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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1권(2화)
1. 정신 이동(2)
새로운 신입인가 보다. 걷는 소리와 향기만 맡아봐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여자 간호사다!
내가 유일하게 머릿속 나만의 방에서 외부로 신경을 돌릴 때는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다.
특히 여자 간호사가 들어올 때다. 물론, 남자 간호사라면 바로 신경을 껐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귀를 쫑긋 세우고 간호사의 움직임을 체크한다. 특별한 상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기에 하는 것뿐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내 옆에서 뭔가를 할 때도 있었는데 숨소리를 느낄 만큼 가까이에서 뭔가에 열중하는 간호사. 처음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 그놈이 말을 뱉으면서 상상력은 사라졌다.
“젠장! 이 짓도 못할 짓이라니까. 때는 왜 이리 많아!”
나야말로 젠장이다.
간호사는 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생각 못하고 있었다니.
또한, 간혹, 아주 간혹 ‘삐이∼’ 소리와 함께 몇 명의 간호사들이 와 침대를 끌고 가는 소리를 듣는다. 별말이 들리지 않았지만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난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아이 엄마에게도 운전사에게도 더 이상 어떤 원한도 없다. 단지 이 기나긴 시간이 멈추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탁!
문 닫히는 소리.
다시 나만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다. 어둠에 방이 나타난다. 책꽂이에는 이미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을 정도로 책이 빽빽하다. 그것도 모자라 방 구석구석에 수많은 책들이 쌓여 있다.
난 저 많은 책을 머릿속 공간에서 다시 기억해 내고 적은 것이다. 집에 있던 책뿐 아니라 대여점에서 빌려본 책들까지 모조리 기억해 만든 것이다.
언제 태워 버리고 다시 작성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음습한다.
‘오늘은 무슨 책을 만들까?’
사고 일어나기 전날에 읽은 판타지 소설도 어제부로 완료되었다. 딱히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진즉에 책 좀 많이 읽어 둘 걸 그랬다.
‘아!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 방법!’
문득 떠오른 그 웃긴 책. 난 자리에 앉아 책을 만들고 그 책 표지에 제목을 적었다. 그리고 책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일단, 몸에 일체의 힘을 주지 않아야 하고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
자, 잠깐!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
책을 만든다고 정작 중요한 걸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이라면 난 어쩌면 어둠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자유로운 몸을 가질 수 있을지도.
한 줄기 빛,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후∼∼ 후∼∼’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표현이 이상하지만 눈을 감았다.
익숙한 어둠.
‘정신을 백회에 두고 눈과 눈 사이의 가운데 30cm 정도로 나아간다. ……나아간다. ……나아간다.’
쉽지 않다. 물론, 그래도 상관없다. 나에겐 남는 게 시간이니까.
얼마나 누워서 중얼거리는 걸까? 어차피 몸은 움직이지도 못하니 조건은 만족한 상태. 집중력의 차이라 생각하고 오로지 ‘나아간다’를 중얼거리며 집중했다.
어느 순간 말도 잊고 내가 무얼 하는지도 잊었을 때 몸이 밖으로 나가감을 느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성공이다!’
내가 만일 움직일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었을 때보다 더 미친 듯이 날뛰었을 것이다.
형광등은 꺼져 있어 어두웠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태양빛으로 실내를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넓은 방. 그곳에 놓인 침대 위에는 혼수상태의 환자들이 있었다. 대략 훑어봐도 30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누워 있다.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다.
환자들은 뼈골이 상접한 모습에 링거를 꽂고 있었고 두발은 짧게 잘려 있고 수염도 거칠게 나 있다.
살짝 뒤돌면 내가 보일 텐데 고개 돌리기가 살짝 겁난다.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샌 후 누워 있는 날 본다.
바짝 마른 얼굴과 몸. 거친 수염. 짧게 잘린 머리카락. 내가 보기에 난 죽어 있었다.
다만 가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영체에 불과한 지금의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상관없다. 슬픔만 표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영체인 난 그렇게 과거의 모습이라곤 없는 날 보고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어느새 해가 졌는지 어두워진 병실. 하지만 각 침대에 붙어 있는 각종 장치들이 내뿜는 빛만으로도 안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영체는 어둠과는 상관없을라나.’
소원하던 어둠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다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참에 한 번 돌아다녀 볼까 싶다.
하지만 곧 그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영체라고 해도 몸에서 1m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영화에서 보던 어떤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건가?
최대한 내 몸과 떨어져 몸과 영체가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있다!’
가느다란 투명의 실.
이걸 끊으면 죽을 수 있는 건가? 끊어볼까?
하지만 그 투명 실은 내가 잡을 수가 없었다.
드르륵!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간호사님. 난 그녀들을 볼 수 없었기에 상상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그려봤었다.
온화한 미소를 살짝 띠고 생글거리는 눈으로 환자를 바라보는 그녀들은 하얀 간호사복장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오 마이 갓!
난 결코 여자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말문이 막히는 수준이다.
먹이를 노리는 곰의 모습이 저럴까? 입고 있는 간호사복이 4칸 창문의 커튼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종아리가 예전 내 허리보다 굵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침대와 침대를 누비는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난 상상 속의 그녀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환자를 꼼꼼히 살피며 연신 손에 든 무언가를 터치하는 그녀. 간호사로서 일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그렇다. 일하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일하지 않을 때는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탁!
모든 일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나간다. 비로소 막혀 있던 숨이 트이는 것 같다.
응? 근데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아! 정신 이동!’
…….
부르르 떨리는 영체. 방금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간혹 잊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정신 이동을 할 사람을 정했다. 방을 드나드는 6명의 간호사 중에 한 명. 원래는 남자 간호사가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언제 올지 모르니 기다릴 수밖에.
“정말이지 이 짓은 못할 짓이야. 신참 똑바로 잡아.”
“예! 정 간호사님.”
환자들 몸을 닦아주고 등창이 생기지 않도록 환자를 돌보는 두 명의 남자 간호사들이 왔지만 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왜냐고? 난 분명 정신 이동할 사람을 정했다고 했다. 결코 그 여자 간호사가 내가 상상 속에서 만든 그녀만큼 아름다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
그래 인정한다. 오전 타임에 들르는 그녀는 정말이 아름다웠다. 정신 집중이 엄청 잘된다고 할까? 물론, 정신 이동은 실패했다. 그녀의 머리끝이 아니라 가슴 끝에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반드시 그녀에게로 정신 이동을 할 것이다.
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을 때처럼 의지에 불타올랐다.
‘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 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벌써 5일째 실패.
첫날에 가슴에, 둘째 날도 가슴에, 셋째 날도 가슴에, 넷째 날엔 늘씬한 다리에, 다섯째 날에는 잘록한 허리에 정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집중을 쏟았다.
그리고 입으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세그라이노 아진카이블로 사이진도 우르지보이노…….’
이번에는 느낌이 좋다. 집중도 잘되고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있는 것 같다. 이 느낌이 조금만 더 지속된다면…….
탁!
이런 썅! 환자를 보러 왔으면 좀 진득이 보고 갈 것이지. 뭐가 급하다고 그리 빨리 가느냔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연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옮길 곳은 많다.
약간의 불안함이 생겼지만 어차피 그 책을 다 읽지 않았기에 한 가지씩 알아가야 했다.
정신 이동을 했는데 고작 10분 정도만 움직일 수 있다면 정말 곤란하기 때문이다.
일단, 적당한 사람을 골랐다. 좀 건강하게 보이고 금방 죽을 것 같지 않은 인물. 혹 옮겨갔는데 바로 심장이 멈춰 버리면 큰일 아닌가?
‘휴∼ 여기서 고른다는 자체가 잘못이군.’
쭈욱 훑어보다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그냥 가장 근처에 있는 인물을 찾았다.
‘이종진. 나이 45세.’
밑에 적힌 영어는 못 알아보겠다. 하지만 가장 적합해 보이는 인물이었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주문을 중얼거렸다.
이종진의 백회와 주문에 집중했다.
유체 이탈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동안 놀고만 있지 않았다. 유체 이탈 과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했기에 이제는 유체 이탈은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연습해 본 결과 유체 이탈하고 몸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시간까지 합치면 대략 5분 정도.
유체 이탈한 육체로 들어가는 건 의외로 쉬웠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물에 잠기는 듯한 느낌이 들며 원래의 어둠 속 내 방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내가 뭘 하는지 망각하는 상태로 들어간다.
그리고 몸이 앞으로 쑤욱 나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아! 이동했다!’
이종진의 머리맡에 와 있는 날 발견했다.
내 육체는 괜찮은 건가?
돌아보니 내 침대에 있는 생명 유지 장치는 멀쩡히 잘 작동하고 있다.
난 이종진의 몸에 눕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 기분 나쁜 이질감.
내 몸에 들어갈 때완 다른 느낌이다. 흡사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달까?
가만히 누워 있자 차츰 이질감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종진의 정신세계라 할 수 있는 어둠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나와는 좀 다른 어둠의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은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본다.
이 사람 역시 코마 상태이니 움직일 수 없는 건가?
‘눈을 떠보자.’
엇! 나 때와는 다르다.
내가 아예 작동하지 않는 무선 자동차라면 이 몸은 건전지가 떨어진 무선 자동차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난 힘을 줬다.
영체 주제에 두 손을 잡고 노력해 본다.
‘잠깐, 영체가 힘을 준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있을까? 생각? 상상? 의지?!’
그래! 내가 여기에 올 때 강렬히 원했던 것처럼.
난 의지를 더했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태양보다도 밝은 빛이 눈으로 들어온다.
‘윽!’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약한 불빛이라고 해도 지금 이 몸에는 너무 강렬했던 것이다.
몇 번의 깜박거림 뒤에 빛에 익숙해졌다. 눈동자를 굴려 실내를 살펴본다.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다니…….
영체로 보나 똑같은 방이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그렇다고 내 몸도 아닌데 이 몸을 가진 채 울 생각은 없다.
이번엔 목을 움직여 보고자 노력했다.
눈을 움직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이 든다.
‘헉! 헉!’
영체가 힘들어 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기운이 빠진 것처럼 힘이 없다.
‘의지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 순간 몸을 무언가가 당기는 느낌이 든다.
거부하려는데 영혼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경고가 번뜩 떠오른다.
결국 힘을 빼고 당기는 힘에 순응을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머리맡으로 돌아온다. 빨리 몸으로 들어가라고 어떤 힘이 말하는 듯하다.
드르륵!
“무슨 일이지?”
헉! 저 곰이 왜 이 시간에?
그녀가 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종진이 있는 곳. 생명 유지 장치를 보고야 알 수 있었다.
이종진의 심장박동수가 엄청 높아져 있었다.
내가 무리하게 움직이려고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응? 눈을 뜨고 계시네? 혹시 깨어나시려는 걸까?”
잠시 뭔가를 체크하더니 머리맡에 놓인 호출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는 그녀.
난 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신 이동 후에 상대방이 어떤 결과를 가지게 될지 궁금해 억지로 참아본다.
“그냥 일시적인 건가? 좀 주의해서 봐야겠다.”
그녀는 손에 든 기계에 뭔가를 체크한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치마를 올리더니 속옷을 매만진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속옷도 제대로 못 입었네.”
윽! 치명타다. 여자가 칠칠치 못하게!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 위에 누웠다. 그리고 일체화되어 간다.
“어머, 오늘 이상하네. 이 환자는 왜 코피를…….”
암흑으로 들어가며 쏟아지는 잠.
코피라니 아무래도 무리했나 보다.
“훗! 제 속옷을 보신 거예요? 저 이래 봬도 눈이 높답니다.”
…….
컥! 이 곰이 어따 대고…….
그녀의 마지막 공격에 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