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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2화)


카시우스가 행렬의 선두에 있던 페디토르에게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음을 보고하러 갔을 때, 그도 이미 다른 경로를 통해 보고를 받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그, 그게 사실인가? 벌써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나?”
그가 비단 손수건으로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며 더듬더듬 카시우스에게 되물었다.
물론 이미 보고를 받은 그가 정말로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음을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상대가 자신의 물음에 제발 부정을 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의 이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카시우스의 대답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며, 당황한 상관과 달리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장군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소식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의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몇 명의 정찰병들을 시켜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흘린 것은 그였다.
그런데 막상 상관이 적의 출현을 묻자,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적의 추격대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재차 채근하듯 묻는 페디토르.
그러나 카시우스 또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장의 생각으로는 적이 아무래도 아군의 예상 퇴로 어딘가에 매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패잔병이라도 숫자가 사천 명이나 됩니다. 또한 저와 흑사자대는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은 위험하게 손실을 각오하고 뒤에서 공격을 하는 대신, 아군의 길목을 막아 기습을 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판단한 적의 움직임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러나 진실이 언제나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페디토르는 원래 카시우스와 흑사자대를 업신여기는 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카시우스와 흑사자대는 일개 소모품에 불과했고, 지금도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때문에 비록 카시우스는 사실을 보고했지만, 페디토르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디토르는 카시우스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놈은 절대 믿을 수 없는 놈이다.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오래이거늘. 놈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매복이 있다는 핑계로 자신이 선두에서 도망치고, 날 후미에 두어 적의 추격대를 막는 방패로 사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는 확신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저 간악한 카시우스 녀석은 혼자만 살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카시우스가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소장과 흑사자대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제가 적의 매복을 유인하겠으니, 페디토르 님은 그사이 다른 길로 우회해 퇴각하십시오.”
카시우스의 이 말 또한 페디토르의 입장에선 현재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미 상대에 대한 의심 사로잡힌 페디토르에게 있어, 지금 이 말은 그 의심을 완전한 확신으로 만들어 주는 계기였다.
페디토로가 상대를 매섭게 노려보는 가운데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잠시 후, 마침내 페디토르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매복이 있다는 자네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선두에 서겠다. 자네와 흑사자대, 그리고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후방에서 따라오도록!”
“괜찮으시겠습니까?”
카시우스가 확인하듯 조심스레 되물었지만, 그의 결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되물음은 더욱 그의 결심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 않겠네. 이건 여황 폐하로부터 군단의 총지휘를 위임받은 ‘쿰 임페리오(Cum Imperio:독자적인 최고 통수권을 지닌 사람)’로서 하는 명령이다!”
그는 더욱 단호한 표정과 어투로 카시우스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가 실제로 선두에서 매복한 부대를 상대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적의 추격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확신한 그는 매복을 핑계로 먼저 도망가고, 카시우스와 그 병사들을 방패로 삼겠다는 속셈이었다.
결국 카시우스는 상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상관의 지금 이 말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바였지만, 그는 못 이기는 척 상관의 명령을 따랐다.
“Etiam, mei dominus(에티암, 메이 도미누스)!”
그는 오른 주먹으로 심장을 치며, 지금은 군대의 복명 등을 비롯해 일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고대어로 힘차게 복명했다.
페디토르는 알지 못했다, 이때 카시우스의 입가에 걸려 있는 희미한 미소가 의미하는 것을.
잠시 후, 페디토르와 상위 귀족으로 이루어진 그의 측근들이 먼저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해서.
그러나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카시우스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매복이 무서운 것은 적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한번 모습을 드러낸 이상 매복은 그저 대열이 흐트러진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지. 그리고 명색이 아군의 총대장을 미끼로 던진다면, 적도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사방은 고요했다.
간간이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릴 뿐, 폭 삼십여 미터의 숲길은 그저 고즈넉할 따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고요한 정도가 아니었다.
높고 푸른 하늘과 귓가를 스치는 맑고 차가운 바람은 평화로운 분위기마저 연출했고, 그 가운데 숲길을 가득 메운 늦가을의 붉은 단풍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한가로운 가을 숲길의 전형적인 모습.
단, 이 길을 걷고 있는 일단의 무리에게는 한가로이 이런 경관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지만 말이다.
페디토르.
그는 초조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안 그래도 살이 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목은 거북이처럼 더욱 움츠러들었고, 털이 무성한 두툼한 손발은 찬바람을 맞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렸다.
“젠장! 뭣들 하는 게냐? 어서 더 빨리 움직이지 못할까?”
그는 수레에서 벌떡 일어나 몇 번이나 크게 병사들에게 고함을 쳤지만, 한편으로는 신경질적으로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가 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언제 뒤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의 추격대 때문이었다.
평소 경멸해 마지않던 카시우스에게 뒤를 맡기고 도망친 지도 어느덧 3시간째.
하지만 그와 그의 측근 장교들은 카시우스가 남은 평원으로부터 불과 15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를 이동한 상태였다.
사실 마음이 급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굳이 그가 거칠게 걸음을 재촉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지난 3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이동했다.
그러나 급한 것은 마음뿐, 부상병이 태반인 그들은 이제야 겨우 평원을 벗어나 잎이 넓은 아름드리나무가 무성한 숲길의 초입에 들어선 상태였다.
‘아무리 끈질기게 버텨도 그 사형수 놈들은 두어 시간이 한계일 터. 어쩌면 적의 추격대는 벌써 놈들을 제압하고 다시 추격을 재개했을지도 모른다. 젠장! 놈들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마당에 겨우 이런 데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다니……!’
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재차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기와 갑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초라한 행색,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몰라 벌벌 떨어야만 하는 불안감, 그리고 패잔병의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까지…… 그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중에서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부상이 심한 병사들, 평민 주제에 자신 같은 귀족의 걸음을 방해하는 부상병들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이렇게 생각한 그는 결국 곁에 있던 부관 한 명을 손짓으로 불러 명령했다, 뱀처럼 싸늘한 표정과 어투로.
“더 이상 행군을 지체할 수 없다. 지금부터 행군을 지체시키는 병사들은 모두 다리의 힘줄을 베어 버려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관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귀가 먹었나? 행군에 방해되는 놈들은 모조리 다리병신으로 만들어 버리란 말이다!”
그가 짜증 가득한 어투로 재차 호통을 쳤다.
“아!”
그 말을 들은 부관, 그리고 곁에 있던 대여섯 명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고 해도 그렇지, 멀쩡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아군 병사들의 힘줄을 자르라니…… 이건 상상조차 못한 해괴한 명령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의 호통이 너무도 컸던 탓에 다른 병사들도 모두 어느새 행군을 멈추고 하나같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바라봤다.
하지만 페디토르는 그런 부하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길이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니 부상병들을 병신으로 만들어 길을 막으란 말이다!”
놀라거나 미안해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무슨 대단한 생각이라도 한 듯한 자랑스러운 표정과 어투.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어차피 천민과 평민은 귀족에게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하찮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귀족에게 있어 이런 결정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족 중에서도 비교적 지위가 낮은 자들이나 평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장교들, 그들에게 있어 그의 명령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장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우물쭈물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령을 재촉하는 호통이 몇 번 이어진 후, 결국 보다 못한 페디토르가 직접 나섰다.
“흥! 못난 놈들!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한 죄는 돌아가서 내가 직접 따지겠다!”
그는 곁에 있던 호위병의 장검을 빼앗듯이 뽑아 들었다.
그리곤 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려, 때마침 근처에 있던 부상이 심한 어느 병사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설마 반항할 수조차 없는 부하들에게 진짜로 검을 휘두르려는 걸까? 목숨을 내걸고 페디토르의 행동을 막아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모른 척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하나?
좌중은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페, 페디토르 님…….”
부상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더듬었지만,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더욱 악마 같은 표정을 짓고 천천히 다가갔다.
정말 이대로 부상병을 죽이려는 걸까?
그런데 바로 그때, 모두의 긴장이 절정에 달한 바로 그때였다.
쇄애애액!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한 줄기 검은 빛살이 페디토르를 향해 날아온 것은.
그것은 누가 의식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날아와 검을 쥔 그의 오른 팔뚝에 정확히 박혔다.
“으악!”
페디토르가 외마디 비명을 길게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팔뚝에서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뭐, 뭐지?”
좌중은 크게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놀랍게도 검은 빛줄기는 1미터가량의 기다란 화살이었는데, 어찌나 강한 힘으로 쏘았는지 그의 두툼한 팔뚝을 완전히 관통한 채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곧이어 몇 번의 귀를 찌르는 호각 소리가 들리더니, 날카로운 화살들이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거의 동시에,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매복해 있던 적들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성난 늑대 무리였다.
“와―아!”
크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적의 모습이 흡사 연약한 양 떼를 노리고 달려드는 성난 늑대 무리와도 같았다.
“으아악!”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누가 명령할 것도 없이 제국의 병사들도 급히 칼을 뽑아 들며 반격했지만, 어디서 화살을 날리는지도 정확히 파악도 안 되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급히 주변의 나무 근처로 몸을 숨기거나, 혹은 벌써 죽은 동료의 시체를 방패 삼아 화살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