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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4화)
아비규환의 전형!물론 전황은 기습을 가한 푸른색 갑옷의 공화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붉은색 갑옷의 제국군은 힘겹게 저항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형국이었다.
‘과연 레오 님이시다! 비록 질투에 눈먼 총지휘관에 의해 후방으로 쫓겨났지만, 적이 이곳을 지나갈 것이라는 예측은 정확했다! 어쩜 이리도 정확하게 적의 이동 경로를 집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매복을 지시했던 상관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재차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레오의 말을 듣지 않고 정석대로 추격대를 파견했더라면, 아무리 삼천에 이르는 정예 부대라 할지라도 죽기를 각오한 패잔병들의 저항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아니, 단순히 피해를 입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적의 지휘관을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죽기를 각오한 적의 반격으로 인해 오히려 그들이 곤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격을 하는 대신 적의 이동 경로에 미리 매복을 함으로써 그들은 큰 피해 없이 적을 완벽히 포위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적의 말살’이라는 전쟁 본연의 목적을.
‘어떻게 보면 레오 님도 정말 안타깝구나! 이런 대단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속이 좁은 상관을 만나 그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니……! 이대로라면 이번에도 역시 재주는 레오 님이 부리고 공은 모두 아키에스가 가로채겠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는 문득 자신의 상관이 불쌍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략 삼십여 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공화 측 병사들의 일방적인 학살이 점차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이다.
―Momento mori! Momento mori!
터질 듯한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 문득 어디선가 중저음의 음산한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마치 지옥 저편에서 등장하는 저승사자들의 음성처럼.
“뭐, 뭐야?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감히 누구 앞에서 장난질이냐?”
“적인가? 어서 전열을 가다듬어라!”
당황한 그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순간적으로 전투를 멈춘 뒤,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그들 외에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비록 피로 얼룩지긴 했지만 숲은 여전히 고요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시리도록 파랬다.
그렇지만 그 음산한 외침은 묘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환청처럼 좌중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그 음산한 외침이 거짓말처럼 뚝 그치더니, 이천여 기(騎)에 이르는 중무장한 검은색의 기병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아무런 함성이나 소리도 없이, 그저 지옥에서 나타난 검은 저승사자들처럼.
물론 그들은 실제 저승사자들이 아닌, 카시우스와 그가 이끄는 흑사자대의 병사들이었다.
형식적인 권고나 투항의 말 따위는 일절 없었다.
아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함성이나 격려 또한 없었다.
그들은 그저 살기를 번뜩이고 말을 재촉하며, 1.5미터가 넘는 기다란 마상용 창을 휘둘러 그대로 단숨에 전장을 돌파할 뿐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대열을 유지하라!”
당황한 로메루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한번 불이 붙은 흑사자대의 기습을 멈추기엔 어림없었다.
오히려 포위했던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진 통에, 카시우스의 예견대로 매복 부대는 흑사자대의 맛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막상 부딪쳐 본 다음에야 로메루스는 어째서 자신이 흑사자대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가까이서 겪어 본 흑사자대는 귀신이 아니라 확실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들은 말이 울음을 토해 낼 수 없도록 말의 입을 천으로 막았고, 말발굽은 헝겊과 천으로 감싸 소리를 최대한으로 줄인 상태였다.
게다가 갑옷은 쇳소리가 요란한 철 갑옷이 아니라 특수 가공을 한 부드러운 가죽 갑옷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이런 기습에 능숙한 듯 동작 하나하나가 신속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젠장!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지? 아무리 공터라 해도 이런 난전(亂戰)에서는 기마술에 제약이 있는 게 당연한 법인데…… 대체 저놈들은 어떤 훈련을 받았기에 이런 곳에서도 저렇게 완벽한 기마술을 펼친단 말인가?”
로메루스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자기도 모르게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사실 그의 말마따나 이곳은 나무가 무성한 숲이었기에 기병의 행동에 제약이 있었다.
때문에 이런 숲에서는 기병 대신 몸을 숨기고 화살을 날리는 궁병(弓兵)을 적극 활용하는 게 상식이었다.
다만 그가 생각지 못한 점이 있다면 지금 그가 상대하는 부대가 단순한 기병대가 아니라는, 전장에서도 가장 위험한 전투에만 투입되는 일종의 특수부대였다는 점이다.
산악이나 늪지 같은 더 험한 지형에서도 임무를 수행했던 흑사자대에게 있어, 이 정도의 숲길은 제약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기척을 지우고 기습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흑사자대가 더 대단한 것은 공포라는 인간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점이었다.
공격하기 전에 죽음을 기억하라는 고대어를 음산하게 외치고 적을 압박한 것, 기척과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유령처럼 움직인 것, 그리고 사신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의 가면을 쓴 것은 모두 적을 공포로 밀어 넣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 때문에 로메루스와 그 병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기가 꺾였고, 막상 전투를 벌이자 제 실력을 반도 채 발휘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로메루스도 만만한 장수는 아니었다.
“적의 기세에 당황하지 마라! 아직 수적으로는 아군이 월등히 유리하다! 일단 대열을 정비하고 방어에 주력하라!”
그는 적의 숫자가 고작 이천 명가량에 불과함을 간파하고, 주위의 부관들을 시켜 병사들에게 우선 방어에 주력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호위병들과 함께 곁에 있던 말에 올라, 1.2미터에 이르는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들고 몸소 전투를 준비했다.
비록 지금까지는 전황이 유리해 가운데서 가만히 구경만 했지만, 그 또한 지휘관이기 이전에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전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참전하는 것을 사실 카시우스가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윽고 로메루스가 말에 오르고 막 몸소 전투에 참가하려던 순간이었다.
‘저놈이 대장인가? 실전 경험이 상당히 풍부한 녀석 같군!’
멀찌감치 떨어져서 전황을 살피던 카시우스는 대번 로메루스가 적의 지휘관임을 직감했다.
로메루스가 눈에 띄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주변의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푸른색의 갑옷을 걸친 상태였고, 그나마 일반 병사들과 다른 점이라면 갑옷의 우측 가슴에 공화의 상징인 하얀 사자 문양이 작게 새겨져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몸에 배인 일종의 본능 덕분에, 또한 로메루스가 일반 병사들을 압도하는 당당한 위엄을 뽐낸 덕분에, 자연스럽게 상대가 대장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카시우스는 생각했다.
―금적선금왕(擒賊先擒王).2)
동부 이민족들 사이에 내려오는 말로, 싸움에서는 우두머리를 먼저 잡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카시우스가 난전(亂戰)을 벌일 때 항상 강조하던 것이기도 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상대가 적의 대장임을 파악함과 동시에, 카시우스는 나지막한 기합을 내뱉으며 말의 허리를 박차고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상대까지의 거리는 이제 약 삼십여 미터.
그러나 그는 주변에 세 명의 호위병만을 거느린 채, 마상용 장창으로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며 질풍처럼 돌진했다.
카시우스가 연설 하나만으로 흑사자대의 대장으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흑사자대는 상관을 암살하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몇 번이나 그의 암살을 시도했다.
뒤에서 그의 목을 노린 것만 해도 세 차례였고, 심지어는 계급장 떼고 일대일 대결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도전을 압도적인 무위(武威)로 물리쳤기 때문에 비로소 그들의 대장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모두가 검은 가면을 쓴 상태에서 붉은 가면은 대번 눈에 띄었다. 아니, 단순히 눈에 띄는 정도를 벗어나,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들을 베어 버리는 통에 다른 저승사자들보다 더한 공포로 장내를 압도했다.
이 때문에 로메루스 또한 수많은 전장을 누빈 용사답게 본능적으로 붉은 가면이 적의 대장임을 감지했다.
“네 이놈! 네가 대장이냐? 전투 중 표적이 될 것을 빤히 알면서도 혼자만 붉은 가면을 쓰다니…….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가 보구나!”
분노를 참지 못해 안면 근육을 부르르 떠는 로메루스.
곧이어 그도 말 허리를 박차고 카시우스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30m…… 20m…… 10m…….
점점 거리가 좁혀 올수록 둘의 기세는 더욱 사납고 날카로워졌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급하게 뛰었으며, 흥분한 말의 거친 울음소리, 상대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 허공을 가르는 장창의 묵직한 파공음까지 서로에게 생생하게 전달됐다.
“네 이놈! 그 건방진 목을 내놓아라!”
로메루스가 우렁찬 고함을 내지르며 장창으로 상대의 가슴을 곧게 찔러 갔다, 마치 상대의 가슴을 그대로 부숴 버릴 것 같은 맹렬한 기세로.
하지만 카시우스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과연 덩치에 맞게 힘 하나는 대단한 것 같군! 그러나 반드시 정면에서 힘으로 겨루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가면으로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오른손의 창끝을 슬며시 아래로 내렸다. 언뜻 보면 상대의 배를 겨냥하듯이.
그리곤 상대의 창이 막 가슴에 닿으려는 찰나, 그는 돌연 손목을 꺾어 상대의 창대를 비스듬히 쳐올렸다.
챙!쇠로 만든 창과 창이 서로 부딪치자, 가벼운 불꽃과 함께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청을 찢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충격을 받은 서로의 말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크게 날뛰며 요란하게 울음을 토해 냈다.
‘헉! 겉보기엔 호리호리한데 팔 힘이 대단하군!’
로메루스는 은은히 손아귀가 저려 오는 걸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둘의 대결은 시시하게도 이 한 번의 부딪침이 끝이었다.
중심을 잃은 로메루스의 말이 크게 휘청거린 순간, 카시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느새 왼손으로 단검을 꺼내 들더니 그대로 상대의 왼쪽 목덜미에 단검을 꽂았다. 눈 깜빡할 사이,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으로.
“으악!”
로메루스가 자기도 모르게 크게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목과 왼쪽 어깨의 중간 부근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것이 로메루스의 마지막이었다.
“악! 대장님을 구해라!”
뒤따르던 호위병들이 급히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그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
그다음부터는 군대와 군대 간의 격렬한 전투가 아니었다.
학살(虐殺)!그것은 우두머리를 잃고 당황하는 자들에게 행해진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흑사자대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적의 진영을 갈기갈기 찢은 뒤, 뒤이어 숲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백의 보병이 전장에 투입됐다.
그리곤 그물로 물고기를 몰 듯이 포위망을 좁히며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적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물론 그 오백의 병사는 본의 아니게 카시우스와 함께 남게 된 자들, 신분과 지위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방패막이가 됐던 그들이었다.
“으아아아악! 살려 줘!”
피와 살이 튀기며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지만, 전장에 있는 것들은 오직 피에 굶주린 악귀(惡鬼)들뿐.
악귀들이 손에 사정을 둘 이유는 없었다.
공화의 병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엔 외마디 비명을 길게 지르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불과 삼십여 분 남짓이 지난 후.
처음의 기세등등했던 공화의 병사들 중에서 제대로 말 위에 앉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도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목숨만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고, 장내에는 오직 피비린내만 진동했다.
완승(完勝)!카시우스와 그 휘하의 장졸들은 사망자가 단 하나도 없이, 부상자만 오십여 명에 불과한 완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