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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3화)
1장 카라스(3)


이대로 포기하기엔 이르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뛰는 것보다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일 터.
“호오…….”
노인, 제노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그는 이곳 메탈슈트 공장 수용소에 있는 노예 중의 최고 연장자였다. 수십 년을 있으면서 별별 노예들을 다 겪어 본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수용소에 끌려오면 처음엔 격렬한 분노와 함께 발광을 하거나 극도의 침울함에 빠지곤 했다. 그게 대다수의 반응이었고, 수십 년 전의 제노 또한 그랬었다.
그러나 카라스처럼 차분한 대응을 하는 노예는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제노 영감이 보기에 카라스는 그냥 자포자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글거리던 반응을, 하지만 방법이 없음을 깨닫자 이내 극도의 평정심과 냉정함을 보인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상황을 분석하려 시도하는 눈빛이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애송이 같은데…….’
제노 영감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는 알지 못했다.
겉으로는 어리게만 보이는 카라스에게 이미 두 번에 걸친 전생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카라스에게 있어 어쩌면 무공을 능가하는 최고의 무기일 터였다.

다음 날이었다.
카라스는 부상도 아랑곳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항상 운기하던 천마신공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허전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노역의 첫날, 카라스를 반긴 것은 제노 영감이었다.
“몸은 다 나았나, 애송이?”
“…….”
“원, 그놈의 성깔머리 하고는. 오늘부터 같은 조가 되었으니 그리 알게. 서너 달은 날 따라다니며 이것저것을 배울 터이니.”
“알았다.”
“……어린놈이 말이 짧군?”
“불만인가?”
카라스는 귀찮다는 눈빛으로 제노 영감을 노려봤다. 예상치 못한 그 기세에 제노 영감이 움찔했다.
“허허, 참. 마음대로 하게. 그럼 이쪽으로 따라오게나. 거기 조심하고. 잘못하면 쇳물이 튀니까. 그렇지. 옳지, 이리로.”
“…….”
충돌을 예상하고 세게 나갔던 것이건만, 제노 영감이라는 자는 너무도 부드럽게 애 취급으로 대응하여 되레 카라스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카라스는 그런 그에게서 장인, 혹은 한 분야의 대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연륜을 감지했다.
‘저게 짬밥이라는 거군.’
카라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흘렀다.

그날부터 카라스는 제노 영감을 따라다니며 공장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장은 크게 세 가지 작업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구역은 메탈슈트의 심장인 코어(Core)를 마법적인 처리로 제조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모든 공정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공국에서 파견된 코어 제작의 전문 마법사들이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두 번째 구역은 메탈슈트의 관절 구동부와 마나 전달 장치, 착용 변환 장치 등의 내장 부품을 제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각 분야의 야장들이나 기술자, 장인들이 배치되었다.
마지막 3구역은 메탈슈트의 외부 강철 장갑판과 몸체 및 사지의 주물을 제조하는 대규모의 대장간이었다.
이곳은 다루는 물건 자체가 규모가 큰 데다 일의 특성상 작업 중의 사고가 잦아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일터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이곳의 일꾼들은 모두가 강제 수용소에 갇힌 노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카라스가 배치된 곳도 바로 이 세 번째 구역이었다.
그런데 카라스는 사람들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공장 일에 적응을 해 갔다. 그 배움의 경악스러운 속도에 가르치는 제노 영감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보게, 자네. 혹시 예전에 대장간에서 일했었나?”
제노 영감의 물음에 카라스는 태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전혀. 왜지?”
“이거 보게나. 자네의 그런 망치질은 그냥 어깨너머 눈대중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날 속일 셈인가?”
“헛소리.”
땅땅. 땅땅. 땅땅.
제노 영감을 보느라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스의 망치질은 일정한 속도와 간격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쇠에 가해지는 힘도 매번 일정하였다. 제노 영감의 말처럼 일급의 숙련된 대장장이나 보여 줄 수 있는 두들김인 것이다.
물론 카라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장장이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구어진 쇠의 결을 볼 수가 있었다. 게다가 내공을 잃었다고는 하나, 이미 무예의 극에 이르렀던 경험자다. 망치 하나쯤 일정한 힘으로 컨트롤하는 것은 그에게 손쉬운 일인 것이다.
제노 영감은 믿을 수 없다는 둥, 젊은 놈이 사기를 친다는 둥, 계속 곁에 붙어서 잔소리를 해 댔다. 하지만 그 입가가 슬쩍 말려 올라가 있는 것이, 일을 빨리 배우는 카라스가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그런 제노 영감을 보며 카라스가 한마디 했다.
“미친 영감쟁이.”

카라스는 비록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지만 제노 영감의 실제 별명은 그 욕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친 대장장이.
그것이 젊은 시절 제노 영감의 별칭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별칭이 붙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이제 이 공장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죽었으니까.
“후우, 그러니까 말이네.”
제노 영감이 싸구려 연초를 태워 물며 카라스를 돌아봤다. 카라스가 이곳에 끌려온 지 벌써 보름째.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단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때는 이 몸도 고향에선 끗발 꽤나 날렸었지, 크흣. 대장장이 제노가 떴다 하면 온 고을 처녀들이 치맛자락을 뒤집지 못해 환장을 했었다, 이 말이야.”
“그런데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된 거지?”
카라스의 반문에 제노 영감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사실 난 서부국가연합 출신이라네. 그곳 대장간에서 일하다가 재수 없게 끌려온 게지, 뭐.”
“그렇군.”
카라스는 거기서 대화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옛이야기를 물어봤던 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 시절엔 말이야…….” 로 시작한 제노 영감의 수다는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내 영감은 자신이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았다. 가족의 이름, 외모, 성격, 특기사항 등등등.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영감은 자신의 나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내 살아생전에 마누라와 자식들을 다시 한 번만 만나 봤으면 좋으련만. 아니, 누가 이곳을 나가서 내 소식이라도 전해 주면 얼마나 좋을꼬.”
그렇게 똑같은 이야기가 매일 이어지자 신경이 무딘 카라스도 넌더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가 쏘아붙이듯 영감에게 말했다.
“영감, 착각하지 마. 난 댁한테 별로 관심도 없어. 친해지고픈 마음도 없고. 그러니 그따위 하소연은 다른 곳에나 가서 해.”
“재미없는 놈.”
“영감이야말로.”
“싸가지 하고는.”
“하.”
말은 거칠게 나누고 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평온했다.
사실 카라스의 입장에서 제노 영감은 여러 모로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그는 이곳으로 끌려온 첫날밤에 이미 탈출을 결심하였다.
무조건, 반드시 여길 나가야 했다. 그래야 팔뚝의 빌어먹을 낙인을 지울 방법을 찾을 수 있고, 다시 천마신공을 수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의 정보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는 데에는 이 경험 많은 노인만큼 제격인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지.”
문득 제노 영감이 일손을 멈추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카라스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제노 영감이 재차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퍼 패거리를 조심하게.”
“……?”
“그치들이 요즘 자네를 주시하고 있어.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야. 게다가 그중의 리더인 리퍼 놈에 대해선 다른 이들에게서도 들어 봤겠지? 그놈은 같은 노예인 주제에 이곳의 경비대와도 연줄이 있는데다가 노예 작업조장 자리까지도 꿰어 차고 있어. 게다가 성정도 아주 흉악하지. 원하는 것은 무조건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놈이라고.”
“그래서?”
“놈들이 자네를 노리고 있어. 조심하란 말일세.”
“영감, 노망들었나? 원 걱정도…….”
“농담이 아니야.”
“알았다.”
“쯧!”
“…….”
사실은 카라스도 요즘 자신에게 날아오는 불쾌한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안중에는 두지 않았다. 그래 봤자 노예 집단 속에서 우쭐거리는 껄렁패 정도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일어나라.”
누군가가 잠든 카라스에게 다가와 어깨를 흔들었다. 미리 깨어 있었던 그는 태연히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상대에게 물었다.
“네놈은?”
“리퍼 님의 심부름을 왔다. 잠자코 따라와.”
“뭐? 요즘은 노예도 심부름을 위해 개를 보내나?”
“뭐라고?”
빠각!
반문하던 노예의 안면에 카라스의 발차기가 작렬했다. 기묘한 뼈 소리와 함께 코가 단숨에 내려앉았다. 카라스는 쓰러지려는 그의 복부를 서너 차례 더 가격한 뒤 멱살을 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카라스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따라와? 웃기고 있네. 이 몸의 얼굴을 뵙고 싶으면 직접 찾아와서 발 앞에서 기라고 전해. 알았나?”
“끄윽…….”
뻐억!
카라스의 발차기가 그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그 노예는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쓰러져 한참 신음하더니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절로 욕설이 나왔다.
“제기랄.”
어서 탈출할 길을 모색하기에도 바쁜 판국인데 웬 시답잖은 놈들의 무리까지 귀찮게 군다. 신경이 곤두선 그는 그날 밤을 꼬박 지새우고 말았다.

다음 날, 여느 때와 같이 고된 작업을 하던 도중이었다.
“크으, 덥구만. 난 물 좀 마시고 소피 좀 보고 오겠네.”
그 말과 함께 제노 영감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카라스는 여전히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카라스는 뒤를 돌아보며 불평을 했다.
“영감, 뒷간에 다녀온다더니 무슨 시간을 이렇게…….”
그가 뒤를 돌아보기가 무섭게 쇠파이프가 머리를 후려쳤다.
콰직!
세상이 온통 흔들렸다.
카라스는 그 충격의 와중에도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푸욱.
“크……!”
뒤쪽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나서서 작은 접칼로 카라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카라스는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휘둘렀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칼을 찌른 사내가 쓰러졌다.
“크……으……!”
찔린 옆구리에서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입고 있던 허름한 셔츠에 검붉은 얼룩이 빠르게 번져 갔다. 그는 상처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앞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