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프리크1권(25화)
Chapter.10 달갑지 않은 재회(3)
클레첼은 아직 로리에가 쓴 가면에 대해 알지 못했다.
또한 로리에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불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첼이 테리언의 호위학생이라는 말과 자신의 아버지인 로턴에게 부탁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의 가면에 대해서 리엘로트와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없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고통과 힘겨움을 알고 위로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관심.
‘아냐, 아직은 아니야.’
그러나 로리에는 곧 고개를 저었다.
리엘로트와도 이 가면에 대한 사실을 알려 주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물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클레첼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기엔 아직 위험수위가 높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위기일발의 상황이었지. 그런데 그 상황에서 구세주 같이 딱 하고 등장하신 거야.”
“어쩜, 역시 로리아나 님은 우리의 우상이시라니까!”
그때 클레첼의 등 뒤로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호호. 과찬이세요.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랍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한때 자신을 흑마법으로 폭주시켜 이성을 잃게 만든 장본인.
그로 인해 무고한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수많은 죄를 일삼게 만들었다.
만약 테리언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흑마법에 완전히 먹혀 들어 자멸할 때까지 그런 짓을 반복했으리라.
게다가 비밀리에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위험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까지 했다.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리라 마음먹었던 존재.
“클레첼 양?”
클레첼의 눈빛이 돌연 날카로워지자 리엘로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클레첼은 곧장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도 많이 지켜봐 주세요. 결코 여러분들에게 실망을 끼쳐 드리지…….”
“…….”
주변에 몰려든 여학생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로리아나와 클레첼의 눈이 마주쳤다. 주변에 몰려든 학생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로리아나는 클레첼과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 안색이 변했다.
“로리아나 델만…….”
테리언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나 항상 존칭을 붙이던 클레첼이 반말을 했다. 클레첼의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상당히 무례한 말.
하지만 리엘로트는 함부로 나서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첼은 아카데미를 처음 접한 것일 텐데 로리아나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로리아나 역시 처음엔 누군가 하는 표정으로 클레첼을 바라보더니 이내 누구인지 깨닫고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는 주변에 몰려 있던 여학생을 물리며 클레첼을 향해 다가갔다.
로리아나가 상당히 실력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클레첼은 곧바로 신체강화술을 시전 했다. 저번에도 방심했다가 당했으니 이번에야 말로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혹시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뭐?”
처음에는 엄청나게 까칠한 말을 내뱉던 로리아나가 저런 태도를 보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클레첼이 대답하지 않자 로리아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뭔가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신가 본데 하실 말씀이 있다면 따로 둘이서 이야기하도록 할까요?”
로리아나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클레첼 역시 이런 시선이 많은 곳에서 신경전을 벌일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죠.”
클레첼은 리엘로트와 로리에에게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식사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로리아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테리언은 이번엔 먼저 급식소에서 후딱 밥을 먹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저번에 보니 제네시드는 따로 도시락을 챙겨 왔었으니까 말이다. 괜히 밥도 안 먹었는데 제네시드 옆에서 그가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면 배만 고플 것 같았다.
그러나 옥상에 도착한 테리언은 제네시드가 보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항상 이곳에 있는다고 했었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옥상을 둘러보던 테리언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옥상을 내려왔다. 그러나 막상 제네시드와의 만남이 없어지자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민에 빠졌다.
평소 점심시간에는 옥상에 올라와 제네시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라던가 그의 망원경을 통해 다양한 것을 보기도 했다. 그는 여자를 관찰하는 것이 주 대상이긴 했지만 그것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가 전망이 좋고 아카데미 이곳저곳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친절하게 망원경을 통해 보여 주었다. 리엘로트에게 약도를 받긴 했지만 사실상 쓸모없다고 판단한 것도 제네시드를 통해 전반적으로 지리는 다 알았기 때문이었다.
매 점심시간은 그렇게 시간을 때웠는데 그런 제네시드가 사라지니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흠. 그럼 뭐하면서 놀지?’
옥상 계단을 느긋하게 내려오던 테리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느 방을 발견했다.
저번에 제네시드가 한 말에 의하면 저쪽은 분명 이 아카데미를 관리하는 이사장이 머무는 곳이라고 들었다. 특별한 용무가 아니면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기에 평소엔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지금은 워낙 무료했던 테리언이었기에 돌연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프로티나 아카데미에는 학생은 절대 들어가서 안 되는 금지 구역이 세 군데 존재했다.
한 곳은 교직원 교사로서 학생들이 알아선 안 되는 극비 정보들이 많았기에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학생 교사 4층의 이사장이 머무는 방이었다. 마지막은 학생 교사 3층에 있는 학생회가 쓰는 교실로서 오로지 학생회 소속 학생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세 군데는 금지 구역답게 출입이 허용된 자가 들어가려 한다면 특수한 보안 마법이 발동된다. 그것도 두 번 다시는 출입할 생각도 못 낼 정도로 끔찍한 마법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제네시드 역시 과거에 호기심으로 이사장실에 출입하려다가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훗.”
테리언은 이사장실 앞에 다가서고는 코웃음을 쳤다. 만약 수동적인 보안 장치가 있었다면 테리언 역시 함부로 다가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안 장치가 마법이라면 경우가 달랐다.
‘나에겐 마법이 통하지 않는단 말씀.’
게다가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이사장의 얼굴을 아는 학생은 여태까지 없다고 한다.
교직원이나 학생회 측은 알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여태까지 이사장이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심지어 목소리마자 변질된 목소리로 알려져 있었기에 학생들은 이사장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내가 그 최초가 된다는 거지!’
테리언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사장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따로 출입할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기에 정면으로 들어간다는 점이 조금 걸리긴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뭔 마법이 발동된다는 거지?’
아예 문을 벌컥 열어 버린 테리언은 연신 문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고 이사장실과 복도를 왔다갔다 해 보았다. 그러나 마법은커녕 그런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출입을 금지시킨 것 치고 특별한 건 안 보이네?’
기대하고 왔는데 별 달리 눈에 띄는 것이 없자 테리언은 실망한 기색을 내보였다. 차라리 그 보안 마법인가 뭔가 하는 것이라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때 문득 이사장이 사용하는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종이들을 보았다. 상태를 보니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던 것 같았다.
테리언은 뭔 내용인가 싶어 아무 종이나 몇 장 집어 들어 내용물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집어 든 종이의 겉표지에는 8월 25일이라는 날짜가 적힌 ‘제 92회 무도회 개최 관련 안건’이라는 제목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종이에는 9월 10일이라는 날짜가 적힌 ‘아카데미 스카우트 엘도흐 제국 설립 기념 축제 호위 의뢰 안건’이라는 제목이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종이들도 집어서 살펴보았지만 처음 집어든 두 개의 종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리타분한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8월 25일 날 개최라면 앞으로 보름 남았잖아?’
무도회라면 로턴을 통해 예전에 딱 한 번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귀족들이 춤을 추면서 사교를 위한 장이라고 들었다.
그 외에 아카데미 스카우트가 하는 일인 건지 엘도흐 제국 설립 기념 축제 호위 의뢰도 상당히 눈길이 갔다.
하르카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엘도흐 제국.
그 땅덩어리만 해도 어마어마하기에 그만큼 엘도흐 제국에 가면 볼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들었다.
‘이거 더더욱 아카데미 스카우트에 가입해야겠군.’
테리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 느꼈을 땐 완전 지루한 아카데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축제 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니 역시 아카데미에 입학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도회라면 갑갑한 교복 같은 건 입지 않겠네.’
그와 동시에 테리언의 사고 회로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레이시라 공주의 가슴을 만지기로 결심했던 날 이후로 상당히 오랜만이 아닐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이 터질 듯한 기대감!
* * *
테리언이 이사장실을 떠나고 나서 몇 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소녀.
150cm 도 되지 않는 작은 키에 은발의 트윈테일 머리가 전체적으로 상당히 귀여워 보였다.
그녀는 잠시 어질러졌던 책상을 힐끗 바라보더니 테리언이 나간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사장실 내 설치해 둔 보안 마법진이 발동하지 않은 거지?’
혹시나 효력이 다한 건가 싶어 그녀는 이사장실 입구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
‘마법의 구성이 전부 파괴되었어?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사실 그녀는 테리언이 이사장실 내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단지 일부러 그녀가 몸을 숨겼던 것은 그가 이사장실의 문을 열 때까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숙달된 암살자라든가 은감 능력을 가진 고위의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닌 이상, 아카데미 내에서 그녀가 감지하지 못할 대상 따위는 없었다.
하물며 아카데미 내 대부분의 일을 총괄하는 이사장인 그녀였기에 더더욱.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아무래도 재미있는 녀석이 편입한 것 같군.”
소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테리언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프리크』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