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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5화)
2장 노예들을 장악하다(2)


그렇게 다시 일 년이 흘렀다.
카라스는 17살이 되었다.
크게 부풀었던 근육은 어느덧 다시 부피가 줄어들어 있었다. 성장했던 근육이 파열되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서 압축된 것이다.
그것이 몇 차례나 반복되며 오히려 몸매는 날씬해졌다. 명장의 조각과도 같이 잘 짜인 몸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고도로 압축된 근육은 거의 철갑과도 같은 밀도를 지니게 되었다. 오랜 시간 거듭된 타격의 반동으로 인해 뼈의 골밀도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복합 탄소 강철봉보다도 질기고 단단한 골격이었다.
그렇게 신체의 피지컬적인 스펙이 올라가게 되자, 내공의 힘이 없이도 천마신공 1성의 무공인 마룡신형보와 음양소팔식(陰陽小八式), 수라혈수인의 세 가지 무공을 어설프게나마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외공만으로도 이 세계 중급 용병들의 전투력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카라스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어차피 외공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의 목표는 이곳 공장을 탈출하여 천마신공을 연성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쿨룩! 콜록!”
그날도 일을 하며 탈출 루트를 궁리하던 중이었다. 곁에서 작업을 하던 제노 영감이 밭은기침을 뱉어 냈다. 그 바람에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카라스는 짜증 어린 눈길로 제노 영감을 돌아봤다.
“아, 거참 시끄럽…… 어?”
카라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노 영감이 기침을 하며 피를 뱉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감? 괜찮나?”
“쿨룩! 괘, 괜찮…… 쿱!”
다시 피가 왈칵 나왔다.
선홍색 피였다.
카라스는 대번에 제노 영감의 폐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이상의 작업은 위험하다. 일단 안정을 취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카라스는 제노 영감을 들쳐 업었다.
제노 영감이 소리쳤다.
“이, 이놈아! 쿨룩! 대체 어디로 가려고……!”
“의무실.”
“뭐?”
“의무실에 간다. 왜.”
“크흡! 쿨룩! 컥! 거, 거긴 우리 노예들은 못…… 가.”
“그래도 아프니까 가야지.”
카라스는 고집을 부리며 제노 영감을 업고서 작업라인을 벗어났다. 그 덕에 그 둘이 포함되어 있던 라인의 공정 전체에 금방 차질이 생겼다.
삑! 삐익!
공장 내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카라스가 멋대로 작업라인을 벗어나는 것을 목격한 작업조장 리퍼가 호각을 분 것이었다.
리퍼가 패악스럽게 외치며 달려왔다.
“이 애송이 개새끼야! 뒈지고 싶나! 어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해! 엉!”
카라스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작업에 차질을 준 것은 미안하다. 순순히 인정한다. 하지만 여기 영감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다.”
“뭐?”
“다른 결원들로 잠시만 자리를 메워 주었으면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잖은가. 부탁이다.”
“뭐라고, 쌍놈의 새끼야? 어딜 가려고?”
“……의무실에 가야 한다.”
“의무실?”
쌍심지가 돋던 리퍼의 인상이 활짝 펴졌다. 이내 그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비웃음이었다.
“풉, 푸하하하하하! 지금 뭐라고? 의무실이라고 했나? 네깟 노예 놈이 의무실에 간다고?”
“그렇다.”
“애송이가 미쳤군. 어서 자리로 돌아가. 험한 꼴 보기 전에.”
“영감이 위험하다.”
“그럼 뒈지라지.”
“…….”
“카악, 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카라스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리퍼와 상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그대로 리퍼를 무시하고 곁을 지나쳤다.
“어, 어? 이 개종자가……! 막아!”
다급히 소리친 리퍼.
그의 명령에 20명 정도의 거구가 튀어나와 카라스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양새를 본 카라스가 말없이 망치를 집었다. 어느새 근처의 일꾼들은 모두 손을 멈추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공기가 장내를 휘감았다.
그때였다.
“뭐야! 무슨 일인가!”
난데없는 호통 소리가 노예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카라스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키이이이, 철커덕! 철컥!
거대한 메탈슈트 한 대가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가드들의 대장, 슈너드 남작의 메탈슈트였다. 그의 등장에 모두가 뒷걸음질을 쳤다. 슈너드 남작은 공장 책임자인 트리스탄 자작 다음의 서열을 지닌 실권자다. 그의 눈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이곳에선 곧 죽음을 의미했다.
공장으로 들어선 슈너드 남작이 카라스를 돌아봤다.
“네놈은 뭔가?”
카라스가 입을 열기 전에 리퍼가 재빨리 나섰다.
“직접 행차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요, 에헤헤……. 그게 실은, 저 애송이 놈이 멋대로 작업라인을 벗어나는 바람에…….”
“뭐야? 네놈은 작업조장이 아닌가? 그런데 휘하의 노예들을 통솔도 못해?”
“저도 항상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저 애송이 놈이 워낙에 난폭하여 손을 쓸 도리가 없었습니다요.”
슈너드 남작의 시선이 다시금 카라스를 향했다.
그가 말했다.
“멋대로 작업라인을 이탈하면 즉결처형이다. 몰랐나?”
카라스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의무실에 다녀왔으면 합니다.”
“뭐?”
슈너드 남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카라스를 내려 보았다.
“아프다는 자가 등에 업힌 그 노인인가?”
“예.”
“그 노인을 이 자리에서 죽여 줄까? 그러면 더 이상 아플 일도 없고 작업라인도 평화롭게 돌아갈 것 같은데 말이야.”
“…….”
으드득.
카라스가 보이지 않게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는 다 엎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슈너드 남작은 가드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다. 게다가 메탈슈트의 위력은 누구보다도 직접 당해 본 카라스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카라스는 분노를 삭이며 작업라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작업이 재개되었다.
제노 영감은 근처에 누워 반나절 동안 밭은기침과 함께 피를 뱉었다.
작업조장 리퍼가 그런 카라스와 제노 영감을 비웃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살기가 배어 있었다.
작업이 끝나고 모두 수용소로 돌아갈 무렵이었다.
제노 영감을 업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카라스에게 리퍼가 접근해 왔다.
그가 카라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애송이. 오늘 함께 달구경을 했으면 한다. 무슨 뜻인지는 잘 알고 있을 테지?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다. 내일 아침쯤에는 네놈의 시체를 폐기물 처리장에 버릴 생각이니까. 오오, 그렇다고 해서 겁을 먹고 도망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낄낄. 네놈이 도망가면 우리는 외로운 나머지 네놈 등에 업힌 영감을 가지고 놀 거야. 알아서 잘 하리라 믿겠어. 응?”
“…….”
리퍼는 휘파람을 불며 떠나갔다.
카라스는 가만히 서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날 밤 자정.
수용소를 빠져나오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리퍼 일당의 아지트인 폐기물 처리장으로 향했다. 낮 동안 갈무리해 두었던 살기가 그림자로부터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조각과도 같이 잘 짜인 근육질의 그림자는 한 손에 우악스럽고 기다란 망치를 움켜쥐고 있었다.
카라스였다.
그는 폐기물 처리장을 얼마 정도 남겨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전방을 살폈다.
처리장 앞 공터에는 80명에 가까운 노예들이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었다. 그 불빛을 보는 카라스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다르군.’
평소 카라스에게 린치를 가할 때 저들은 거의 맨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단단히 결심한 리퍼의 명령을 받은 것일까. 폐기물 처리장에 모인 80명의 거한들은 손에 각목이며 쇠파이프, 망치, 도끼 등을 꼬나 쥐고 있었다.
카라스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그래, 나도 바라는 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저벅저벅 대로를 걸어갔다. 곧 구름 뒤에 숨었던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 환한 월광 속에서 카라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를 발견한 리퍼와 그 일당들이 분분히 일어섰다.
카라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쪼잔하게 숨어들어서 급습을 할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혀 처참하게 박살 내기 위해 그동안 길러 온 힘이었다.
와지직.
카라스의 강건한 손아귀가 망치의 강철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손등에 힘줄이 맥동 치듯 솟아나 팔뚝을 가로질렀다.
“왔군.”
리퍼가 비릿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런 리퍼의 손에도 기다란 도끼가 들려 있었다. 80명의 거한들이 바삐 움직여 카라스를 둥글게 에워쌌다.
카라스가 리퍼에게 물었다.
“또 가드들과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겠지?”
“뭐?”
“소란이 일어나더라도 눈감아 달라고 말이다. 네놈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않나.”
그제야 카라스의 말을 이해한 리퍼가 이죽거렸다.
“아, 그거 말이냐. 큭큭. 당연하지. 오늘 밤엔 네놈이 아무리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러도 나와서 살펴보는 이 하나 없을 거다. 네놈의 말 그대로, 조금 시끄러워도 눈 감아 달라고 가드들과 이야기가 다 되어 있거든. 모르긴 몰라도 오늘 저녁에 점호를 담당했던 가드는 내일 아침의 점호에서 불릴 네 이름도 명단에서 미리 지워 버렸을걸?”
“…….”
침묵하는 카라스.
그 모습에 80명의 거한들이 모두 웃으며 카라스를 조롱했다.
“개새끼, 말이 없네? 쫄았냐?”
“이 애송아, 잘못했다고 어서 빌어 보려무나.”
“그 허여멀건 궁둥이를 까면 친히 용서해 주지. 낄낄.”
“시팔, 안 돼. 저 새끼 대가리를 잘라다가 공놀이를 하기로 했단 말이다.”
“마음대로 하시던가. 푸하하핫.”
거한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흉기가 불길한 빛을 반사했다.
카라스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입가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한 줄기 난폭한 미소였다.
“그거 잘됐군.”
스산하게 흘러나오는 카라스의 목소리에 짙은 살기가 서렸다. 그 알 수 없는 섬뜩함에 거한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카라스는 그들과 리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반대로, 이 자리에서 네놈들을 모조리 쳐 죽여도 나와서 도와줄 이들이 아무도 없을 거란 말이군?”
그 말이 끝난 직후, 카라스의 몸은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아니, 그렇게 화한 것처럼 보였다.
콰지직!
“……!”
가장 앞에서 다가서던 한 거한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선혈이 폭발적으로 튀어 올랐다.
위에서부터 내려친 카라스의 망치에 박살 나며 얼굴의 절반이 수직으로 파묻힌 것이다.
한 거한을 너무나 손쉽게 때려죽인 카라스는 마룡신형보를 밟으며 망치를 횡으로 휘둘렀다. 그 경로에 있던 거한 두 사람의 갈빗대와 목뼈가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그제야 거한들이 정신을 차렸다.
“비, 빌어먹을! 저건 뭐야!”
“쳐라!”
사방에서 근육질 거구들이 달려들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하지만 카라스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젠가 이날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조용히 대비했다.
바로 이 순간을!
키릭, 촤르르르륵!
카라스가 망치 손잡이를 비틀어 뽑았다. 그러자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손잡이가 망치 머리와 분리되었다. 그렇게 분리된 두 쇳덩이 사이에는 3미터 길이의 기다란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부우우웅―!
카라스의 막강한 힘을 싣고, 기다란 쇠사슬 끝에 달린 망치 머리가 장대한 죽음의 춤을 추었다.
“크헉!”
“아아악! 내 팔!”
“크, 커허……!”
카라스가 버티고 선 곳을 중심으로 해서 반경 3미터의 공간 안에 지옥도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