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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2화)
1장 카라스(2)


카라스가 태어난 곳은 파티엔 공국 공영 메탈슈트 공장의 외곽 지대였다.
그곳은 다른 이름으로는 트리스탄 자작령으로 불렸다. 영주인 트리스탄 자작이 이 지역 메탈슈트 생산 공장의 총책임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젖동냥을 받던 갓난아기 카라스는 금세 자라나 옹알이를 하고, 걸음마를 떼게 되었다.
사실 카라스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익힌 것이나 남몰래 두 발로 일어선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노예였다. 힘을 키우기 전에는 능력을 감출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비교적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다른 동갑내기 노예 아기를 기준점으로 삼았다. 그 아기가 기어 다니고, 걸음마를 떼고 하는 시기에 자신 또한 같은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 덕에 주변 사람들은 카라스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이미 하단전을 확장시키고 천마신공 1성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을.

다시금 시간은 흘러갔다.
그 세월에 비례하여 카라스의 몸도 자라났다.
그는 천마신공의 입문단계인 1성 마경개안(魔境開眼)의 경지를 이룬 뒤로는 더 이상 축기, 즉 단전에 내공 쌓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축기 대신 전신 혈맥을 다스리는 일에 더욱 주력했다. 덕분에 열 살이 되기까지 천마신공의 성취는 그대로 1성에 머물러 있었지만 팔대경락과 전신세맥이 극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훗날의 기초공사를 미리 다져 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라스의 일상은 고단했다.
그는 노예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미를 죽인 아이. 저주받은 아이. 그것이 다른 노예들 모두가 카라스를 두고 숙덕거리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카라스의 부친은 이곳 영지의 주인인 트리스탄 자작이었다. 자작은 카라스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지만 어쨌건 그는 귀족의 사생아인 것이다. 카라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사실이 오히려 노예들의 질시와 따돌림을 부추겼다.
하지만 카라스는 어떤 불만도 겉으로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낮에는 남들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을 했고, 밤이 오면 잠을 자는 척하며 천마신공을 운행하여 훗날의 기초를 다져 갔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 신체의 성장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시작될 축기의 단계를 기다렸다. 그날이 오면 강대한 힘으로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손수 끝장내겠다고 다짐하면서.

그의 생각대로 세월은 흘렀다.
어느덧 카라스는 열여섯 살이 되었고, 그동안 열심히 혈맥을 정비한 덕에 어떤 인간의 것보다도 무공에 적합하도록 신체가 탈바꿈되어 있었다.
이제 곧 축기를 시작하면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천마신공을 대성하게 되리라.
그렇게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카라스. 영주님께서 부르신다.”
“예?”
작업 중에 들려온 노예장의 예상치 못한 말에 카라스가 반문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호된 채찍질이었다.
짜아악!
“이 새끼가 어디서 반문질이야? 엉? 귓구멍에 양물을 처박았나? 앙?”
“…….”
“어쭈, 이게 어디서 노려봐? 눈깔을 파 내기 전에 눈 깔지 못해!”
평소부터 노예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한 거구의 노예장이었다.
그런 노예장이 성질을 내며 다시 채찍을 와락 들어 올렸다. 다른 노예들은 곧 벌어질 참상에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휘리릭.
채찍이 사나운 기세로 날아왔다. 그때까지 카라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상체를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 채찍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피해 낸 채찍은 뒤편의 갱도 기둥에 감겨 버렸다.
그 틈을 타고 카라스가 노예장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천마신공 1성의 무공 중 하나인 마룡신형보(魔龍神形步)의 보법이었다.
전광석화.
노예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라스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노예장의 관자놀이를 향해. 불과 1센티 정도의 거리가 남은 순간, 주먹이 멈추었다.
카라스가 말했다.
“여기, 모자가 비뚤어지셨습니다.”
“……어?”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 그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서는 카라스.
노예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채찍을 회수했다. 짧은 사이에 뒷덜미와 등이 축축해졌다. 식은땀이었다. 카라스의 주먹이 날아오는 순간 오줌을 지릴 정도의 살기가 그를 압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짧았고, 노예장의 뇌리에는 미지의 공포만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다음부터는 카라스를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노예장의 다짐은 실현되지 못했다. 트리스탄 자작에게 호출된 카라스가 그 길로 짐을 싸고 영지를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카라스는 영지 내에 있는 메탈슈트 공장으로 차출되었다.
‘빌어먹을…….’
카라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방금 잠깐 가졌던 자작과의 만남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자작은 카라스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자신을 아비로 보고 있느냐고. 카라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자작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집관 하렌을 불렀다.
카라스는 하렌을 따라 메탈슈트 공장으로 들어갔다. 이 영지에서 16년을 살아온 카라스로서도 처음 들어오는 곳이었다.
애초부터 메탈슈트 공장은 그 자체로 국가적인 기밀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아무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곧 카라스는 왜 이곳이 기밀을 요하는 곳인지 깨닫게 되었다.
키이잉……!
철커덩! 철컥!
콰아아아앙―! 철컥!
“……!”
카라스가 지켜본 곳에는 기사 서넛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등에서 환한 빛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이었다. 공간을 꿰뚫고 4미터 가량의 강철의 기계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곧 강철의 기계 덩어리, 메탈슈트가 기사의 몸을 갑옷처럼 감쌌다.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메탈슈트가 탑승자의 의지에 따라 뛰고 달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예전의 전생에서 본 SF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신기하나? 그러고 보니 완성된 메탈슈트는 처음 보는 것이겠군.”
하렌이 비웃듯 말했다. 카라스는 별 대답 없이 그의 뒤를 계속 따라갔다. 두 사람은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와 금속을 제련하는 곳, 메탈슈트의 각 파츠를 제작하는 생산라인을 지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삼면이 돌벽과 천장으로 막힌, 으슥하면서도 막다른 길이었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카라스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대응은 이미 한발 늦은 것이었다.
콰아아앙―!
“……컥!”
어디선가 날아온 강철의 주먹이 카라스의 몸통을 깊숙이 두들겼다.
카라스는 그대로 날아가 돌벽에 부딪혔다. 갈빗대에 금이 갔는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왔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거대한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메탈슈트였다. 그런데 메탈슈트를 입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사집관 하렌이었다.
카라스가 이를 꽉 깨물었다. 허리를 튕기듯 하여 몸을 세웠다. 곧바로 공력을 일으켰다. 천마신공 1성의 무공, 수라혈수인(修羅血手印)이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메탈슈트의 주먹이 날아왔다.
카라스가 일장을 내뻗었다.
다음 순간.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니, 혹은 시커멓게.

* * *

“크…… 쿨룩! 큭!”
심한 기침. 온몸이 쑤시듯 아팠다.
실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이곳은 어딜까.
“…….”
비로소 정신을 잃기 직전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을 습격한 사집관 하렌. 그 전에 만났던 트리스탄 자작, 그와 나누었던 짧은 문답.
피식.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진즉 눈치를 채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다.
그가 트리스탄 자작의 사생아인 것은 노예들 사이에서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아마 그것이 드디어 자작의 귀에까지 흘러갔을 터.
자작의 입장에서는 카라스의 존재 자체가 명예에 흠집이 나는 일이다. 서둘러 제거하려는 것은 당연지사.
‘빌어먹을…….’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전신의 근육과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죽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카라스는 그동안 단련한 자신의 육체를 새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때였다.
“정신이 들었나?”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장년의 사내 하나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내 뒤편에도 비슷한 행색의 사내들이 초라한 몰골로 앉아 있었다.
카라스는 퉁명스레 반문했다.
“댁은 누구요?”
그러자 사내가 헤벌쭉 웃었다.
“나 말인가? 젊은 친구의 미래상이 될 몸이지.”
“미래상?”
“그래. 이곳은 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곳이니까, 아마 삼십 년쯤 지나면 젊은 친구도 나처럼 되지 않을까 싶은데. 물론 그 전에 요행히 죽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이곳이 대체 어디기에?”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터, 메탈슈트 공장.”
구석의 어두운 곳에 앉아 있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성한 백발에 주름진 얼굴이 고집스러워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 노인이 씨익 웃으며 한쪽 팔뚝을 들어 올렸다. 힘줄과 근육으로 똘똘 뭉친 노인의 팔뚝에는 기하학적인 모양을 지닌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자네도 노예 주제에 마나 움직이는 법을 깨쳤나 보구먼. 게다가 누군가에게 눈엣가시가 되었을 터이고. 그러니까 이곳으로 끌려왔겠지? 하지만 포기하게나. 이 금제의 낙인이 찍힌 이상 평생 마나를 사용할 수가 없어. 마찬가지로 한 번 들어온 이상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곳이 바로 여기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자네도 이곳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갈까를 걱정하게.”
“그게 무슨…….”
카라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오른 팔뚝을 살폈다. 그리고 경악했다. 자신의 팔뚝에도 노인의 것과 같은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었다.
섬뜩한 느낌.
카라스는 서둘러 천마신공을 운기하였다.
하지만 요지부동.
단전에 뭉친 내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열어 놓고 길을 닦아 둔 혈맥들도 소용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천마신공 수련도…….
“비, 빌어먹을!”
사태를 깨달은 카라스가 자신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낙인이 새겨진 부위의 가죽을 통째로 뜯어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곳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노인이 애석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마법적인 처리를 거친 낙인이라 벗겨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네. 이미 말했다시피 포기하게. 그게 신상에 이로워.”
“…….”
카라스의 이글이글 끓는 눈빛이 노인을 향했다. 노인은 담담하게 그 눈빛을 받아넘겼다.
그러기를 잠시, 카라스가 물었다.
“댁의 이름은?”
노인이 답했다.
“여기선 다들 제노 영감이라 부르지.”
“알았다. 많은 걸 알려 줘서 고맙군, 영감.”
카라스는 짤막하게 답하며 그대로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