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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제국의 매 1권 (1화)
제1장 검은 사신(死神)
1
눈부셨다.
가을이란 정취에 어울리는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너무도 눈부셨다.
‘젠장!’나도 모르게 가벼운 욕지거리가 나왔다. 평소의 냉철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비라도 구슬프게 내리면 좋으련만…….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마치 지금 우리의 처지를 비웃고 있는 듯했다.
난 말의 고삐를 부드럽게 잡아채며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찢기고 해진 붉은 군복, 부러진 깃발과 창검, 거기에 눈에 초점이 없는 무표정의 부상병들과 간간이 터져 나오는 그들의 신음성까지…… 당연히 대오 또한 갖춰지지 않은 이 모든 것들은 전형적인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 멀리 남쪽, 전투가 있었던 곳에서는 아직도 회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연기 주변으로는 먹이를 노리는 까마귀들과 독수리들이 시커멓게 떼를 이루어 창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3개 군단, 6만 명을 헤아리던 정병(精兵)이 하루아침에 사천여 명의 패잔병으로 몰락하다니……. 정말 완패다!’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올 때는 당당히 행군했던 대로(大路)였다. 보무도 당당했으며, 모두가 아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이처럼 쓸쓸히 귀환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이곳은 제국 남부의 아조루스(Azorus) 지방.
자칭 ‘공화(共和:Respublica)’를 주장하는 반군이 무단으로 점거한 지역으로, 최근 제국과 반군 사이의 전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과연 저들이 주장하는 공화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혹은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자랑하던 제국이 어째서 이렇게 한순간에 몰락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겠다.
일단 중요한 점은 현재 제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이와 맞물려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말기의 상황이라는 것이니까.
내 이름은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Cassius Nexx Angelus).
지난여름부터 이 아조루스의 전투에 투입된 흑사자대(黑死者隊)의 대장이다.
그리고 또한 한때는 자타 공인 제국 최고의 명문가였지만, 지금은 역도로 몰려 몰락한 안겔루스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이기도 하다.
만약 십오 년 전 가문이 화를 당할 당시 내 나이가 고작 10살이 아니었다면, 만약 우리 가문을 불쌍히 여긴 일부 귀족들의 간청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약 제국의 초대 황제 베리타시우스 1세(Veritasius Ⅰ)가 하사한 ‘황금 도끼’가 없었더라면, 난 아마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황금 도끼.
그것은 실제로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순금으로 이루어진 작은 장식품이다.
600여 년 전, 제국을 건설한 영웅 황제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내 가문을 위해 ‘황금 도끼’라는 하사품을 주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공언했다.
―나 베리타시우스 황제는 안겔루스 가문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 황금 도끼를 수여한다. 훗날 안겔루스 가문의 사람이 대역무도한 죄를 지을지라도…… 설혹 구족을 멸해야만 하는 크나큰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이 황금 도끼가 있는 한, 안겔루스 가문의 계승자는 그 죄를 용서받고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시 황제가 우리 가문에게 한 약속이었고, 그 약속에 따라 살아남은 것이 바로 나였다.
물론 간신히 나 하나의 목숨만 부지했을 뿐, 찬란하게 빛나던 가문의 영광은 모두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말 우스운 것은, 내가 지휘하고 있는 흑사자대 또한 나와 같은 처지라는 사실이었다.
본래 내가 속한 흑사자대는 정규군이 아니었다.
사형수와 무기수 중에서 신체가 건강한 자들을 고르고 골라 만든 대장군 직속의 특수 기병대였다.
부대의 정원은 정확히 이천 명. 누군가가 죽으면 다시 사형수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늘 이천 명의 정원을 유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릴 가리켜 죽지 않는 검은 사신(死神), 즉 흑사자라 불렀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과 몰락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한 귀족 출신의 대장. 이 얼마나 기막히게 멋진 조합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우리 흑사자대는 그 설립 목적으로 인해, 그리고 사형수와 몰락 귀족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인해, 전장에서 언제나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전투가 끝나면 언제나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였고, 또 설혹 대단한 활약을 세워도 그 공은 모두 정규군에게 돌아갔다. 어차피 우리는 소모품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운이 좋았다. 무능한 최고 지휘관을 만난 게 행운인지 악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그의 무능 덕분에 우리 흑사자대가 무사할 수 있었다.
무능한 최고 지휘관은 적의 양동작전에 속아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우리를 엉뚱한 위치에 배치했고, 우리가 뒤늦게 전투에 참전할 무렵에는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되나?
“Dum vita est, spes est(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난 다시금 쓰게 웃으며 습관적으로 고대어(古代語)를 되뇌었다.
지난 전투, 정확히 24시간 전에 벌어졌던 전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중무장 보병으로 중앙을 굳게 지키며, 좌우에 배치한 빠른 기병으로 크게 우회해 아군을 포위하는 일련의 과정.
게다가 일부러 포위망에 작은 틈을 만들어, 도망치는 아군을 서로 밟고 밟히게 만드는 주도면밀함까지.
비록 숫자는 아군의 절반가량에 불과했지만, 적은 기병의 기동성을 살리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포위 작전을 구사했다.
‘적장의 이름이 아키에스(Acies)라고 했던가? 제법이군. 그런 훌륭한 전법을 구사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그에 비하면 목소리만 큰 아군의 지휘관은 그저 욕심만 앞서는 무능한 머저리에 불과하구나. 후후후!’
난 내심으로 쓰게 웃었다.
아, 그렇다고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무능한 아군의 지휘관, 페디토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썩은 귀족 나부랭이에게는 분노를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천하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제국인데…… 오죽 인재가 없었으면 페디토르 같은 무능한 인간이 지휘관이 되었겠는가.
새삼 제국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니, 분노는 고사하고 그저 쓰디쓴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나와 같은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를 걸치고, 뒤에 검은 망토를 두른 기병 하나가 부상병들을 헤치며 급히 말을 몰아 내게로 다가왔다.
흑사자대 소속의 병사, 내가 주변으로 정찰을 보낸 병사들 중의 하나였다.
“무슨 일인가?”
난 상념을 떨치고 차갑고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조금 전까지의 감상은 저 멀리 마음 깊숙한 곳에 던져 버린 채.
병사는 날쌘 몸놀림으로 말에서 훌쩍 내렸다. 그리곤 가벼운 목례를 한 뒤,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대장님의 말씀대로 주변을 정찰했습니다만, 적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직속상관인 나 이외에는 주변의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
“흐음…….”
난 습관적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상했다. 전투가 끝난 지도 어느덧 하루가 지났는데, 적의 추격 부대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그렇다고 적장이 이대로 아군을 무사히 놓아줄 만큼 호락호락한 녀석은 아닐 텐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벌써 추격대가 나타났어도 몇 번은 나타났을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왜 적의 추격대는 보이지 않는 걸까?’
난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무슨 꿍꿍이일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군을 그냥 놓아주는 걸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단 하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바로 그 경우의 수밖에 없었다.
매복(埋伏)!적은 어딘가 다른 샛길로 우회해, 퇴로를 막고 아군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 외에는 지금껏 적의 추격대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그리고 문득 떠오른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귀찮게 됐다. 벌써 하루나 행군한 마당에 여기서 다른 길로 퇴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고, 그렇다고 빤히 적이 기다리고 있는 길을 따라 퇴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훗! 제법이군!”
나는 나도 모르게 문득 입가에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재미있었다. 이처럼 속임수를 잘 쓰는 적장이라니……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한판 제대로 붙어 보고 싶은 호승심과 함께, 불현듯 적장이 상당히 재미있는 놈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장은 아직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나 카시우스의 존재!전투에 참가조차 하지 못한 나와 흑사자대의 존재였다.
2
저 멀리 대륙의 동부에 있는 이민족. 한(漢)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며, 제국과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이민족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1)
세 사람이 합심하면 거리에 호랑이가 나왔다는 거짓말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근거가 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그것이 곧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카시우스가 이용한 책략도 바로 이것, ‘삼인성호’였다.
사실 적의 추격대는 없었다. 아니, 그들을 따르는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대여섯 명의 부하들을 시켜 적의 추격대가 발견된 것처럼 거듭 거짓 정보를 흘린 것만으로도, 거짓은 소문이 되고 소문은 이내 진실이 되었다.
곧이어 진실은 다시 공포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모든 장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렇게 카시우스는 몇 사람의 말만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만들었다.
* * *
페디토르 나투라 비르고스(Peditor Natura Virgos).
올해 나이 52세. 이번 원정의 총지휘권을 지닌 제국의 대장으로서,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집정관[Consul] 나시카(Nasica) 솔 비르고스의 먼 친척이다. 작은 키와 반쯤 벗겨진 머리, 임산부마냥 불룩한 배와는 달리 대단한 정력가로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내세울 만한 건 대단한 정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말해 군사에 대한 능력이 형편없으면서도 단지 명문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6만의 대군을 이끄는 장군이 된 자.
제국 말기의 무능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가 바로 이 페디토르란 사내였다.
제국의 매 1권 (1화)
제1장 검은 사신(死神)
1
눈부셨다.
가을이란 정취에 어울리는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너무도 눈부셨다.
‘젠장!’나도 모르게 가벼운 욕지거리가 나왔다. 평소의 냉철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비라도 구슬프게 내리면 좋으련만…….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마치 지금 우리의 처지를 비웃고 있는 듯했다.
난 말의 고삐를 부드럽게 잡아채며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찢기고 해진 붉은 군복, 부러진 깃발과 창검, 거기에 눈에 초점이 없는 무표정의 부상병들과 간간이 터져 나오는 그들의 신음성까지…… 당연히 대오 또한 갖춰지지 않은 이 모든 것들은 전형적인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 멀리 남쪽, 전투가 있었던 곳에서는 아직도 회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연기 주변으로는 먹이를 노리는 까마귀들과 독수리들이 시커멓게 떼를 이루어 창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3개 군단, 6만 명을 헤아리던 정병(精兵)이 하루아침에 사천여 명의 패잔병으로 몰락하다니……. 정말 완패다!’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올 때는 당당히 행군했던 대로(大路)였다. 보무도 당당했으며, 모두가 아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이처럼 쓸쓸히 귀환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이곳은 제국 남부의 아조루스(Azorus) 지방.
자칭 ‘공화(共和:Respublica)’를 주장하는 반군이 무단으로 점거한 지역으로, 최근 제국과 반군 사이의 전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과연 저들이 주장하는 공화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혹은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자랑하던 제국이 어째서 이렇게 한순간에 몰락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겠다.
일단 중요한 점은 현재 제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이와 맞물려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말기의 상황이라는 것이니까.
내 이름은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Cassius Nexx Angelus).
지난여름부터 이 아조루스의 전투에 투입된 흑사자대(黑死者隊)의 대장이다.
그리고 또한 한때는 자타 공인 제국 최고의 명문가였지만, 지금은 역도로 몰려 몰락한 안겔루스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이기도 하다.
만약 십오 년 전 가문이 화를 당할 당시 내 나이가 고작 10살이 아니었다면, 만약 우리 가문을 불쌍히 여긴 일부 귀족들의 간청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약 제국의 초대 황제 베리타시우스 1세(Veritasius Ⅰ)가 하사한 ‘황금 도끼’가 없었더라면, 난 아마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황금 도끼.
그것은 실제로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순금으로 이루어진 작은 장식품이다.
600여 년 전, 제국을 건설한 영웅 황제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내 가문을 위해 ‘황금 도끼’라는 하사품을 주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공언했다.
―나 베리타시우스 황제는 안겔루스 가문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 황금 도끼를 수여한다. 훗날 안겔루스 가문의 사람이 대역무도한 죄를 지을지라도…… 설혹 구족을 멸해야만 하는 크나큰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이 황금 도끼가 있는 한, 안겔루스 가문의 계승자는 그 죄를 용서받고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시 황제가 우리 가문에게 한 약속이었고, 그 약속에 따라 살아남은 것이 바로 나였다.
물론 간신히 나 하나의 목숨만 부지했을 뿐, 찬란하게 빛나던 가문의 영광은 모두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말 우스운 것은, 내가 지휘하고 있는 흑사자대 또한 나와 같은 처지라는 사실이었다.
본래 내가 속한 흑사자대는 정규군이 아니었다.
사형수와 무기수 중에서 신체가 건강한 자들을 고르고 골라 만든 대장군 직속의 특수 기병대였다.
부대의 정원은 정확히 이천 명. 누군가가 죽으면 다시 사형수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늘 이천 명의 정원을 유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릴 가리켜 죽지 않는 검은 사신(死神), 즉 흑사자라 불렀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과 몰락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한 귀족 출신의 대장. 이 얼마나 기막히게 멋진 조합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우리 흑사자대는 그 설립 목적으로 인해, 그리고 사형수와 몰락 귀족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인해, 전장에서 언제나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전투가 끝나면 언제나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였고, 또 설혹 대단한 활약을 세워도 그 공은 모두 정규군에게 돌아갔다. 어차피 우리는 소모품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운이 좋았다. 무능한 최고 지휘관을 만난 게 행운인지 악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그의 무능 덕분에 우리 흑사자대가 무사할 수 있었다.
무능한 최고 지휘관은 적의 양동작전에 속아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우리를 엉뚱한 위치에 배치했고, 우리가 뒤늦게 전투에 참전할 무렵에는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되나?
“Dum vita est, spes est(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난 다시금 쓰게 웃으며 습관적으로 고대어(古代語)를 되뇌었다.
지난 전투, 정확히 24시간 전에 벌어졌던 전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중무장 보병으로 중앙을 굳게 지키며, 좌우에 배치한 빠른 기병으로 크게 우회해 아군을 포위하는 일련의 과정.
게다가 일부러 포위망에 작은 틈을 만들어, 도망치는 아군을 서로 밟고 밟히게 만드는 주도면밀함까지.
비록 숫자는 아군의 절반가량에 불과했지만, 적은 기병의 기동성을 살리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포위 작전을 구사했다.
‘적장의 이름이 아키에스(Acies)라고 했던가? 제법이군. 그런 훌륭한 전법을 구사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그에 비하면 목소리만 큰 아군의 지휘관은 그저 욕심만 앞서는 무능한 머저리에 불과하구나. 후후후!’
난 내심으로 쓰게 웃었다.
아, 그렇다고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무능한 아군의 지휘관, 페디토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썩은 귀족 나부랭이에게는 분노를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천하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제국인데…… 오죽 인재가 없었으면 페디토르 같은 무능한 인간이 지휘관이 되었겠는가.
새삼 제국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니, 분노는 고사하고 그저 쓰디쓴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나와 같은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를 걸치고, 뒤에 검은 망토를 두른 기병 하나가 부상병들을 헤치며 급히 말을 몰아 내게로 다가왔다.
흑사자대 소속의 병사, 내가 주변으로 정찰을 보낸 병사들 중의 하나였다.
“무슨 일인가?”
난 상념을 떨치고 차갑고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조금 전까지의 감상은 저 멀리 마음 깊숙한 곳에 던져 버린 채.
병사는 날쌘 몸놀림으로 말에서 훌쩍 내렸다. 그리곤 가벼운 목례를 한 뒤,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대장님의 말씀대로 주변을 정찰했습니다만, 적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직속상관인 나 이외에는 주변의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
“흐음…….”
난 습관적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상했다. 전투가 끝난 지도 어느덧 하루가 지났는데, 적의 추격 부대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그렇다고 적장이 이대로 아군을 무사히 놓아줄 만큼 호락호락한 녀석은 아닐 텐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벌써 추격대가 나타났어도 몇 번은 나타났을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왜 적의 추격대는 보이지 않는 걸까?’
난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무슨 꿍꿍이일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군을 그냥 놓아주는 걸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단 하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바로 그 경우의 수밖에 없었다.
매복(埋伏)!적은 어딘가 다른 샛길로 우회해, 퇴로를 막고 아군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 외에는 지금껏 적의 추격대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그리고 문득 떠오른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귀찮게 됐다. 벌써 하루나 행군한 마당에 여기서 다른 길로 퇴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고, 그렇다고 빤히 적이 기다리고 있는 길을 따라 퇴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훗! 제법이군!”
나는 나도 모르게 문득 입가에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재미있었다. 이처럼 속임수를 잘 쓰는 적장이라니……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한판 제대로 붙어 보고 싶은 호승심과 함께, 불현듯 적장이 상당히 재미있는 놈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장은 아직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나 카시우스의 존재!전투에 참가조차 하지 못한 나와 흑사자대의 존재였다.
2
저 멀리 대륙의 동부에 있는 이민족. 한(漢)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며, 제국과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이민족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1)
세 사람이 합심하면 거리에 호랑이가 나왔다는 거짓말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근거가 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그것이 곧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카시우스가 이용한 책략도 바로 이것, ‘삼인성호’였다.
사실 적의 추격대는 없었다. 아니, 그들을 따르는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대여섯 명의 부하들을 시켜 적의 추격대가 발견된 것처럼 거듭 거짓 정보를 흘린 것만으로도, 거짓은 소문이 되고 소문은 이내 진실이 되었다.
곧이어 진실은 다시 공포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모든 장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렇게 카시우스는 몇 사람의 말만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만들었다.
* * *
페디토르 나투라 비르고스(Peditor Natura Virgos).
올해 나이 52세. 이번 원정의 총지휘권을 지닌 제국의 대장으로서,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집정관[Consul] 나시카(Nasica) 솔 비르고스의 먼 친척이다. 작은 키와 반쯤 벗겨진 머리, 임산부마냥 불룩한 배와는 달리 대단한 정력가로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내세울 만한 건 대단한 정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말해 군사에 대한 능력이 형편없으면서도 단지 명문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6만의 대군을 이끄는 장군이 된 자.
제국 말기의 무능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가 바로 이 페디토르란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