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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드 스컬 1권



엘가드 스컬 1권 (1화)
-프롤로그-


5살이 채 되기도 전, 스승 에드몬에게 팔린 나는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야 했다. 부모의 품안에서 어리광을 부리기에도 모자랐을 그 나이에 이끌려 간 곳은 나 같은 아이들이 많이 있던 곳이었다.
어린 마음에 함께 놀 친구들이 많아 마냥 좋기만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고블린보다 못됐던 스승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친구들을 하나씩 데리고 가 버렸다.
내가 처한 상황을 어렴풋이 알게 됐을 무렵부터 나는 스승인 에드몬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다. 조용하게 걷는 것부터 시작하여 손을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들까지.
그렇게 15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저한 어쌔신으로 나를 키우려 했던 에드몬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나름 의뢰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어쌔신 아닌 어쌔신으로 성장했다.
물론 나에게 붙은 별칭은 어쌔신이 아닌 해결사였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해결사의 칭호가 붙은 것을 이야기 하자면 3년 전의 그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으으… 살려 주게… 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그, 그래 돈을 원하는가? 얼마를 주면 되겠나? 응?”
살이 뒤룩뒤룩 찐 귀족 하나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저렇게 추한 몰골을 보이다니, 사내의 상징을 떼어 내야 할 놈이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죽을 때도 멋스럽게, 추하지 않게 죽어야 한다. 그것이 내 지론이었다.
“이걸 그냥…….”
몇 대 패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할 때 뒤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도의 수련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미세한 소음이었다.
“그냥 나오시죠.”
“흐흐흐! 알고 있었느냐?”
“스승님이 아니면 누가 제 뒤를 밟는다고. 쳇!”
늙은 영감이 또 내 뒤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도 될 것이었는데 계속 이렇게 따라다녔다.
“이번에도 죄다 쓰러트렸더구나. 쯧쯧! 어쌔신이라는 놈이 하는 짓이 왜 그 모양인지. 전에도 말했지만 어쌔신은 몰래 숨어 들어가서 대상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거라 하지 않았더냐. 그게 궁극의 어쌔신이 가져야 할 소양이니라.”
스승인 에드몬이 창문을 열어 쓰러진 병사들의 모습을 보여 주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말만 많아지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저도 정정당당하게 싸운다던가 하는 그런 미친 생각은 없어요. 다만…….”
“다만? 다음은 뭐냐?”
“힘들어도 몇 번만 이렇게 해 놓으면 제가 청부를 맡아다는 말만 들어도 적들은 공포에 떨게 될걸요? 제가 괜히 스컬코인을 표식으로 놔두는 줄 아세요. 그게 다 브랜드라구요, 브랜드.”
스승인 에드몬이 길드장을 맡고 있는 어쌔신 길드는 제국 내에서도 상당히 이름을 날리는 길드였다. 하지만 최고의 길드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기에 스승은 그걸 바꿔보려 했다. 자신이 스컬코인을 남기며 스컬이라는 이름값을 올리는 이유가 그것에 있었다.
어쌔신하면 스컬, 스컬하면 의뢰받은 것은 반드시 죽인다는 공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몇 번만 더하면 제국의 공적으로 이름을 올리게 될 것도 같았다. 만약 안 된다면 그렇게 될 때까지 이 난리를 칠 생각이었다. 얼굴만 들키지 않는다면 스컬이라는 이름을 제국의 공적으로 만드는 게 최고의 선택이 되어 줄 것이었다.
“쯧쯧쯧! 그러다 언제 칼 맞아 죽고 말지. 네놈보다 센 놈을 만나서 피똥 한 번 오지게 싸 봐야… 아! 그래서 사부가 어쌔신답게 싸우라고 했구나… 할 거냐?”
“쳇! 그런 놈 만나면 또 그때는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 맞다!”
나는 스승과 대화를 하는 동안 슬금슬금 도망가려고 하는 돼지에게 손을 휘저었다.
피피핏!
“끄륵!”
비침에 맞은 놈은 급격하게 퍼지는 독으로 인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까맣게 변한 얼굴을 보이며 죽어 갔다.
“쯧쯧! 아무리 봐도 넌 어쌔신보다는 해결사가 낫겠다. 이거 제자를 다시 키우던가 해야지, 원.”
스승은 혀를 차며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쌔신이면 어떻고 해결사면 어떻겠는가. 청부받은 의뢰만 해결해 내면 그만인 것이다.

“헉헉… 이제 그만 나를 죽여 다오.”
옛 회상을 하는 동안 스승인 에드몬이 다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했다. 늙고 추레해진 스승은 2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폐인이 되어 있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한 마약과 술로 인해 정기마저 죽어 버린 상태였다.
‘그때 내가 있기만 했어도…….’
에드몬에게는 같은 스승에게 배운 트리알이라는 동문 사형제가 있었다. 스승과 비교해도 한참 어린 트리알은 나보다 14살이 더 많은, 스승에게는 귀여운 제자 같은 사제였다. 그런 그가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스승의 등에 검을 꽂았던 것이다. 독에 당하고 마나로드가 갈가리 찢긴 스승은 그때의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어 버렸다.
트리알이 의도적으로 나를 따돌리기 위해 동대륙까지 넘어가야 하는 임무를 맡겼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었다.
“싫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만 알려 주십시오. 그 비겁한 새끼가 어디로 갔는지를.”
“후윽… 그건 안 된다… 넌 아직 트리알을 당해 내지 못해.”
에드몬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신체의 모든 장기가 상해 까맣게 변해 버린 안색과 죽어 버린 눈동자를 보는 것이 화가 났다. 스승인 에드몬을 암습하고 그의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린 트리알에게 복수조차 금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제가 이깁니다. 이긴다구요! 그 비겁한 새끼는… 지금이라도 이길 수 있단 말입니다.”
내 눈이 활활 타올랐다. 심장은 이미 분노로 타 버린 지 오래였고 이성만은 타오르지 않도록 이를 악다물고 참았다.
“헉헉… 나중에… 후욱… 네가 원치 않아도 만나게 될 게다. 후욱… 제자야.”
“왜요?”
“이제 그만… 나를 편하게 해 주지 않겠느냐. 쿨럭쿨럭! 너무 고통스럽구나… 하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죽여 달라고 말하는 스승의 눈빛은 간절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했다. 모든 힘을 잃고 마약의 힘을 빌려 고통을 참아야 하는 삶이 견디기 힘들기는 할 것이었다.
“후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콜록콜록! 우웨에엑! 켁켁!”
기침을 숨이 넘어가도록 하는 스승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저런 상황까지 갔다면 이미 스승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다.
“우웩! 케케켁! 그, 그렇다면 좋다.”
“…….”
“쿨럭! 내 마지막 의뢰다… 나를 이제 그만 편하게 해 다오.”
의뢰라는 말을 마친 스승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1테론짜리 동전 1개를 내밀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의뢰라는 것은 청부를 업으로 살아온 내 삶에서 반드시 해 내야 할 절대적인 성역이었다.
“못난 놈! 제자를 잘못 키운 모양이로다. 청부를 마다하는 어쌔신도 있다더냐!”
화를 낼 때는 기침도 하지 않는 스승은 꼬장꼬장한 모습을 보였다.
‘내 손으로 편하게 보내 드리는 것이 최선인 것인가?’
고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최고의 수법으로 스승을 보내 드리는 것이었다. 언젠가 스승을 이렇게 만든 트리알을 죽일 방법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 최고의 보은이라 생각했다.
“의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최대한 경건하게, 그리고 슬픔을 억누르며 스승의 손에서 1테론짜리 금화를 건네받았다. 주머니에 건성을 찔러 넣은 후, 벨트 뒤쪽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애병의 손잡이를 잡았다.
“고마웠습니다.”
피잇!
검집을 떠난 검이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내 검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가장 최단의 거리를 돌파하여 선을 이루어 냈다. 여전히 허공중에 잔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선이었지만 검은 이미 본래의 검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머, 멋지구나…….”
스승의 얼굴이 환해졌다.
“원래 멋졌습니다.”
“녀석도…….”
스승의 얼굴에 돌아 온 빛은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불태우는 빛이었다.
“부탁이 있다. 들어 줄 테냐?”
“귀찮은 것만 아니면요.”
“내 외손주들을… 한 번만 돌아봐 주겠느냐.”
스승인 에드몬에게 외손주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가 결혼했었다는 것도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외손주가 있었습니까?”
“바이엘 백작가로 시집간 죽은 딸년이 낳은 애들 둘이 있다. 한 녀석은 카트리나고 막내는 한센이라고 하지. 허허허! 잊고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는데 마지막 순간이 되니 눈에 밟히는구나. 그 귀여운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손주들의 얼굴을 떠올리는지 스승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지만, 죽음으로 향해 가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아 더욱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귀찮긴 하겠지만… 얼굴만 보는 거야 뭐… 그렇게 하죠. 쳇!”
내 투덜거림조차 환하게 웃으며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이 변해 버린 스승의 얼굴이 보였다.
“부탁… 하마… 엘가드 스컬… 내 제자야…….”
파앗!
스승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자리에서 솟아오르는 피 분수를 마지막으로 스승이자 위대한 어쌔신이었던 에드몬은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는 스승님이 막아서 참았지만… 그 꼬맹이들만 보고 나면… 트리알을 죽이러 갈 것입니다. 그 새끼는 반드시 내 손으로… 빌어먹을!”
대답 없는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작은 무덤으로 만든 나는 바이엘 백작가로 떠났다. 잘살고 있는 것만 확인하면 트리알을 찾아 제국을 뒤질 생각이었다.



1. 바이엘 백작가(1)


르브론 제국은 여섯 개의 왕국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대제국으로 서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강력한 전제 국가이다. 제국이라 칭하는 르브론 황가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의 속왕을 둔 기형적인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바이엘 백작가는 그중에서 마티알 속왕령에 위치한 곳으로 제국의 중심인 르브론을 기점으로 제국의 동쪽 끝에 있었다.
제레미 폰 바이엘 백작은 5서클의 마법사로 제국의 삼대 인챈트 학파였던 바이엘 학파의 수장이었다. 능력이 부족한 제레미 백작으로 인해 지금은 제국 삼대 인챈트 학파에서 물러나 절치부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작은 슬하에 두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지금 엘가드 스컬이 보려고 하는 아이들이 백작의 아들과 딸이었다.
“여기가 백작의 성인가?”
곱슬곱슬한 금발을 단정하게 묶은 채 검은 레더메일과 가죽바지, 그리고 통가죽부츠와 전신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망토를 했다. 누가 보면 베테랑 여행자의 행색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스승인 에드몬에게서 부탁을 받고 이곳으로 온 엘가드 스컬로 어쌔신계의 이단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결사라고도 부르지만 꾸역꾸역 자신은 어쌔신이라고 칭하는 괴짜이기도 했다.
‘몰래 들어가서 보고 나오면 되겠지.’
깊게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백작가의 자제이니 그저 잘 있는지만 확인하고 나오면 그뿐이라 여겼다. 그래서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무턱대고 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피핏!
몇 번의 도움닫기를 한 후 5미터가 넘는 담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그리고 시작된 한센이라는 어린 소년을 찾는 일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고 막을 내렸다.

“아∼ 하세요.”
푸근하게 생긴 하녀가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스푼에는 하나 가득 스프가 떠진 채였다.
“내가 먹을 거니까 그냥 놔도.”
안색이 파리한 소년은 이제 14살이 된 바이엘 백작가의 차남인 한센이었다. 2차 성징이 나타나 귀여운 맛은 사라졌지만 꽤나 잘생긴 외모가 소녀들의 인기를 끌만한 외모였다.
“먹여 드리지 않으면 제가 마님께 혼이 납니다요. 그러니까…….”
하녀는 흠칫하여 얼른 마님에게 혼난다는 말을 하며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녀의 연기에 한센은 작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알았다.”
한센이 알았다며 입을 벌리자 하녀가 부지런히 스푼을 움직였다. 마지막 한 스푼의 스프까지 한센에게 먹인 하녀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좀 쉬시지요.”
“그래, 고생했다.”
의젓하게 고생했다는 말을 끝낸 한센은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스프를 먹은 뒤 더욱 심해진 탓이었다.
‘저 아이인가?’
그런 그의 눈에 들어 온 한센이라는 아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언제 숨이 넘어가도 상관없을 정도의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죽어서도 제자 편한 꼴을 못 보는 스승이라니… 씁! 저런 상황이면 도와줘야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