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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



작가서문


탈각(脫殼).
껍질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이 작품 팬저드래곤은 주인공 카라스에게도, 그리고 글쓴이인 저에게도 탈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작품 내의 카라스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각종 금제와 억압을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정면으로 부수어 내어 자유를 쟁취하게 되었고, 현실에서의 일개 글쟁이인 저는 온라인의 껍질을 벗고 더 넓은 시장으로 나와 여러분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사실 이 탈각이라는 주제는 오래전부터 저를 사로잡고 있던 일종의 화두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답답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어 보는 환상, 즉 판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회사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또한 그 밖의 수많은 일상의 공간에서 2010년의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제도가 덧씌워 준 각종 금제와 그것에 세뇌된 스스로의 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작은 몇 권의 책 안에서만큼은 그런 일상의 억압을 벗어나 시원하게 즐겨 보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이 책을 대하시는 분들 또한 즐기게 만들어 드리고픈 염원이 있습니다.
바쁜 일상은 잠시 내려 두고 즐기는, 한두 시간의 휴식에 적합한 시원하고 편안한 매개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저는 카라스를 통해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신 같은 완벽한 인물을 그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불완전하지만 완벽에 가까워지려 뼈를 깎도록 노력하는 인간을 그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는 크나큰 격차가 있습니다.
그는 결국 인간입니다. 보다 나은 재능과 능력을 지녔지만 결국 인간이기에 지니는 한계를 고스란히 내재하고 있습니다.
상고 이래로 수많은 영웅과 호걸들이 그러하였듯, 카라스 또한 성공을 앞에 두고서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로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완벽에 가까워지려 애쓰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최악의 시련이 닥친다 하여도 그것을 극복해 내고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것이 바로 카라스라는 캐릭터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그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위기를 맞이하지만 굴하지 않고 극복해 내는 것.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완벽에 가까워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카라스의 본질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응원을 아끼지 않는 가족들과 제 곁을 지켜 주는 연인, 친구들, 연무지회의 금강 선생님과 수많은 선배님 및 동도님들, 출간에 많은 심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출판사 관계자 분들, 멋진 표지를 위해 밤을 불사르신 디자이너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고마움의 말씀 전합니다.
이 책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며…….

2010년 4월 27일 글쓴이 배상




팬저 드래곤 1권(1화)
Prologue(1)


이곳은 크로이츠 협곡.
천년거암 무채색 결을 타고 황야의 바람이 불어온다.
“…….”
카라스의 매서운 눈이 정면을 주시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 갈가리 찢겨진 시야로 보이는 것은 정면을 막아선 수천 기의 메탈슈트 군단이었다.
피식.
하지만 카라스는 웃었다.
한쪽 입술만으로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많이도 모였군.”
그의 등을 뒤덮은 문신이 광채를 발한다 싶은 순간.
키이이이잉……!
카라스의 뒤에서 전장 3.6 미터의 흑색 메탈슈트가 아공간을 뚫고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거친 금속성 울림.
메탈슈트 카밀카사가 갑옷처럼 카라스의 몸을 감싸며 여섯 장의 날개를 펼쳤다. 극성에 이른 천마신공(天魔神功)이 용오름 치듯 그의 몸에서 피어났다.
“그래 봐야 결국 사냥감일 뿐이지.”
낮은 중얼거림.
메탈슈트 착용을 끝낸 카라스가 걸음을 옮겼다.
쿠우우우……!
그의 보보에 지축이 몸을 떨고 하늘이 요동쳤다.
바로 천마의 독문무공인 천마제왕보(天魔帝王步)가 메탈슈트 카밀카사를 통해 수십 배 증폭되어 펼쳐진 것이었다.

훗날 전신(戰神) 카라스로 추앙받게 되는 전설 중의 전설, 그가 비로소 제국군 앞에 진면목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장 카라스(1)


그는 이미 두 번의 전생을 겪었다.

첫 번째 삶은 무척 역동적이었다. 또한 지금껏 이어진 삼생의 깨달음[三生之覺]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 시절 그의 이름은 천마대제(天魔大帝) 파군성(破軍星)이었다.
어려서부터 무공의 천재였던 그는 불과 서른의 나이에 마중지존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중원 천하 무림을 양분하고 있는 천마신교, 그 강자만이 살아남는 강자존의 세계에서 그는 지배자였으며 율법 그 자체였다.
또한 그는 만족을 모르는 사내이기도 하였다.
결국 정파 무림과의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 전쟁의 말엽, 칼바람에 눈발이 휘날리던 어느 날.
높디높은 태산의 봉우리에서 그는 무림맹주 북천검제(北天劒帝) 무곡성(武曲星)과 정면으로 겨루었다.
대결은 삼 일 밤낮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둘 사이에 만여 가지의 초식과 변초가 교차했다. 진기가 마르면 외공으로 힘을 대신했고, 근육의 힘이 다하면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럼에도 승부는 어느 한쪽으로 갈리지 않고 팽팽하기만 하였다.
다시 열흘이 흘렀다.
어느새 정신력마저 고갈되어 이제는 질긴 고집만이 남았다. 둘은 떨리는 손으로 서로를 향해 일장을 뻗었다.
그 순간, 파군성의 뇌리에 벼락이 쳤다.
“……!”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앎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바, 첫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닌 지혜[生而之知]이고, 두 번째가 배워서 아는 것[學而之知]이요, 마지막이 고생고생해서 깨닫게 되는 것[困而之知]이라 하였다.
이때 그에게 다가온 앎이 바로 마지막의 것이었다. 강적과의 대결이 그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끝에 오히려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아하하하……!”
그는 깨달음의 기쁨에 겨워 크게 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그와 동시에 무곡성이 출수한 일장도 그의 가슴에 미쳤다.
그렇게 파군성은 무림맹주와 함께 양패구상(兩敗俱傷), 서로가 그 자리에서 나란히 목숨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파군성은 죽음의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순간이 자신에게 있어 최후의 순간이 결코 아님을.

그에 비해 두 번째 삶은 비교적 고요했다.
그는 20세기 말엽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생인 파군성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생과 같은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현대 사회의 정보적 감시망과 체제 네트워크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견고하고 촘촘하다. 아무리 큰 힘을 지닌다 한들 일개 개인이 함부로 흔들 수 있는 사회가 아닌 것이다.
그는 그런 사회에서 무공을 드러내는 것이 백해무익하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회 속에 녹아들기 위해 여타의 또래들처럼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다.
결국 그는 험난한 입시전쟁을 헤치고 미국 MIT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무공의 고수치고 영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을 몸소 입증한 셈이었다.
어쨌건 그는 MIT를 수료한 이후 미 국방성 펜타곤에서 무기 기계공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낮에는 과묵한 독신 공학도로 지내며 정체를 위장했다. 그리고 밤에는 남몰래 참선과 수련으로 매일을 보냈다. 번잡한 외부의 간섭이 없으니 시간만 주어진다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그는 자신하였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예상과 달리 깨달음을 얻는 것에 보기 좋게 실패했다. 너무나 자극이 부족한, 안온하고 평온한 삶이 오히려 깨달음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죽음이 목전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알게 된 그는 탄식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인 세 번째 삶을 기약하며 눈을 감았다.

* * *

크로이츠력 351년.
파티엔 공국 북부, 공국 메탈슈트 제4생산기지 외곽.
낡은 헛간에 여자 노예 로제트의 고통에 찬 신음이 흘렀다. 그녀는 크게 부풀은 배를 쥐고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출산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노예 신분인 산파가 로제트를 달래며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 산파의 이마에도 땀이 흥건하였다.
헛간 반대편 구석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다른 여자 노예 두엇이 숙덕거렸다.
“아이가 거꾸로 섰대.”
“거꾸로?”
“그래. 원래 태아는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잖아?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라. 머리를 위로 두고 있대.”
“그럼 어떻게 해?”
“아마 낳지 못할 거야. 저 로제트 년도 죽을지 모르고. 저 여우 같은 년, 팔자 고쳐 보려고 귀족에게 궁둥짝이나 흔들다가 천벌 받은 거지 뭐.”
“쉿, 들릴라.”
“알았어.”
곧 헛간 안에 다시금 비명이 메아리쳤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로제트의 절규였다. 헐떡이는 그녀의 손이 산파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배, 배를 갈라 줘. 아, 아기, 아기만이라도……!”
“…….”
처음에 산파는 그녀의 부탁을 외면하였다. 하지만 끝내 강한 모정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산파가 물었다.
“그러면 너…… 죽을 텐데?”
로제트가 쓰게 웃었다.
“나, 나도 알아.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 있어도 아기와 함께 둘 다 죽는 건 매한가지잖아? 그렇다고 아기를 포기할 수는 없어. 끄…… 흑……. 이 아기는 그이와 나 사이에 남은 마지막 결실이자 증거야.”
“그이라니…….”
산파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금 로제트가 말한 그이란 바로 여기 있는 모든 노예들의 주인이자 메탈슈트 공장의 책임자인 트리스탄 자작이었다. 애초에 자작이 한때의 욕망으로 얼굴이 반반한 로제트를 건드렸고, 그 결과로 생긴 것이 지금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기인 것이었다.
산파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로제트의 굳은 표정이 산파의 결심을 도왔다.
“좋아. 그러지. 유언은?”
“……아들이면 카라스, 딸이면 칼리아.”
“알았어.”
곧 서슬 퍼런 나이프가 로제트의 아랫배를 갈랐다. 마취조차 하지 않아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 로제트의 온몸을 경련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입에 물려 있던 나뭇조각이 빠각,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곧 아기가 산파의 손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아이였다. 하지만 그때 이미 산모인 로제트의 숨은 끊어진 뒤였다.
그런데 산파가 당황했다.
“숨을…….”
기껏 산모를 희생시키며 살린 아기가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산파는 서둘러 탯줄을 끊고 마른 헝겊으로 아기의 몸을 닦았다.
“제발, 제발…….”
하지만 산파는 아기의 몸에 어떤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방금 갓 태어난 아기가 실눈을 뜨고서 주변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도.

갓난아기 상태인 ‘그’는 스스로 숨을 참고 있었다. 태어난 직후, 첫 호흡을 들이마시고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은 무척 중요하다. 일생에 있어 처음으로 외기(外氣)와 접촉하는 그 순간 들어오는 기운에 의해 평생 몸에 지닐 선천지기의 성질이 대부분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그는 두 번의 전생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요동치는 선천지기를 다스려 나갔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나마 산파가 헝겊으로 온몸을 문질러 주고 있어서 발생하는 온기가 약간의 도움이 되고 있기는 했다.
곧 그의 통제하에 심장에 모인 선천지기가 기맥을 타고 위로 이동했다. 그리고 머리 꼭대기의 정수리, 즉 백회혈(百會穴)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직 두개골의 연결이 굳지 않아 백회혈이 열려 있을 때 미리 혈맥을 뚫어 놓으려는 시도였다.
백회혈은 별 저항 없이 가볍게 열렸고, 그곳을 통해 청량한 기운이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첫 호흡을 폐부가 아닌 백회혈로 이루어 낸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내기를 조절하며 스스로 임독양맥과 팔대경락을 두루두루 주물렀다. 갓 태어나 탁기 한 줌 없이 깨끗한 경락들이 전신세맥과 함께 무공에 대해 최적의 구조로 재배열되었다.
바로 그만이 시행할 수 있는, 최고의 효율을 지닌 벌모세수였다.
이윽고 모든 처치가 끝났다.
그 후에야 그는 첫 울음을 터뜨렸다. 반쯤 체념하고 있던 산파가 감격하여 아기를 감싸 안았다.
그 사이 그는 남몰래 실눈을 뜨고 주변을 관찰했다.
‘헛간……인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허름한 헛간에서 태어난 아기. 지난 두 번의 전생을 통틀어 가장 열악한 환경이다. 지금 상황으로만 보아서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낮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반대편을 살피니 상황은 더 좋지 못했다. 산모, 그러니까 자신에게 어머니가 될 사람이 아랫배가 갈라진 채 죽어 있는 것이다.
무력한 갓난아기에게 어미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 한 발짝 더 근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번 생, 조금은 험난할지도.’
그는 자신의 앞날을 걱정했다.
이미 두 번의 전생을 겪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에게 있어 생면부지의 여인이 죽었다는 사실은 별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어미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런 기분과는 무관하게, 그는 죽은 자신의 어미가 남긴 유언에 따라 카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