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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3화)


물론 숨어 봐야 곧이어 들이닥친 적의 병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뿐이었지만 말이다.
카시우스가 예측한 적의 진짜 추격대.
이제껏 숲 속에 매복해 있던 그들이 마침내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 * *

셉티무스(Septimus).
그는 대대로 양을 치던 노예 집안의 자식이었다. 7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에 숫자 7(Ⅶ. Septem)에서 따와 이름이 셉티무스였으며, 당연히 귀족들이 갖는 가문명이나 성씨 따위는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이제 한창 가정을 이루고 생산 활동에 종사해야 할 33살의 나이였지만, 그는 지금껏 평범함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물론 노예도 같은 노예끼리 결혼을 하고, 평민이나 귀족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약 175cm가량의 적당한 키와 적당한 근육질의 몸매, 그리고 강인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호남형의 인물이었던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남들과 같은 정상적인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20살이 되던 날 우발적으로 주인집의 아들을 죽인 후, 그의 인생은 평범함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당시 14살이던 주인집의 아들이 평소 그에게 잦은 구타를 가했다는 사실이나, 그가 구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어를 하던 중 우발적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노예라는 사실이었고, 그가 죽인 자가 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재판 따위는 없었다. 귀족이 노예를 죽이면 가벼운 벌금형에서 끝나지만, 노예가 귀족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였다.
그래도 그는 억울했다. 한창의 나이에 아무것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억울했고, 또 무서웠다. 그래서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특수부대를 창설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두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자원했다.
그는 고민은커녕 특수부대가 자신을 위해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며 감사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며, 심지어는 이것이 바로 운명이라는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때 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군관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열악한 보급은 물론, 열에 일고여덟은 죽어 나가는 고된 훈련, 게다가 어렵게 훈련의 고비를 넘긴 다음 투입된 잔인한 살육의 현장들까지…… 그는 몇 번이고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만약 자신의 죽음이나 탈영이 남은 가족들의 구속으로 이어지는 그 지긋지긋한 연좌제만 없었더라면, 그도 아마 다른 동료들처럼 나약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딱 한 가지 행운은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자, 검은색 갑주로 중무장을 한 채 말 위에 앉아 저 멀리 지평선을 응시하고 있는 카시우스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장을 만난 것도 벌써 3년인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처음 카시우스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정식으로 창설되었을 당시, 흑사자대는 사형수와 무기수들로 구성된 군대답게 장교들에게는 반드시 피해야 할 부대로 악명을 떨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병사들에게 있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안락함만을 추구하던 귀족 출신의 장교들은 그저 만만한 샌님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따라서 항명과 반항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장교를 구타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오죽했으면 부대가 창설되고 5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그들을 지나쳐 갔던 장교들이 삼십여 명을 헤아렸겠는가.
그러던 중 3년 전, 31번째의 대장으로 부임한 자가 바로 카시우스였다.
여황의 기사,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한때는 제국 최고의 명문가였으나, 15년 전 개혁을 부르짖던 중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멸문의 화를 당한 안겔루스 가문의 마지막 후예.
반역도의 자식이라는 신분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사관학교를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특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적들마저 인정한 여황 폐하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심은 일명 ‘여황의 기사’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불과 스물두 살의 나이에도 불과하고,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애송이임에도 불과하고, 그가 그동안 전장에서 세운 화려한 공적이었다.
십인대장으로 처음 참전한 전투에서 적의 백인대를 전멸시킨 것부터 시작해, 삼십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수백 명의 적을 베었다는 소문은 이미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돌고 있었다.
물론 소문이라는 게 그렇듯 그중 상당 부분은 각색되고 과장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불사신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대단한 공적을 세운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단한 소문과 달리, 카시우스의 첫인상은 조금 의외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의외라고하기보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무슨 사내놈이 계집애보다 더 예쁘장한 거야?’
카시우스를 처음 봤을 때, 그를 포함한 흑사자대원들의 첫 느낌은 대부분 이러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여자보다도 더 투명해 보이는 하얀 피부, 약간은 고집이 있어 보이는 붉은 입술과 그 위로 시원하게 뻗은 콧날, 짙고 매혹적인 눈썹, 어딘지 모르게 슬픈 빛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무심한 듯 헝클어진 긴 붉은색 머리칼까지…… 굳이 185cm에 이르는 훤칠한 키와 이와 대비되는 호리호리한 체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는 같은 남자가 반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외모보다 더 의외인 것은 부임한 직후 그가 보여 준 언행이었다.
“인간쓰레기들!”
그가 모든 병사들을 연병장에 모아 놓고,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우―우!”
당연히 병사들은 길게 야유를 보냈다.
발을 쿵쿵 구르며 거친 욕설을 퍼붓기도 했고, 일부 성질이 급한 녀석들은 당장에라도 연단에 쳐들어갈 기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좌중을 둘러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귀하고 잘나신 귀족들에게 있어, 우리는 인간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대들에게 묻겠다! 세상이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믿는가? 참된 것은 언젠가 승리하고, 거짓된 것은 언젠가 패배한다고 생각하나? 강자는 약자를 보살피며, 약자는 그 보호 아래서 꿈을 키운다고 생각하나? 정말로 노력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부대장의 취임 인사라고 하기엔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병졸들의 야유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쓰레기다! 이 불공평한 세상에 있어, 이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있어, 우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쓰레기들이여……! 난 그대들에게 가족과 이웃을 위해,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싸우라는 허울뿐인 말 따위는 않겠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다른 이들처럼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인간이 되기 위해, 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에서 강자가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대장으로서의 다짐이나 각오, 혹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한 언급 등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비상식적이면서도 짧은 연설이 끝났을 때, 셉티무스를 비롯한 이천여 명의 병졸들은 야유 대신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카시우스! 카시우스! 카시우스!

그날, 카시우스의 이름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울려 퍼졌다.
어쩌면 흑사자대의 모든 병사들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귀족입네 자부하는 가식 덩어리가 아니라, 귀족 자신들만의 권익을 위해 병졸들을 희생시키는 탐욕 덩어리가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서 그들을 이해해 줄 진정한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카시우스는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늘 몸소 선두에 섰고, 그날 자신의 말이 허울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때였다.
“셉티무스…… 셉티무스! 왜 대답이 없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 건가?”
그의 상념을 깨며 카시우스의 낮지만 또렷한 말소리가 들렸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은 불렀던 듯 약간은 책망이 담긴 어투.
“아!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셉티무스는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랬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 적이 매복해 있을지 모르는 전장의 한복판.
언제까지 한가로이 생각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전투에 있어 절대라는 말은 없다. 언제, 어디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
다시 카시우스가 차가운 어투로 덧붙였다.
그런데 이어서 셉티무스가 뭐라 대답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앞에서 정찰병 하나가 급히 말을 몰아 달려왔다.
그리곤 잠시 후 날렵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린 뒤, 카시우스의 정면에서 왼쪽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약 3km 전방의 숲 속에 위치한 넓은 공터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양측의 숫자는 대략 이천에서 삼천가량!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전투가 한창인 것 같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카시우스를 비롯한 이천 명의 흑사자대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남은 오백여 명의 정규 병사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소식이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적은 인적이 드문 숲에 매복하여 퇴각하는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언제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뒤에 있던 셉티무스가 카시우스에게 다가와 명령을 재촉했다. 당장에라도 전투를 벌이고 싶은 듯 손이 근질근질하다는 어투.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정렬해 있던 병사들 또한 무언의 살기를 번뜩이며 어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재촉했다.
기다리다 지친 것은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좋다! 지금부터 우리는 인간이 아닌, 지옥에서 나타난 저승사자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도록 한다!”
그는 선언을 하듯 큰 소리로 외치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붉은색의 가면을 천천히 얼굴로 가져갔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눈만 뚫려 있는 섬뜩한 붉은색의 가면을.
그것은 얇은 강철로 만들어 표정이 전혀 없었으며, 그야말로 사신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렸다.
이어서 그의 뒤에 있던 다른 흑사자대원들 또한 자신들의 대장과 같은 모양인 검은색 죽음의 가면을 천천히 얼굴에 가져갔다. 마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듯이.

―Mo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그들이 외치는 고대어의 함성이 지옥의 선율처럼 무겁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신, 피에 굶주린 사신들이었다.

* * *

로메루스(Lomelus).
그는 ‘공화국’ 소속 제1기병대장이다. 5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90cm가 넘는 큰 키와 당당한 체구를 자랑했고, 특히 한껏 멋을 내 좌우로 짧게 기른 탐스러운 콧수염은 누구나 부러워 마지않는 그만의 자랑거리였다.
게다가 외모만큼이나 거친 힘 또한 유명해서, 파괴력 넘치는 마창술(馬槍術)은 같은 기병대 내에서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그는 지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아니, 단순히 좋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승리가 가져다주는 특유의 성취감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이 일 정도였다.
‘이겼다! 이것으로 이번 전투는 아군의 완승이다!’
몇 명의 호위병에게 둘러싸인 채 눈앞의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옥(地獄)!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악귀가 지배한다는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직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악귀들뿐, 제정신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처절한 비명과 거친 욕지거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는 기괴한 장단처럼 한데 어울려 귓가를 파고들었으며, 그 와중에 뿜어지는 시뻘건 선혈은 하늘마저 붉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