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점핑1권(24화)
12. 운수 좋은 날(3)
“정용재입니다.”
“윤승호입니다.”
정용재는 내가 점핑을 했던 신경과 과장이었다.
“말은 직원에게 들었습니다. 이지원 환자를 찾아오셨다고요?”
“예. 그 아이가 혼수상태라는 말을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지원 환자는…….”
의사의 설명이 길게 이어진다.
난 듣는 내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험, 일단 뇌의 자극을 주어 깨어나게 하는 시술을 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더군요. 일단 기간을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요.”
“깨어나지 않는다면요?”
“그런 경우에는 저희로서도…….”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지원은 사망 처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 그 기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병원비를 낸다면 계속 치료가 가능할까요?”
“그거야 가능합니다.”
이제 마지막 고비다.
“제가 바빠 이곳에 있으면 자주 들를 수 없는데 혹,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가능합니까?”
“그건 힘들 겁니다. 지금 이지원 환자의 경우 보호자가 전혀 없습니다. 저희 병원에서 보호를 자처하고 있는 경우죠. 그렇다고 저희 병원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 아이는 제 가족과 같은 아이입니다.”
“…….”
잠깐 고민을 하는 정용재.
아까 심어둔 각인이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윤승호 씨가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게 되면 이지원 환자의 병원비를 내셔야 할 겁니다.”
됐다! 병원에서 내줄 수 없다고 할 때를 대비해 로비에서 그렇게 연기를 한 건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상관없습니다. 비용은 일체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제 가족 같은 아이인데 어디 돈이 문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처를 주시면 저희 쪽에서 처리하면서 필요할 때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무사히 잘 해결이 되었다. 비록 이지원이 어리긴 하지만 지안이 그리 나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승호야, 너 도대체 병원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병원 밖으로 나오니 배동수가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놀란 듯이 말한다.
“뭐가?”
“너 지금 실시간 검색어 3위야. 그새 또 한 칸 올랐다.”
내가 조금 전 한 일 때문인가?
아무리 요즘 스마트폰 시대라고 해도 너무 빠른 거 아닌가?
“큭! 사장님한테 전화 왔다.”
“통화해. 난 차에서 기다릴게.”
난 차에 들어가 핸드폰으로 검색 사이트에 들어갔다.
짧은 순간에 어느새 1위다.
스마트한 세상이라더니 실감하게 된다.
난 ‘윤승호 동영상’ 이라는 글을 클릭했다. 작은 핸드폰으로 아까 내가 했던 닭살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뭐래?”
“뭐래긴 당장 튀어 오라지. 서울로 갈 거지?”
이 형 딴 데 간다면 때릴 기세다.
“응. 그리고 사장이 뭐라 하면 모두 내 탓으로 돌려.”
직장인이 사장 말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기에 핑곗거리를 만들어준다.
차는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서울로 향한다.
오늘 일을 생각해 보면 참 운이 좋았다.
하루만에 지안에게 맞는 사람을 찾게 되다니 말이다.
지안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아니, 아직 찾지 못했다고 좀 골려줄까?
“하하!”
괜한 웃음이 나온다.
지안은 분명 활짝 웃으며 좋아라 할 것이다.
13. 가슴이, 머리가 아프다(1)
살다보면 황당한 경우가 있다.
배에서 신호를 보내 바지를 내리고 앉아 시원하게 일을 끝냈는데 휴지가 없어 돈으로 닦아볼까 꺼내 보니 천 원짜리도 없고 오직 만 원짜리 몇 장만 있을 때와 같은 경우 말이다.
지금이라면 만 원짜리라도 닦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아까워 만 원짜리는 차마 사용하지 못했다.
백만 원짜리 수표로 닦았다는 기막힌 뉴스도 보았지만 지금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각설하고 난 내 옆에 있던 지안의 자리를 바라보며 황당해하고 있다.
지안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멍하니 바라보다 뭐에 홀린 듯 방금 전 외출에서 돌아와 간호사에게 혼나고 누워 있던 윤승호에게 점핑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와 간호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윤승호 씨, 또 어딜…….”
“지안은 어디 갔죠? 제 옆방에 있는 곽지안은 어디로 사라진 거죠?”
“아! 아, 아파요.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내가 혼수상태의 환자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처리되는지 몰랐다면 이렇게 조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빨리 말해요! 곽지안은 어디로 갔어요!”
앞에서 아프다며 내 손을 떼려고 하는 간호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지안을 찾는 것뿐이다.
안에서 업무를 보던 간호사들까지 나에게 달라붙은 후에야 비로소 이성을 찾고 간호사의 팔을 놓아주었다.
“죄송합니다.”
인상을 쓰고 있는 간호사에게 사과를 했다.
서두른다고 빠르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다치신 곳이 있다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괘, 괜찮아요. 그런데, 곽지안 환자라면 오늘 퇴원했어요.”
“네?”
“맞아요. 오늘 오전에 그녀의 남편이 와서 그녀를 데려갔거든요.”
“그럴 리가…….”
옆에서 수간호사가 거든다.
내 입에선 마치 신음 소리처럼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온다.
“참, 신미향 간호사는 어디 있죠?”
신미향이 떠올라 물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으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미향이는 어제부로 그만뒀어요. 벌써 삼 주일 전부터 퇴사 의사를 밝혔거든요.”
철저하게도 준비를 했구나, 곽지안.
머리 좋은 애가 내 생각 범위를 예상 못했을 리 없다.
“참, 그녀의 남편이 당신에게 전하라는 편지가 있었어요.”
수간호사가 책상을 뒤져 나에게 편지를 건넨다.
봉투에는 간단한 글이 적혀 있었다.
To. 친구
잠시 편지를 보고 있다가 다시 간호사에게 사과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 생각이 없다. 다만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받은 편지를 볼 뿐이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조심스레 편지를 뜯었다.
내 영혼의 친구, 금에게.
제일 위에 적힌 글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지안과 난 말 그대로 영혼의 친구였다.
이렇게 편지를 쓰다 보니 너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아이러니하게 만날 때도 편지였는데 헤어지는 데도 편지가 이용되는구나.
일단 미안해. 내 기억을 다 알고 있으니 너도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쁜 애라는 걸 잘 알 거야.
그렇지 않아.
넌 그런 애가 아니었어.
……많은 고민을 했어. 그런데 차마 널 보고 말할 용기가 없었어.
복수를 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들도 나와 같은 절망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어.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어. 이해할 수 있지?
사실 네가 복수를 도와준다고 했을 때 무지 기뻤어. 하지만 그건 내 몫이야. 너처럼 착한 애를 이토록 더러운 일에 끌어들일 수가 없었어.
지안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난…… 그렇게 좋은 놈이 아냐.
……날 찾지 마. 그냥 한동안 날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너라면 날 찾는 게 어렵지 않을지 몰라.
하지만 그러지 마. 복수가 끝나면 널 찾아갈 테니까.
그때, 날 모른 척만 하지 말아줘.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안쓰러워하지도 말고 그냥 잠깐 외로워만 해. 그리고 내가 돌아왔을 때 예전의 너처럼 날 받아줘.
싫어. 아주 많이 혼내줄 거야.
내가 지금의 나만큼만 아프도록……
행복하게 지내.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이거 하나야. 나중에 스타 되었다고 무시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바보야, 다음에 봐.
너의 영혼의 친구 지안이.
나쁜 계집애. 불행하게 만들어놓고 행복하라니…….
정말 많이 혼내야겠다.
그래, 니 말대로 행복하게 지내 마. 네가 약 오를 만큼 예쁜 여자 친구도 만들고 잘 먹고 잘살게…….
그런데 왜 이렇게 눈앞이 흐려지는 거지?
그리고 왜 이렇게 그녀의 ‘바보야’ 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거지?
나쁜 계집애…….
무사히만 돌아와.
그럼, 모두 용서할게.
***
“그럼, 완전히 다 나은 건가요?
“아뇨,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한답니다. 하지만 활동하는 데는 약간의 불편함만 있을 뿐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승호 씨의 많은 팬들이 무척 기뻐하겠는데요.”
“모두 저를 걱정해 주신 분들의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김민상 리포트의 말에 난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한다.
난 퇴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 계속 있다고 해도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며칠 동안 지안 때문에 속상했지만 어쩌면 그녀가 계속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팬들에게 카드를 직접 써서 보냈다고 하던데 힘들진 않았습니까?”
“하하하! 팬분들이 저에게 보내시는 정성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죠. 저야 간단한 카드에 답을 한 것뿐이거든요.”
“그래도 대단하세요.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이잖아요?”
오늘만 이 얘기를 3번째 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각종 정규 방송뿐 아니라 케이블 방송에서도 취재를 왔기에 앞으로도 다섯 군데의 인터뷰에 응해야 했다.
난 이미 외워 버린 말을 쏟아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예정에 없던 일이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인상을 쓸 수는 없었다.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혼수상태의 환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별로 말하고 싶지 않는 내용이다.
이지원의 일은 전격적으로 빠르게 처리가 되었다. 워낙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일이었던지라 병원에서도 기꺼워하며 그녀를 내게 보냈다.
그리고 이지원은 지금 옆방에 내 육체와 나란히 누워 있다.
“여러분의 관심 덕분에 제가 돌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디 그 아이가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깨어났으면 좋겠군요.”
난 간단히 할 말만 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저희 방송을 지켜보시는 시청자분들에게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센스TV 시청자 여러분, 앞으로 더 건강한 모습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 감기 조심하세요.”
앞에 스케치북에 쓰인 글을 읽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컷!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며 장비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민상이 형, 고생하셨어요.”
“응. 고생했어. 그런데 너 정말 많이 바뀌었다. 철이 많이 들었나 보다.”
휴∼ 이제 이 소리도 지겹다. 그리고 항상 하던 말을 다시한다.
“죽다 살아났는데 정신 차려야죠.”
“자식, 지금 모습 보기 좋다. 영화 찍고 보자.”
“다음엔 여자 리포트로 부탁해요. 하하하!”
“웃기지 마. 그렇지 않아도 요즘 자꾸 밀리고 있는데. 넌 내가 예약이야.”
김민상은 한때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한 연예계 X―file을 작성 시, 정보를 제공해서 꽤 많은 유명인들에게 찍혀서 리포트할 때 자주 거절당하는 사람이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와 다시 화장을 매만진다.
난 눈을 감고 선도법을 행한다.
이런 자투리 시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시간 죽이기에는 최고였다.
내공 수련시 건드리면 주화입마 입을지 모른다는 무협지의 내용은 선도법 3단계와는 상관이 없었다.
걸으면서도 심지어 누군가와 말하면서도 수련이 가능한 것이 선도법이었다.
“승호야, 왔다.”
배동수의 속삭임에 눈을 떴고 자리에 일어나 새로운 촬영팀을 환영했다.
“고생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