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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 1권
점핑1권(1화)
프롤로그
“끙차! 이게 마지막입니다.”
“고생했어.”
3.5톤 트럭 가득 실린 박스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다. 온몸에 흐르는 땀. 텁텁한 여름의 바람이지만 지금은 제법 시원하게 느껴진다.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몇 번 뽑아 마신 후, 책상에 앉아 오늘 한 일에 대해 간단히 업무 일지를 작성한다.
팔 힘을 너무 많이 썼는지 손이 덜덜 떨려 키보드를 치는데 느낌이 묘하다.
업무 일지를 작성하고 사무실의 시계를 보니 6시 30분.
“정아 씨, 오늘 사장님은 안 들어오세요?”
“네. 일 끝나시면 퇴근하라고 하셨어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고생했어요…….”
흡사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요?’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정아 씨. 하지만 못 본 척 사무실을 나섰다.
내 나이 21세. 내세울 것이곤 쥐뿔도 없지만 아직 청춘을 포기하고픈 생각은 없다. 조금만 더 말랐다면 아님, 조금만 더 예뻤다면이란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곧 머리를 흔들어 그 상상을 털어낸다.
상상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정아 씨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퀴퀴한 땀 냄새가 올라온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지만 버스 안에 여고생들이 가득한 것을 보곤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걸어가면 대략 20분쯤 걸리겠지만 차마 여학생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날 피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하루 종일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여전하지만 힘든 하루가 끝났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응? 문이 열렸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물상은 내가 자주 들르는 곳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취직한 곳이 내가 현재 다니는 공장. 일 년간 공장 한편에 마련된 숙소에서 지냈다.
2명의 외국인 노동자와 나, 그리고 한씨 아저씨가 한 방을 썼는데 정말이 버티기 힘들었다. 특히 한씨 아저씨의 발 냄새는 정말이지 상상하기도 싫다.
일 년간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작은 옥탑 방에 전세를 얻어 나온 것이 작년이었다. 여름엔 비가 조금 새고 겨울엔 무지 춥다는 걸 제외하면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집이 생기자 취미도 생겼는데 바로 책읽기.
책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고물상에 들러 대여점에 없는 예전 책들을 사서 보는 것도 좋았다.
“금이 왔냐?”
“아저씨, 안녕하세요.”
금속에 붙은 플라스틱을 칼로 떼던 주인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한다.
“금이가 오늘 운이 좋네. 헌책방에서 오기 전이라 꽤 많을 거다.”
“그래요?”
난 기쁜 마음에 책을 모아두는 곳으로 향했다.
고물상에 들어온 책은 모두 폐지로 가지 않는다. 나 같은 이들도 많았고, 특히 헌책방에서는 쓸 만하다는 것들은 싹쓸이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다.
‘오옷! 읽지 않은 판타지 소설이 완결까지 있다니.’
난 차곡차곡 마음에 드는 책들을 뽑기 시작했다. 쓸 만해 보이는 책들이 많아서인지 손놀림이 바빠진다.
“다 골랐냐?”
“예. 오늘은 완전 득템인데요.”
고른 책을 노끈으로 묶고 있는데 아저씨도 일이 끝났는지 내 옆쪽으로 와 담배를 태우신다.
“얼마예요?”
오늘 고른 책은 노끈으로 두 묶음. 높이로 치자면 대략 1m에 가까웠다.
“7,000원. 잠깐만.”
역시 저렴하다. 한 달간 읽을거리 염려는 없을 것 같다.
“이거 가져다 봐라.”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어갔다 온 아저씨는 검은 비닐봉지에 건넨다.
받아 안을 살짝 보니 성인잡지다.
“어, 아저씨. 이거 아끼시는 거잖아요?”
“오늘 몇 권 들어왔더라. 그건 이제 지겹다.”
“헤헤! 감사합니다. 잘 볼게요.”
“웃기는. 내일 일하는데 방해되지 않길 바라마. 킬킬킬!”
몇 분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눈 후, 계산을 하고 양손에 책을 들고 힘든 줄도 모르고 집으로 왔다.
문을 열자 바깥보다 더 더운 열기가 확 밀려 나온다. 벽돌로 문을 고이고 책은 한쪽에 던져 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나와 책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은 중고로 산 TV와 오전에 개지 않은 이불, 그리고 주워온 책꽂이들을 가득 채운 책들이 눈에 띈다.
모기장을 치고 TV를 켠 후, 오늘 득템한 책들을 살펴본다.
“쳇! 이건 뭐야?”
급하게 고르다 보니 딸려온 책인가 보다. 흡사 여성잡지를 사면 끼워주는 부록처럼 얇은 낡은 책자가 다른 책에 붙어 있었다.
찌직!
붙어 있던 책이 떨어지는 소리.
낡은 책이라기 보다는 노트에 가까운 책. 희미하게나마 괴발개발 쓴 제목이 보인다.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 방법.
“하하하하!”
빵 터졌다. 제목만으로도 사람을 웃기는 책이 있을 줄이야.
호기심에 웃음을 띤 채 책장을 넘긴다.
……유체 이탈은 가장 편안한 자세에서 정신을 백회 부근에 집중해야 한다. 이때, 백회에 집중된 정신을 눈과 눈 사이의 중심점에서 앞으로 약 30센티 앞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실제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그때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일단, 몸에 일체의 힘을 주지 않아야 하고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중략)…….
유체 이탈을 한 다음 정신 이동을 하고 싶은 상대를 바라보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 상대방의 머리끝에 집중하고 나아간다는 생각을 지속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다음 장에 언급된 주문이다. 주문을 외우며…….
참, 어이없는 책이다. 작가 지망생이 끼적거린 노트인가?
주문을 한 번 중얼거려 본다.
“세그라이노 아진카이블로 사이진도 우르지보이노…….”
……영혼은 원래의 육체로 돌아가려는 힘이 있다. 돌아가는 걸 거부할 땐 영혼에 크나큰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뒷장은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을 할 때 응용법들과 사용상의 주의할 점을 적어두었으니 꼭 숙지하기 바란다.
여기까지다. 더 이상 뒤를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책은 한쪽으로 치워두고 득템한 판타지 소설을 집었다.
“낼 뵙겠습니다.”
“몸이 안 좋은 거 같은데 푹 쉬어.”
초저녁에 잡은 판타지 소설이 볼 만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더니 몸이 무겁다. 빨리 들어가 딴짓 말고 잠이나 자야겠다.
버스는 역시 포기. 택시를 탈까 싶어 빈 택시를 기다린다.
‘어라, 저 꼬맹이…….’
건너편에 아기 엄마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꼬맹이가 도로 아래로 내려온다.
“아줌마! 애기 위험해요!”
고함을 질렀지만 다른 아줌마와 수다를 떠느라 듣지 못한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
“젠장! 아줌마! 애기!”
판타지에 보면 이러다가 죽는 놈들도 많던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향에 있는 동생들이 눈에 밟혀 무작정 몸을 날렸다.
끼이이이이이익!
브레이크 소리.
“꺄아아악!”
아기를 밀었다. 뒤이어 엄청난 충격과 함께 몸이 날아오른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의 화면처럼 세상이 느려진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다. 비명을 지르는 아기 엄마는 짜증스럽기만 하다.
“……씨발.”
눈앞에 먼지 낀 회색 아스팔트가 다가온다.
까득!
순간적으로 뭔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아픔이 일어났지만 어둠이 날 먼저 집어삼킨다.
1. 정신 이동(1)
정신을 차렸다. 어둡다.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떠지지 않는다.
어느 판타지 소설에 나온 것처럼 혹시 아기가 된 건가?
아니다. 따뜻한 느낌도 심장의 울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죽은 건가? 그것도 아닌 듯싶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확실히 들린다.
누군가가 숨 쉬는 소리, 기계의 우웅거리는 소리, 삐익거리는 소리 등등.
‘병원인가?’
대략적으로 짐작해 보면 병원 같다.
죽은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갑자기 병원비가 걱정이었다. 딱히 보험을 들어둔 것도 없었고, 퇴근하다가 다친 것이라 산재도 되지 않을 것이니까.
혹, 그 아이의 부모가 대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도 약간은 든다.
드르륵!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들리는 문소리.
다시 눈을 뜨려고 해 본다. 안 된다. 몸을 움직이려 해 봐도 역시나 마찬가지.
움직이지 않는 무선 장난감이라 해야 할까? 아무리 뭔가를 하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많이 다쳐서 그런 건가? 시간이 지나면 좀 낫겠지.’
편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큰 트럭과의 교통사고라면 밑에 깔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병실을 조용히 걷는 이는 간호사 같다. 조용히 한 바퀴 도는 느낌이 들더니 잠시 후 문을 열고 다시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좋아져 눈을 뜨게 된다면 방금 그 간호사를 한 번 보고 싶어졌다. 내 옆을 지날 때 느껴지는 그 향기라니.
‘히히히!’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간호사와 환자의 뜨거운 사랑!
고물상 아저씨가 주신 책에서 나온 짧은 치마의 간호사가 마치 날 유혹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이렇게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하루에 몇 번.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제외하곤 여긴 특별히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지긋지긋한 어둠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다.
‘씨발! 난 살아 있다고! 당장 날 일으켜 줘! 내 목소리 안 들려? 난 지금 깨어 있다고…….’
‘제발 한마디라도 해줘! 난 변화가 필요해. 당장 어떤 말이라도 하란 말이야! 제발…… 제발…….’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갈수록 난 미쳐 가고 있다. 차라리 죽었으면 이러한 고통도 이러한 외로움도 없었을 텐데.
‘난 지금 살아 있단 말이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원망했고, 날 이렇게 만든 아줌마의 부주의에 저주를 퍼부었고, 날 친 운전사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내 상태에 대해서도 짐작이지만 알 수 있었다. 전신 마비에 혼수상태.
코마(Koma, Coma, 昏睡)에 관련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정신은 깨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다룬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은 10년이 넘는 혼수상태에서 결국 깨어났다.
하지만, 난 그 영화를 기억해 내며 희망을 가졌다기보다는 더 심한 좌절을 느껴야 했다. 10년간의 어둠이라니…….
혀를 깨물 수 있는 힘만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자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노는 법을 알아냈다.
어둠에 내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방에 틀어도 나오지 않는 TV를 만들어냈고, 책장을 만들어냈다.
‘그 뒤 얘기가 어떻게 되었더라?’
지금은 책을 만들고 있다. 내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기억하고 그것을 작성해 책장에 하나둘씩 꽂고 있는 중이다.
‘아!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절벽으로 밀어 떨어졌었지. 그러면서 새로운 단락으로 넘어갔었어.’
마치 엄청난 발견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이건 하나의 놀이이다. 이 지겹고 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웃기는 건 기억하려는 책들의 토씨 하나까지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간혹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게 오히려 기뻤다.
생각하느라 시간을 죽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책들. 조금 읽은 건 읽은 만큼 쓴 후 책장에 꽂았다.
시간은 그렇게 계속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