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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 1권(7화)
2. 인연(5)


‘내가 이렇게 밀려 본 적이 있었나?’
아름은 아련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겼다.
첫 싸움의 상대는 초등학교 때 치마를 들춰 올리며 장난을 치던 동급생이었다.
워낙 덩치가 크고 반에서 대장처럼 행세하던 녀석이라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먹만 쓸 줄 아는 녀석과 다르게 아름에게는 체계적으로 배운 발차기가 있었고 방어도 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승리할 수 있었고, 아름은 그날 이후로 반 여자아이들의 자랑이자 구심점이 되었다.
영웅심리라고 해야 할까?
달라진 친구들의 대접에 기분이 좋아진 아름은 좀 더 본격적으로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건강을 위한 목적으로 시켰던 영진이 당황할 정도로 아름은 열심히 무술을 배웠고, 나름의 재능도 있었다.
친구를 괴롭히던 동급생과의 싸움, 길을 가다가 반 친구들에게서 돈을 뺏으려던 불량배와의 싸움, 기합을 주며 기강을 잡는다고 설쳐 대던 상급생과의 싸움까지……. 수도 없는 사건과 사고가 있었지만 아름은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어려운 상대는 있었지만 이렇게 막막한 것은 처음이야.’
아름은 진지한 눈빛으로 정현을 살폈다.
180㎝의 건장한 신장과 그에 어울리는 단단한 몸이었다.
정현이 어쩌다 한 번씩 회피가 아니라 방어를 택했을 때 부딪쳤던 팔뚝과 손등에서는 암석과 같은 딱딱함을 느꼈다.
게다가 반격조차 하지 않고 계속해서 방어만 했다는 것은 둘 사이에 상당한 수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였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러한 감상이 말로 튀어나왔다.
아름은 적극적인 성격만큼이나 솔직했다.
지금까지 만나 본 동년배나 비슷한 또래들 중에서 정현만큼이나 대단한 실력자를 본 적이 없었다.
무심결에 흘러나온 칭찬이었지만,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질 수 없어.’
아름은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했던 1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더불어서 중학교 2학년 때 느낀 아픔과 시련도 동시에 함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자 물 먹은 솜처럼 늘어졌던 몸에 힘이 들어가고 없던 의지가 다시 한 번 솟구쳤다.
‘음?’
그러한 기세가 겉으로도 표출되었는지, 정현의 눈빛도 살짝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풀에 지쳐서 포기할 것 같던 아름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은 섬뜩함이 눈을 통해 느껴졌다.
‘그리고 이건…….’
우웅!
분명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정현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름의 몸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잔잔한 공명음(共鳴音)!
그 순간, 정현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하앗!”
쒜에엑!
지금까지의 공격과는 수준이 달랐다.
먹잇감을 노리는 매가 지상으로 활강하듯, 날카롭고 정확한 공격이 정현의 복부를 노려 왔다.
휘리릭!
“……!”
아름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비장의 공격을 가했지만 어느 순간 상대방의 몸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퍼억!
“아……!”
그리고 뒷목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충격과 함께 아름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털썩!
“…….”
아름이 인지할 수 있는 속도 이상으로 움직여 등 뒤로 돌아간 정현은 그녀가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었음을 확인하고 수도(手刀)를 거두었다.
‘아버지, 이것도 의도하신 일입니까?’
정현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아름의 몸 내부에서 울리는 장중한 공명음.
그것은 아름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기(氣)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아무리 초보적인 단계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판단해야 고민하던 정현은 문뜩 자신의 진지한 대응으로 인해 초면인 아름이 기절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
계속되는 사건, 사고에 머리가 아파 오는 정현이었다.


3. 천심법(天心法)(1)


짹짹, 짹짹짹!
소란스러운 새소리가 아침을 반겼다.
동시에 이른 시간의 찬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며 타의에 의해서 숙면을 취하고 있던 한 사람을 깨어나게 만들었다.
“음? 으음…….”
목이 뻐근하다.
한 군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는 허리를 비롯하여 팔다리의 이곳저곳을 저리게 만들었다.
“아으, 뭐야?”
이불이 가려 주지 못하는 얼굴 주위를 스치는 찬바람에 아름은 약간 쉰 목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약간 흐릿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음?”
멀뚱멀뚱한 시선이 의아하다는 감정을 대신 표출해 주었다.
분명 아름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소녀풍의 핑크빛 벽지로 가득해야 할 자신의 방이 아닌, 딱딱한 나무 재질의 마룻바닥과 약간은 황량하게 느껴지는 넓은 공간.
이곳은 바로 도장이 아니던가.
“뭐야, 내 방이…….”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다.
아름은 황당해하다가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몸을 움찔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서서히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기억들이 영사기 앞을 스치는 필름처럼 떠올랐다.
부들부들.
그러고는 병에 걸린 사람마냥 몸을 떨었다.
마지막 순간에 기억이 끊겨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기절을 했고 그런 그녀를 이곳에 버려 둔 것이 정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베개와 이불 등을 챙겨 준 소소한 친절 같은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아름은 즉시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서 계단을 쿵쾅쿵쾅 뛰어 올라갔다.
벌컥!
“야, 최정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에 예의 같은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반말로 정현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방 안으로 들어선 아름.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
“…….”
이제 막 바지를 입고 있는 정현을 보며 아름의 움직임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무심결에 시선이 위로 향하자 신이 직접 빚은 것처럼 아름다운 형태와 선을 갖춘 상체가 보였다.
‘꿀꺽!’
너무도 의외의 상황에 마른침을 삼킨 아름은 그제야 정현과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잠시 나가 주…….”
“아, 알았어, 알았다고!”
쾅!
부끄러움에 당장에라도 날아갈 듯이 자리를 피한 아름이었다.
“…….”
정현은 작은 한숨과 함께 옷을 마저 입었다.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하루.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이었다.

***

바람의 장(章).

천심법의 가장 기본적인 공부는 바로 바람이다.
과거 고대의 사람들은 오행(五行)이라 하여 우주 만물을 이루는 근원을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가지 원소라 여겼다.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자연의 중요함과 위대함은 널리 알려진 것이었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제천문의 인원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어찌 세상을 다섯 가지 요소로만 정의할 수 있겠는가.
무더운 한여름을 날려 버리는 강력한 태풍(颱風)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기운을 품고 있다.
현대의 사람들이 아무리 대비를 하고 피해를 줄이려고 애쓰지만 매년 닥쳐오는 재앙은 어쩔 수 없다.
폭우를 동반한 무시무시한 천둥과 벼락은 어떠한가.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거목(巨木)도 그대로 불태워 쓰러뜨릴 정도다.
게다가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자연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지만 이제는 주체가 되어 버린 수많은 생명들. 인간을 포함한 그 많은 존재들이 현대의 세상을 구성하고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천심법(天心法)!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고 하나가 되는 공부다.
그중 바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고 늘 함께하기에 앞으로 밟아 나갈 첫 번째 단계로 이보다 적합한 것은 없으리라.

“후우…….”
정현은 현재 산의 중턱에 올라 있었다.
사람들이 찾기 힘든, 깊숙하고 길이 없는 곳을 발견한 정현은 일주일째 이곳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도심은 기운이 너무 혼탁해서 수련을 할 수가 없으니, 주위의 산을 찾는 수밖에…….’
천심법은 여태껏 정현이 배워 왔던 어떠한 공부보다 난해하고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상위이고 광대하며 포괄적이어서 어떠한 기운도 포용할 수 있는 법(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연의 기운이 혼탁해져 있는 현재의 시대를 살아가며 힘을 모으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배운 기초심공의 기운도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몰라도 자연의 기운은 정말 시간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 있어서 천심법은 자연의 기운이 혼탁해져 있는 시대에서 놀라울 정도의 효율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도를 가지고 있었다.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장(章).

수생목(水生木).
물을 바탕으로 해서 생명이 약동하는 것으로, 물로 인해 풀이나 나무가 자라는 이치다.

목생화(木生火).
생명이 자라면 열이 발생한다는 것으로, 나무를 태우면 불이 생기고 생명 활동을 하면 열이 발생하는 이치다.

화생토(火生土).
열이 발생하면 그 뒤에 남는 열매가 있다는 뜻으로, 초목이 자라 열매를 맺거나 나무가 타면 재가 남고 생명 작용이 끝나면 골육만 남는 이치다.

토생금(土生金).
땅속의 흙이 단단하게 응고되면 금속이 된다는 것으로, 열매는 그 안에 생명의 물을 간직하기 위해 더욱 단단해지고 생명이 끝난 것들은 썩고 엉겨 단단한 금속이 된다는 이치다.

금생수(金生水).
단단한 쇠가 부드러운 물을 생한다는 말로, 열매가 맺히면 물이 생기고 응고된 것이 풀리면 액체가 된다.
또한 단단하고 차가운 바위나 쇠에 물방울이 엉기게 되는 이치다.

널리 알려진 오행의 상생 원리.
천심법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수(水)의 기운을 양분으로 목(木)의 기운을 키운다.
목(木)의 기운을 이용하여 화(火)의 기운을 활활 태운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기운을 배울 때마다 각자의 기운들이 서로 상생하며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되는 방법이었다.
‘다만 무척이나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지.’
대가 없는 달콤한 열매는 없는 법이다.
천심법은 자연의 기운을 모으는 데 상상을 초월하는 효율을 지니고 있지만 각 기운들 간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된다면 그 반작용은 정말 끔찍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화(火)의 기운이 혼자 과도하게 커진다면 목(木)의 기운을 모조리 잡아먹는 것은 물론이고, 오행을 역행하여 수(水)의 기운마저도 모두 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바람의 기운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고.’
바람의 기운은 포괄적이고 다른 것들을 포용할 수 있다.
활활 불어와서 화(火)의 기운을 북돋기도 하고 꽃가루를 널리 퍼뜨리며 목(木)의 기운이 울창하게 성장하는 것을 돕기도 한다.
그렇기에 바람의 기운을 가장 먼저 강하게 키워서 다른 기운이 폭주하면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고정쇠로 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