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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1권(25화)
13. 가슴이, 머리가 아프다(2)
스타라는 직업이 보기보다 훨씬 고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하루였다.
총 8번의 인터뷰는 날 지치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오히려 바쁜 것이 더 나은지도 몰랐다.
빈자리에 대한 생각을 할 틈이 없으니까.
똑똑!
막 내 육체로 돌아가려는데 들리는 노크 소리에 점핑을 멈춘다.
“누구세요?”
“나.”
누구?
무슨 대답을 이렇게 짜증나게 하냐?
남자 목소리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여자 목소리니 일단은 문을 열어주는 것이 예의.
문을 열자 아무 말 없이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
아! 윤승호와 사귀었던 여자 중 한 명이다.
이름이 민수린이었던가?
윤승호는 꽤 바람둥이었다.
일단 사귀고 침대에 몇 번 데려가면 헤어질 준비하는 놈이었다.
내가 여자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이유는 부끄럽게도 간접경험(?)이 많아서였다.
“잘 지내고 있나 보네?”
환자로 있는 이에겐 할 말이 아니다. 왠지 독이 가득한 목소리의 그녀다.
“그냥저냥. 음료수 마실래?”
“……물 있으면 줘.”
의아한 표정을 짓는 민수린.
익숙한 일이기에 물을 건네고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밤늦게 무슨 일이야?”
“별거 아냐.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어.”
“많이 봐도 돼.”
“…….”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녀를 보니 농담을 던진 내가 미안할 지경이다.
“농담이야. 그런 표정 짓지 말지?”
“하! 정말 기가 막히는군. 네가 지금 나에게 농담할 처지야?”
“그랬나? 그럼 미안.”
난 윤승호가 그녀에게 뭔 짓을 했는지 모른다.
그녀와 관련된 더 많은 기억을 윤승호의 머리에 요구하자 아주 짧은 기억이 넘어온다.
‘응?’
특별할 게 없다. 둘은 그냥 쿨하게 헤어진 사이었다.
단지 헤어지고 몇 번 찾아와서 윤승호가 몇 번 소리친 것이 다였다.
문득, 점핑이라도 해서 그녀의 과거를 보고 싶어졌지만 한동안 여성에게는 더 이상 점핑 금지다.
앞으로는 아주 마초적인 남자들에게 점핑을 할 작정이다.
“점점…… 너 사고로 바보가 된 거니?”
바보라는 단어가 이토록 어감이 틀릴 줄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남자가 참는 수밖에.
“약간. 기억을 못하는 것들이 좀 있기는 해.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용서해.”
“…….”
“왜?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거야? 혹,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줄래?”
“됐어! 괜히 착한 척하지 마! 구역질나니까.”
예상외로 그녀의 반응은 거칠었다.
난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달라고? 지금 장난해? 차라리 그때처럼 꺼지라고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해! 죽어 버리라고 하란 말이야!”
그녀가 던진 물통이 얼굴로 날아온다.
기억 속에 잘못은 없지만 이럴 땐 맞아주는 게 낫다.
퍽!
하지만 이놈의 본능이란 무서운 건가 보다. 그냥 피해 버렸다.
그렇게 날아간 물통은 소파에 맞고 바닥에 떨어져 반쯤 남은 물을 토해내고 있다.
“미안. 맞으려고 했는데…….”
“닥쳐! 닥치란 말이야.”
이런, 이런! 그녀의 성질을 건드린 모양이다. 민수린의 핸드백과 내가 읽던 책들이 마구 날아온다.
선도법과 선도술을 익혀서인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모조리 피해 버린다.
‘망할! 그냥 맞아줄 걸.’
민수린은 예쁜 얼굴이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진 채 식식거린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의 표정을 다 잡는 그녀.
“역시 넌 구제불능이었어. 영화 잘 찍어. 이번엔 말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진짜 칼에 찔려 죽을 수 있을 테니까.”
큭! 어디서 그런 악담을.
땅에 떨어진 핸드백을 들더니 나가려는 민수린에게 결국 점핑을 했다.
소름 돋는 말에서 약간의 의구심이 생겨서였다.
난 먼저 민수린의 몸을 소파에 앉게 하고 기억을 읽었다.
‘응?’
뭔가가 상당히 이상하다.
기억을 읽어 들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영화로 치자면 두 개의 영화를 섞어 놓은 듯 보인다.
‘에∼∼! 이 여자가 사주한 거였어?’
윤승호가 말에서 떨어진 이유가 이 여자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 말안장을 잘라놓은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건 윤승호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한참 웃더니, 갑자기 펑펑 운다.
그것 말고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분명 헤어질 때 윤승호의 기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화를 낸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민수린은 미쳤다.
다른 걸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상황. 난 그녀의 정신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을 만들고 글을 적었다.
―제정신을 차리자.
―윤승호를 미워하지 말자.
―미쳐도 곱게 미치자.
미친 여자에게 어떤 말이 효과가 있을지 몰라 몇 가지를 적었다.
앞으로 윤승호로 살아가야 하는데 계속 미친 짓을 하면 곤란하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한참 방을 치장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여자 목소리.
‘거기 누구죠? 저 좀 꺼내주세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정신세계에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뭐, 나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공중에 커다란 등을 만들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방을 만든 공간과 멀지 않은 곳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다.
‘민수린?’
민수린이 동그란 원형의 막에 갇혀 있었다.
‘누구죠? 절 아나요? 이 막 좀 깨뜨려 주겠어요?’
머리가 혼란스럽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의문이 든다.
‘설마? 이중인격?’
판타지 소설을 보면 한 사람에게 몇 명의 영혼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를 생각해 보면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 누구죠?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아니, 그건 상관없어요. 어서 이 막 좀 깨주겠어요?’
대화가 진행이 안 된다.
질문과 질문의 연속이라니.
‘잠깐! 일단 조용히 하고 얘기를 나눠봅시다. 난 우연히 여기로 들어왔어요. 아가씨는 누구죠?’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난 민수린이에요. 당신은 누구죠?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난 그냥 금이라고 불러요. 음…….’
딱히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럴 땐 사기꾼의 머리가 필요하다.
‘전 승호의 몸에 붙어 사는 영혼이에요.’
궁색하다. 하지만 민수린은 의심하지 않는다.
참 순진한 아가씨다.
‘저와 비슷한 경우인가 보군요. 금이 씨 그럼 이 막을 깨뜨려 주겠어요? 빨리 나가지 않으면 수란이가 승호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요.’
‘아, 밖에서 엄청 소란스럽게 굴던 여자를 말하는 건가요? 그녀의 이름이 민수란인가요?’
‘맞아요. 당신도 그걸 본 모양이군요. 수란이는 성격이 괴팍해요. 어서 막을 깨뜨려요.’
‘괜찮아요. 내가 잠깐 잠재웠거든요.’
이제야 민수린의 기억이 그렇게 복잡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막을 부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면서도 함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설령 부술 수 있다고 해도 그래선 안 돼요. 당신이 민수란과 섞여 버릴 수도 있잖아요.’
‘차라리 섞이면 더 나아요. 어쨌든 한 번 깨뜨려 봐요.’
섞이면 윤승호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을지 모른다. 민수란의 성격을 보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럼 뒤로 물러서요.’
난 막을 깨뜨려 보기로 했다.
이 정신세계에서는 나는 신(神).
난 막 앞에 서서 힘을 잔뜩 주고 주먹을 질렀다.
팡!
막을 치는 순간 반탄력에 내 몸이 뒤로 튕겨졌다.
그리고 엄청난 충격이 영체에 느껴진다.
‘컥!’
막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영체에 갑작스런 충격에 내 육체로 돌아갈 뻔했다.
‘안 되나요?’
마치 성안에 갇힌 공주처럼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난 왕자 따위가 아니란 말이야.
신에서 갑자기 보잘것없는 영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다시 한 번 쳐보기로 했다.
난 온몸에 충격을 대비하고 막을 아까보다 10배 이하의 힘으로 툭 쳤다. 역시 약간의 반탄력이 느껴진다.
조금씩 힘을 더할수록 반탄력 또한 크다.
아까처럼 크게 내지르면 이번엔 영체가 버티지 못할 것 같다.
포기할까? 이거 이러다 내일 퇴원도 못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사전에 포기란 단어는 없다.
그래, 선도법!
난 민수린의 홀을 느끼며 선도법으로 기를 빨아들인다.
그리고 그 기를 몸에 쌓고 동시에 내 영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감싼다는 생각을 했다.
팡!
좀 강하게 쳤지만 반탄력은 조금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감이 넘쳤고, 더욱 기를 많이 빨아들이며 막을 치기 시작했다.
팡! 팡! 팡! 팡! 파앙!
아무리 때려도 소용이 없다.
마지막 주먹에 내 기의 막이 흩어져 버린다.
‘안 되네요.’
포기를 모르는 난 결국 기브업(Give up)을 선택했다.
내 사전은 영영사전이다.
‘휴∼ 어쩔 수 없죠.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수린 씨와 수란 씨는 언제 바뀌는 거예요?’
바뀌는 시기만 알아도 대처하기가 쉬울 테니 정보를 캐야 한다.
‘대중없어요. 하지만 요즘은 수란의 힘이 강해져서 점점 제 시간이 줄어들고 있어요.’
‘얼마 동안요?’
‘지금은 하루의 반은 수란이 차지하고 있어요.’
젠장! 그럼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승호와 사귈 땐 수린 씨였어요? 수란 씨였어요?’
‘나였어요. 그런데 딱 한 번…… 그와 잘 때 바뀐 적이 있어요.’
쳇! 조심들 좀 하지.
‘여기 갇혀 있으면 밖에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아뇨, 다 볼 수 있어요. 지금은 당신이 정신을 잃게 해서 보이지 않는 것뿐이에요.’
‘그럼, 당신과 승호가 헤어질 때 다 보고 있었단 말이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수란은 자기와 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몇 번 승호를 찾아갔고 승호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거예요.’
참 골고루 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안이 있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난 승호에게 돌아가야 해요. 오랫동안 떠돌 수 없거든요. 일단, 생각 좀 해 봐야겠어요.’
‘휴∼ 승호에게 조심하라고 해줘요. 수란은 제 말을 듣지 않거든요.’
‘알았어요. 또 올게요.’
난 수린에게 말하고 내 몸으로 점핑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깨어난 수란은 한 번 더 지랄을 하곤 칼 조심하라고 악담을 퍼부으며 나간다.
“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머리가 아프다.
***
“그동안 감사합니다.”
“윤승호 씨가 이렇게 건강하니 저희가 오히려 기쁘군요. 정기 검진 때는 잊지 말고 오세요.”
“예. 그리고 이지원 환자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저희가 최선을 다해 이지원 환자가 깨어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최선을 다하진 말아주세요.’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괜히 이것저것 한다고 그녀의 몸이 망가지면 안 된다.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하! 부탁이라니요.”
의사 분들과 다정한 척 사진을 찍고 마침내 퇴원 행사(?)를 모두 마쳤다.
“짐은 이게 다야?”
“응. 곧 나갈 테니 차에 먼저 가 있어.”
“알았어. 입구에 차 대둘게.”
배동수는 손가방을 들고 먼저 나간다. 난 내 방을 나와 옆방으로 갔다.
나와 이지원이 나란히 누워 있다.
이지원의 경우는 사고가 난 지 3개월밖에 안 되었고, 틈틈이 내가 점핑을 해 몸도 가볍게 움직여 주고 선도법도 행해서인지 그냥 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 모습은 많이 좋지 않다.
내가 나를 보는 데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다.
뼈밖에 남지 않은 내 손을 만져 본다.
어쩌면 내 육체는 포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아직 포기하지는 않을게.’
난 내게 말을 한다. 누워 있는 난 가늘게 숨 쉴 뿐 대답이 없다.
어차피 매일 영체로 올 곳이다. 더 이상 미적거릴 이유는 없다.
병원 문을 열고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마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나를 환영하는 듯이.
차에 탔다. 짙게 선팅된 차량은 병원을 나선다.
창밖으로 병원을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 마치 잘 벼른 칼과 같은 인물이다.
‘어디서 본 인물인가?’
하지만 기억엔 없다. 왠지 눈을 떼기 힘든 사내. 잠시 그 사내의 눈과 내 눈이 얽힌다.
‘점핑을 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포기했다.
남자는 어느새 시야에 보이지도 않았고, 오늘은 그냥 새로운 삶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