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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크1권



프리크1권(1화)
Chapter.1 괴짜소년 테리언(1)


로렌스카 마을은 지리상 수도 가르반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그 이유는 프로티나 왕국의 수도로 향하는 길이 외길로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로렌스카 마을을 지나쳐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최근 들어 마을에 들르는 여행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기분 좋은 바람이구나.”
로렌스카 마을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나들이 언덕.
그 한가운데에 로렌스카 마을을 붐비게 한 원흉.
로렌스카 마을의 명물인 괴짜소년 테리언이 팔베개를 한 채 누워 있었다.
그는 기분 좋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만끽하며 오른쪽 다리를 꼬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턴 아저씨.”
그러자 테리언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 로턴은 노을져가는 하늘을 주시한 채로 대답했다.
“뭐냐.”
“오늘따라 마을이 굉장히 북적이네?”
“사건의 원흉인 네가 할 소리냐?”
“응?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시치미 뗄 생각 마라. 프로티나 왕국에서는 제일이며 대륙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미녀. 레이시라 프로티나의 가슴을 만진 남자라고? 그 낯짝을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닐 거다.”
“그래서 그거 때문에 나를 구경하러 이렇게 인파가 몰렸단 말이야?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데…….”
테리언이 가늘게 눈을 뜨며 로턴을 바라보자 로턴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긴 눈치 빠른 네 녀석에게 무언가 숨기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겠지. 하지만 아까 내가 말한 이유가 거짓은 아니야. 단지 결정적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은 것뿐이지.”
“결정적인 이유?”
테리언이 고개를 갸웃하자 로턴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네가 우리 왕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기사 카르반 남작과 프로티나 왕녀기사단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 때문이다.”
하리카 대륙에는 네 개의 왕국과 하나의 제국이 존재한다. 그중 하리카 대륙을 통틀어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유명한 열 명의 기사가 있었는데 카르반이 그중 한 명이었다.
특히 프로티나 왕국 내에서만 따지면 카르반은 거의 최고로 강한 기사라 봐도 무방할 정도.
그런 그가 허점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슈가 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레이시라 공주를 호위하는 왕녀기사단의 방어진이 뚫려 버린 것도 왕국 내에서는 완전 대박 사건이었다고. 물론 한순간이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세간에는 큰 파장을 일으킬 정도다. 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엔 관심이 없으니 몰랐겠지만.”
로턴의 말을 들은 테리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헤에. 확실히 대단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인가?”
“너……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대답할 상황은 아닐 거다, 아마.”
“어째서?”
테리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너는 우리 왕국 최고의 기사라 불리는 카르반 남작과 왕녀기사단을 보란 듯이 유린한 존재라고. 게다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서 공주의 코앞까지 도달해서 부탁한 게 고작 가슴이나 만지게 해 달라고 하는 거였지.”
테리언의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한편으로는 궁금했으리라. 저렇게까지 해 가면서 대체 공주님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싶었는지 말이다. 그러나 테리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리게 할 정도의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테리언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말이다.
로턴의 말에 여태까지 태연하게 대답하던 테리언이 발끈하며 외쳤다.
“고작이라니! 아저씨는 그 가슴의 감촉을 모르니까 하는 소리라고! 내가 그 가슴에 손이 닿는 순간 눈앞에 뭐가 보였는지 알아? 천국이었어. 천국이 내 눈앞에 환상처럼 펼쳐졌다고! 그 가슴을 움켜쥔 순간 느껴진 그 짜릿하면서도 몽환적인 감각……. 아아! 아마 로턴 아저씨는 평생 모를 거야.”
“아이고.”
로턴은 이마에 손을 짚더니 고개를 저었다.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라면 지금쯤이면 벌써 불안에 가득 차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왕국의 공주를 건드린 것은 따지고 보면 반역죄에 가까운 행위였다.
하물며 공주의 가슴을 만지겠다니?
그 당시 레이시라가 테리언의 부탁을 들어줬기에 망정이었다.
만약 레이시라가 허락을 해 주지 않았다든가 아예 마차에서 나오지도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지는 안 봐도 빤했을 것이다.
게다가 혹시 모르지 않는가.
국왕이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하여 병사들을 보내 테리언의 목을 치라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조금만이라도 정상적인 생각을 할 줄 안다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테리언은 정상이 아니었다.
로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이 사실은 부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반드시 해 줘야 할 말은 있었다.
“너는 그저 가슴을 만지기 위해 그런 짓을 벌였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로턴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을 멈추었다.
팔베개를 한 채 누워 있던 테리언도 로턴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카르반 남작과 왕녀기사단의 호위를 뚫고 레이시라 공주의 가슴을 만질 정도로 실력 있는 녀석이다’라고 홍보한 꼴이 된 거라고. 어떤 멍청이가 가슴이나 만지려고 목숨이나 걸겠어? 넌 진지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너의 행위가 그저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로턴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뒷짐을 지며 마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아마 조만간 세상은 너를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에 몰릴 거다. 너의 그 이상한 철학은 인정할 수 없어도 너의 그 현란한 움직임만큼은 인정하니까. 세상은 인재에 목말라 하거든.”
테리언은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몸놀림이 남다르지 않은 면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던 그것.
테리언에게는 마나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마나를 감지하여 그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각에 감지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녀기사단을 혼란케 하고 카르반을 놀라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몸속에 마나를 소유하고 태어난다. 단지 마법이나 검기를 끌어올리는 면에서 재능이 있고 없고가 판별되는 것일 뿐. 하지만 테리언에게는 마나 자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과거 로턴은 프로티나 왕궁마법단에서 활동하던 유능한 마법사였기에 알 수 있었다.
인간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각기 고유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당연한 사실로 인지되는데, 마법사로서 마나의 유동을 느낄 수 있는 로턴은 유일하게 테리언만 체내에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마나가 없다는 것은 재능이라고 보기엔 일종의 ‘병’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여태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체내에 마나가 존재하지 않은 존재는 들어 본 적이 없어. 실제로 체내에 마나가 없으면 죽어 버리니까. 하지만 테리언은 마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다. 그렇다면 마나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생명력이라는 설이 거짓이 되는 건가?’
테리언을 만나게 된 것은 지금으로 부터 9년 전.
우연히 자신의 딸을 구해 주게 되어 알게 된 사이였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도 몰랐고 심지어 테리언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이른바 기억을 잃은 상태였던 것이다.
어쩌면 로턴은 테리언이 기억을 잃은 이유가 위험에 처한 딸을 구해 주려다가 다쳤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테리언과 조우했을 당시 테리언은 전체적으로 크게 다쳐 있었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발견 당시 머리 쪽에 심한 상처가 있었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딸을 구해 준 이후 기억을 잃고 오갈 데가 없어진 테리언.
그런 테리언을 로턴이 보살펴 주게 되었고 그러던 중 우연히 테리언이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순수하게 마법사로서 호기심이 생긴 그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결국 큰 성과는 건질 수 없었다.
‘만약 수도에 올라가서 좀 더 관련 서적과 전문적인 시설을 갖춘다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로턴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어느 샌가 일어난 테리언이 가볍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아저씨가 나를 걱정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인 만큼 하고 싶은 건 가능한 다 하고 죽을 거라고. 이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여자들이 잔뜩 있을 텐데, 그 가슴을 구경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건 남자로서의 수치야.”
“어련하시겠어, 욘석아.”
“하하.”
테리언은 호쾌하게 웃으며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 그런 성격임을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이 있는 걸까.
마나가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테리언은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 예전부터 테리언을 지켜봐 온 나지만 대체 저 녀석은 언제부터 여자의 가슴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로턴은 테리언이 결코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여자의 가슴을 만지는 녀석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만약 테리언이 정말 그런 놈이었더라면 특유의 예측할 수 없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강제로 여자의 가슴을 만지고 다녔을 것이다.
‘도대체 테리언의 과거에는 무엇이 있던 걸까?’
테리언과는 정말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고 그 누구보다 테리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로턴이었다. 하지만 테리언과 지내면 지낼수록 점점 더 그에 대한 의문이 커져만 갔다.
정말이지 소문의 별명대로 괴짜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듯했다.
“테리언.”
“응?”
“세상 구경 해 보고 싶지 않냐?”
“세상 구경이라…….”
테리언은 실눈을 뜬 채 마을 정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해 보고 싶긴 하지. 나도 마음 같아선 오래전부터 나가 볼까…… 하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어째서 안 나간 거지?”
“내가 무슨 가슴에만 집착하는 녀석인 줄 알아? 나도 현실 정도는 직시하고 있는 남자라고. 돈도 쥐뿔도 없는 주제에 무턱대고 세상에 나갈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그럼 여건이 갖추어진다면 나가 볼 테냐?”
로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테리언은 로턴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쏜살같이 로턴에게 다가왔다.
“대신 조건이 있다.”
“뭔데?”
“어쩌면 머지않은 시일에 이 마을은 너를 찾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몰릴 거다. 그것은 좋은 명목일 수도 혹은 꺼림칙한 목적일 수도 있지. 그 이유는 아까도 설명해 줘서 너도 알겠지?”
“으응.”
“어쩌면 너를 해치려는 자들이 나타날지도 몰라. 그러니 프로티나 아카데미에 편입해라. 돈은 내가 대 줄 테니까.”
세상 구경에 잔뜩 들떴던 테리언은 아카데미란 말이 나오자 표정이 급변했다.
“으으, 아저씨. 나 지루한 건 딱 싫어하는 타입인 거 알잖아. 분명 아카데미 가면 지루한 수업이나 받아야 할 텐데 그런 건 질색이라고.”
테리언이 꺼려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로턴이 품에서 한 장을 꺼내 들며 테리언에게 보여 주었다.
시큰둥한 표정을 지고 있던 테리언은 로턴이 건넨 사진을 바라보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