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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4화)
1장 카라스(4)
그곳에는 중년의 노예 하나가 있었다. 한쪽 눈가가 화상으로 일그러진 대머리 사내.
바로 리퍼였다.
리퍼가 웃으며 말했다.
“애송이 놈, 어젯밤엔 내 초대를 거절했더군?”
“…….”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곳곳에서 노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카라스의 주변에는 50명가량의 거한들이 둘러섰다. 모두 리퍼를 직접적으로 추종하며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라스는 자신의 기감이 무뎌졌음을 실감했다.
‘내공을 운기할 수만 있었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카라스가 말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지?”
“볼일?”
리퍼가 코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그 웃음이 비릿하게 번졌다. 그가 한쪽을 가리켰다.
“네놈, 제법 강단이 있다고 들었다. 내 아래로 들어와라. 저딴 허접한 영감 밑에 있지 말고 말이다. 어떤가? 좋은 대우를 약속하지.”
“영감…….”
카라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리퍼가 가리킨 곳, 그곳에는 만신창이가 된 제노 영감이 있었던 것이다. 제노 영감은 의식을 잃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하얀 머리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였다.
카라스가 노기 어린 눈으로 리퍼를 노려봤다.
리퍼가 벌쭉 웃었다.
“왜, 노려보면 어쩔 건데? 그 다친 몸으로? 엉?”
리퍼가 이죽거리며 한 손으로 카라스의 다친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그 순간, 카라스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꽈앙!
“크윽!”
카라스의 정권이 리퍼의 안면을 후려쳤다. 홱 돌아가는 리퍼의 얼굴에서 하얀 무언가가 튀었다. 앞니였다. 그와 동시에 주위를 둘러쌌던 50명의 사내들이 외쳤다.
“쳐!”
“조져 버려!”
“와아아아―!”
카라스가 허리를 낮추며 눈빛을 차갑게 번득였다. 비록 내공을 잃었다 해도 순순히 당해 줄 그가 아니다.
이윽고 공장 한쪽 구석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노예들을 감시하는 공장의 경계병, 가드(Guard)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미리 리퍼와 합의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곧 소란은 잦아들었다.
난장판이 된 공장 한구석.
일군의 덩치 큰 노예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그 빈자리에는 바닥에 쓰러진 젊고 늙은 노예 두 사람만이 남았다.
“크……윽.”
카라스는 입술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내공이 가로막힌 상황. 그나마 외공이 출중하다 해도 근골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카라스의 육체는 아직 성장이 미처 끝나지 않은 16세 소년의 것이다. 그런 몸으로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50명의 터프한 거구를 상대해 육박전을 벌이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
카라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흘렀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요즘 너무 자주 당한다. 마지막으로 남에게 이렇게 당하고 지낸 것이 과연 언제였을까.
그는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옆을 돌아봤다.
“영감, 정신이 드나?”
“으음…….”
제노 영감이 눈을 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모습에 카라스가 실소했다. 제노 영감은 애초부터 정신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카라스가 말했다.
“영감이 죽은 척을 한 덕분에 나만 흠씬 두들겨 맞았군?”
“그게 바로 연륜에서 오는 차이지.”
“닥쳐. 비겁한 영감쟁이 같으니라고.”
“네놈이 무식한 거다.”
“하, 그런가.”
“그럴지도.”
두 사람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한참을 낄낄거렸다. 그러나 카라스의 눈빛에는 분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다음 날.
파트너인 제노 영감은 일어설 기력이 아예 없어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다.
하지만 카라스는 젊은이였다. 또한 한 조로서 제노 영감의 몫을 책임져야 하기도 했다.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작업장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또다시 리퍼가 접근을 해 왔다. 리퍼가 앞니 빠진 입으로 이죽거리며 웃었다.
“어제는 어땠나?”
“…….”
“잘 생각해 보라고. 다음 만남은 부디 유쾌했으면 좋겠군. 그럼, 이만.”
리퍼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며 자리를 떠났다.
카라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때는 천마로 군림했던 인물이 바로 카라스다. 강자존의 원리를 당연한 법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인 것이다.
그런 카라스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상처받은 자부심에 저절로 온몸이 떨렸다.
불끈.
카라스는 옆에 놓인 커다란 망치를 쥐었다.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 않고 망치를 거세게 내리쳤다.
꽈아앙―!
전력을 다해 내리치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강렬한 반탄력이 망치 자루를 타고 카라스의 상반신을 떨리게 했다.
“커윽!”
그는 저도 모르게 망치를 놓치고 말았다. 손과 팔이 온통 저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
카라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동안 금제의 문신에 의해 단전에 갇혀 있던 내공이 미미하게 떨렸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카라스가 고민하는 사이 하단전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필사적으로 천마신공을 운기해 보았지만 평소와 같이 요지부동일 뿐이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옆을 뒹굴던 쇠망치로 돌아갔다.
‘설마……?’
망치를 집었다.
그리고 방금 그랬던 것처럼 전력을 다해 내리쳤다.
꽈아앙!
내리친 힘이 그대로 반동이 되어 카라스의 상체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망치를 놓지 않았다. 이를 꽉 깨물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그의 전신 근육에 극도의 과부하가 걸렸다.
그 순간이었다.
단전에 갇혀 있던 내공이 미미하게 떨리며 몸으로 살짝 번졌다. 막혀 있는 팔대경락을 대신해 전신세맥을 통하여 내공이 미세하게 유입된 것이었다.
그 영향이었을까.
반탄력에 의해 느껴지던 통증이 금방 씻은 듯 사라졌다. 그리고 곧 근육에 새로운 활력이 돌았다.
카라스는 속으로 희열의 외침을 질렀다.
‘바로 이거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내공을 운기할 수 없는 상황. 그 최악의 환경 속에서 드디어 한 줄기 실마리를 움켜잡은 것이다.
그날부터 카라스의 망치질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육체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2장 노예들을 장악하다(1)
예전에는 카라스도 여타의 다른 노예들처럼 힘을 배분하여 정교하게 망치질을 했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카라스는 마치 쇳덩이에 원수라도 진 듯 전력을 다해 망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곁에서 일하는 제노 영감의 걱정이 부쩍 늘어나게 되었다.
카라스의 망치질이 갑자기 엉망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맡은 부위의 제작이 종종 차질을 빚곤 했고, 곧 생산라인 전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라스는 주위의 충고를 무시했다. 말은 않고 있었지만 노동은 카라스에게 있어 유일한 수련의 방법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 달이 흘렀다.
리퍼는 그동안 열흘에 한 번씩 찾아와 카라스에게 집단 린치를 가했다. 그때마다 카라스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뭇매를 맞는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했다.
50명의 거구에 둘러싸여 악다구니 난투를 벌이면서 버티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 가고 있었다. 워낙 정신이 없는 통이라 리퍼 패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카라스 본인만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카라스의 망치질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온몸의 관절이 뒤틀리고 근육이 찢어지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내리치는 망치질이었다.
하지만 그 망치질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강철은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 제노 영감을 투덜거리게 만들었던 실패작의 비율이 점점 줄어들었다. 과격한 망치질은 여전했지만 제작의 성공률이나 정교함은 점점 개선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카라스는 겉보기보다 훨씬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 무림 천마 파군성의 삶은 그에게 거침없는 성격과 강대한 무공을 남겼다. 그리고 두 번째 기계공학도의 삶은 시류를 살피며 상황을 분석하는 냉철함을 남겼다.
그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성격이 공존하는 가운데, 노예의 생활을 겪으며 특유의 오기가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그런 오기로 망치를 내려치니 자연히 매번 혼신의 힘이 가해졌다.
그 덕에 카라스의 몸에는 극도의 과부하가 걸리게 되었고, 자연히 단전에 갇혀 있던 내력이 요동치며 반사적으로 근육에 스며 갔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신체가 금제의 틈을 비집고 스스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례하여 카라스의 몸에 뚜렷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작 ‘그나마 발달한 정도’의 16세 소년의 몸이었다. 하지만 날로 혹사당하고 전신세맥의 내공을 통해 다시 복구되는 사이에 그의 근육은 크게 부풀게 되었다.
이때 즈음부터였다.
리퍼 패거리의 린치가 뜸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끝끝내 굴복하지 않는 카라스의 고집에 질린 것이었다. 게다가 카라스의 힘도 이제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함부로 건드리기가 껄끄러워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