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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1권(3화)
1. 정신 이동(3)
날짜 관념이 없는 난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난 깬 후 다시 한 번 이종진의 몸으로 들어갔다.
24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때 내가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었다.
내가 만일 움직이는 사람의 몸을 차지하게 되었을 땐 분명 의지를 사용해야 할 터. 그럼 시간이 훨씬 줄어들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난 바로 간호사에게 정신 이동을 하지 않았다.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번에 타겟으로 삼은 사람은 병실에 있는 여자 환자 중 한 명이었다.
혹 성별에 따른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거리도 다소 떨어져 있어 거리 문제도 생각할 겸 해서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백회 부분을 봤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미 두 번의 정신 이동을 해서일까?
수월하게 그녀에게로 쑥 다가가는 게 느껴진다.
바로 그녀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누웠다.
역시 이질감이 있다.
이종진에게 들어갔을 때보다 좀 더 심한 건 역시 성별 때문일까?
난 이번에도 어둠의 정신세계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하나의 방이었다.
공포의 방이 이럴까? 괴기스러움과 오싹함이 느껴진다.
내 방보다 훨씬 넓고 화려한 방에 새하얀 침대가 놓여 있고, 온 벽에는 한 남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멀쩡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눈이 도려내진 것도 있었고 칼이 박힌 것도, 피눈물을 흘리는 사진도 있었다.
사진 하나하나에 원한이 스미어 있음이 느껴진다.
‘이 여자 도대체 누구야?’
의문을 가진 순간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
영화에서 필름을 빨리 돌려 한 사람의 일생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으으윽!’
곽지안. 29세.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일찍이 양친을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고 의사 남편과 결혼했다.
하지만, 곽지안의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오로지 돈을 보고 한 결혼. 결혼 전 사귀었던 여성과 만남을 지속했다.
그러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곽지안은 이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 선수를 쳤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약을 그녀에게 먹인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계단에서 떨어트려 사고처럼 죽이려 했지만 그녀는 살았다.
단지 전신불구에 혼수상태에 이른 것이다.
난 그녀의 일생을 보며 그 남편의 악독함을 욕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이종진과 곽지안의 차이를 말이다.
이종진은 영체, 즉 영혼이 몸을 떠난 것이라면 곽지안은 나처럼 영체만 살아 있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 눈을 뜨고자 노력해 본다.
역시나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 몸이 아예 나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그나저나 그녀의 기억을 받아서일까?
머리가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띵하다.
그리고 곽지안의 기억들이 마치 내 일처럼 느껴진다.
정신 이동마다 이런 식이면 정말이지 곤란할 것 같다.
아무래도 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이제 돌아가 볼까?’
더 이상 이곳에서 할 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곽지안의 방을 훑어보다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내가 이 방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러면 과연 곽지안이 그것을 볼 수 있을까?
의문과 함께 난 침대 옆에 작은 테이블을 만들기 시작했다.
‘방 분위기에 어울리는…….’
문득 혼자 중얼거리다 말을 멈췄다.
내가 언제부터 인테리어에 신경 썼단 말인가?
‘에이!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난 작은 메모장을 만들고 그곳에 짤막한 글을 남겼다.
이 쪽지가 보이나요? 보인다면 놀라지 말아요. 전 우연히 당신의 방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당신도 글을 남겨줄 수 있나요? 참, 제 이름은 현금입니다. 그렇다고 돈만 밝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6시간 뒤에 다시 올 테니 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글로 남겨주세요.
펜팔의 느낌이 이럴까?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자신의 정신 이동을 생각해 보면 일말의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완성된 쪽지가 쑥스러워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대화가 가능하다면 이 갑갑한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결국 놔뒀다.
그녀가 이 글을 읽었으면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눈을 감았다.
이제는 내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리고 내 육체가 날 당기는 느낌에 몸을 맡겼다.
2. 친구를 얻다(1)
정신 이동시 밀려오는 대상자의 기억에 대한 문제의 해결점은 지금으로서는 딱히 없었다.
의지로 거부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과연 받아들이는 것과 거부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나을지는 실험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됐다!’
지금까지 시계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3시간 뒤에 간다고 할 걸 후회했다.
마치 중학교 시절 첫사랑에게 ‘좋아한다’ 고백해 놓고 대답을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난 정신을 곽지안의 백회에 두고 정신 이동을 시작했다.
‘아!’
그녀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가 나의 쪽지를 봤다는 것을 느꼈다.
괴기 어린 사진들은 모두 사라졌고, 부잣집 아가씨의 방과 같은 느낌으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든 테이블은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쪽지, 아니, 편지가 놓여 있었다.
재빨리 편지를 뜯었다.
‘헐! 정말 펜팔을 할 생각인가?’
아직 편지를 펼치진 않았지만 편지의 두께에 기가 질린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죠? 신인가요? 아님, 저승사자?
아니, 누구든 그건 상관없어요. 당신이 날 데리러 온 사람만 아니라면요.
난 지금 죽을 수 없어요. 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때까진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갈 수 없어요.
……(중략)…….
안녕하세요. 전 곽지안이에요. 글의 내용을 유추해 보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군요.
위에 적은 글은 이해하세요. 사실 당신의 쪽지를 보고 너무 기쁘답니다. 시간도 알 수 없는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게 정말이지 고통이에요.
……(중략)…….
당신이 절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전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
당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돈도 드릴 수 있어요. 제 재산은 아무도 손댈 수 없게 해뒀어요. 그 악마 같은 놈도 단 한 푼도 만질 수 없죠. 하지만 그 모든 재산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제발! 제발! 절 도와주세요.
곽지안의 편지는 처음엔 광기 같은 것이 보이더니 뒤로 갈수록 차분해진다.
편지에는 상세히 자신이 당한 일이 설명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도 암흑에서 미쳤었다.
지금도 미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무작정 정신 이동을 할 생각만 했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편지를 들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정신 이동을 한다고 해도 최대 24시간이 내가 상대의 몸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즉, 아무리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결국엔 이 병원의 병실에서 죽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선 내 육체를 다시 움직이게 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에서는 전신 마비는 흔한 경우다.
그들은 대부분 고대 무술의 내공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한다.
나도 역시 가능할까?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도 가능한데 그런 무술을 가진 사람이 없을까?
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정신 이동이 주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정신 이동은 수단이 되었다.
남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은 귀찮음이 아니라 이제는 나의 최대의 무기가 되었다.
목표는 정해졌다.
내공심법을 익혀 이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다.
‘잠깐! 나 정말 정신세계에 빠져 살더니 바보가 된 건가?’
우리나라 인구수가 5,000만.
하루에 한 번씩 정신 이동을 한다고 해도……
컥! 십삼만 년쯤 걸린다.
그리고 이 병실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겨우 10명 안팎.
‘아악!’
생각할수록 짜증이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라도 좀 해둘 것을.
곽지안의 기억을 훑어보면 좀 나을까?
곽지안을 생각하니 비로소 내가 그녀의 정신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그녀의 의문에 몇 가지 답을 적어뒀고, 다시 내가 궁금한 점을 몇 가지 적었다.
그리고 2시간 뒤 다시 오겠다는 글을 남기고 내 육체로 이동했다.
곽지안과의 펜팔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느끼게 했다.
특히 인간은 인간과 소통해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펜팔이라지만 처음 편지처럼 길지 않았다.
짤막한 질문과 답이 오고 가는 정도였지만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하루에 10번 이상을 들락날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펜팔의 재미에 반복적으로 오고 가다 강제적으로 튕긴 것이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말로는 간호사가 3번 왔다 갔다고 했으니 대략 12시간 정도가 맞을 것이다.
걸으면 뛰고 싶고, 뛰면 날고 싶다고 했던가?
곽지안과 요상한 펜팔을 하기 시작하니 좀 더 편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영체끼리는 혹 텔레파시가 통할까?
아무리 신호를 보내봤지만 헛짓.
결국 그녀에게 유체 이탈에 대해 설명해 줬다.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몰랐기에 한동안 그녀에게 이동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엔 정말 성공한다.’
난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바로 정신 이동을 할 생각이다.
곽지안에게 왔다 갔다 이동하다 보니 정신 이동도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
이종진과 다르게 영체가 있는 그녀의 머리끝, 백회 바로 위에는 어떤 기운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들어간다고 정신만 집중하면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드르륵!
‘왔다!’
머리끝을 봤다.
간호사의 머리끝의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눈을 감고 오직 그 기운만을 느끼며 정신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쑤욱 몸이 나아감을 느껴진다.
곽지안 때와는 또 다른 느낌.
바로 정신세계로 돌입된다,
이질감과 함께 드디어 몸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을 떴다.
“커억! 이 망할!”
내가 차지한 몸은 아름다운 그녀가 아니라 내가 곰이라 부르던 간호사의 몸이었다.
설마 순환 근무였던 것이냐?
어마어마한 실망감이 덮쳤지만 진정해야 한다.
비록 내가 원하던 몸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몸으로 이동한 것이니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 한다.
지금까지완 다르게 어둠도 정신세계도 없다.
그냥 내가 그녀가 된 기분이다.
살짝 움직여 본다.
육중한 다리를 옮기는 것이라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힘들다.
마치 며칠 잠만 자다 일어난 몸처럼 둔하고 어색하다.
이리저리 팔다리를 움직이고 침대와 침대 사이의 복도도 걸어본다.
어느 정도 움직이고 나서야 비로소 익숙해지는 느낌이 든다.
“예상보다 힘들지 않는데…… 헙!”
혼잣말에 익숙했는데 앞으론 주의해야겠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
‘몸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기억은 왜 안 들어오…….’
“윽! 스톱!”
생각과 함께 그녀의 일생이 내 머리로 들어온다.
멈추라는 강력한 의지 때문인지 일순 멈춘다.
그 짧은 시간에 곰의 초등학교 기억까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