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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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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악― 까악!가을 특유의 맑고 높은 하늘이 무색하게, 때 아닌 까마귀 떼가 하늘을 배회하며 요란하게 울어댔다.
사방에는 온통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짓이겨진 인마의 시신들로 가득했고, 그들이 흘린 검붉은 선혈은 작은 강을 이루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득한 피비린내는 악취가 되어 코를 찔렀으며,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신음 소리는 문득 귀기(鬼氣)마저 느껴지게 만들었다.
도저히 인세(人世)의 풍경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곳.
물론 이 상황을 연출한 지옥의 사자는 카시우스가 이끄는 흑사자대, 그리고 패잔병들로 구성된 오백 명의 보병대였다.
카시우스는 천천히 말을 몰아 이 지옥을 가로질러 갔다.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약간은 도도해 보이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처참하군!’
겉으론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지옥을 한두 번 겪어 온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흡이 가빠지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괴감이나 죄책감, 혹은 후회 따위의 사치스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전장은 죽지 않으면 죽는 산지옥이고, 만약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널브러진 시신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전장!그곳에서 부끄러운 것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카시우스가 생각하는 전장이란 곳이었다.
어쨌거나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복잡한 심정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있는 동안, 주변에서는 병사들의 까마귀질이 한창이었다.
까마귀질!실제로 까마귀 떼가 시체들을 파먹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모든 전투행위가 끝난 후, 살아남은 승자들이 벌이는 일종의 마무리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적들을 확실히 죽이고, 적의 군수품과 귀중품을 수거하는 일종의 노략질…….
그 일련의 행동들이 마치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 떼와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 바로 까마귀질이었다.
이번 전투의 승자들이 벌이는 행위는 까마귀질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처참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지난밤의 참혹한 패배를 딛고, 퇴각하는 도중에 맞이한 적의 추격대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들의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만약 카시우스가 적의 또 다른 적의 추격대를 걱정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휘하 장졸들에게 지나친 까마귀질의 자제를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행위는 아마 해가 질 때까지도 계속됐을 것이다.
그렇게 대략 오 분쯤 둘러봤을 무렵이다.
“대장님!”
저 멀리 좌측에서 셉티무스와 몇 명의 병사들이 급히 그를 향해 달려왔다. 심한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두 명을 들것에 싣고 종종걸음으로.
‘누구지?’
카시우스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셉티무스가 겨우 부상병 하나 때문에 이렇게 소란을 떠는 것이 뭔가 이상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잠시 후 셉티무스와 병사들이 가까이 왔을 때,
“아!”
들것에 실린 자의 신원을 확인한 카시우스도 가볍게 놀라움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콜록! 콜록!”
그자는 부상이 심한 듯 연신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듣기에도 거북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는 얼굴을 포함한 온몸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갑주도 피에 젖어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었고, 왼쪽 목과 어깨 사이에는 단검이 꽂혀 있어 검붉은 선혈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위엄이 넘쳤을 멋진 콧수염도 선혈로 붉게 변해 있었으며, 가슴팍에 수놓아진 공화군의 흰 독수리 문양 또한 본래의 색을 잃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장대한 기골이 인상적인 공화군의 대장.
그자는 바로 카시우스의 단검 아래 쓰러졌던 적장, 로메루스였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두 번째로 들것에 실려 온 사람이었다.
화살이 박힌 오른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전투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부상에 불과했다.
화려한 갑옷은 로메루스와 마찬가지로 선혈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것은 본인의 피보다는 그를 지키던 호위병들의 피가 더 많았다.
즉, 로메루스처럼 부상이 심해서가 아니라, 단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이다.
큰 소리만 칠 줄 알지 전장에서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귀족. 물론 그자는 아군을 버리고 도망쳤던 페디토르였다.
카시우스는 고삐를 셉티무스에게 맡긴 뒤,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손을 내저어 다가오는 호위들을 곁으로 물리고, 친히 들것 옆으로 가 그 둘을 찬찬히 내려다봤다.
‘같은 일군의 대장인데…… 정말 웃기는군.’
카시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정말 부상이 심해 의식을 잃은 자와 반대로 단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 만으로 의식을 잃은 자.
그것은 마치 공화군과 제국군의 현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로메루스와 페디토르 중 먼저 의식을 차린 것은 페디토르였다.
그는 실눈을 뜨고 억지로 들것에서 상체를 일으키더니, 곧이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말을 쏟아 냈다.
“아악! 뭐가 이렇게 아픈 거야? 여긴 어딘가? 서, 설마 여기가 지옥은 아니겠지? 또 적은 어떻게 됐나? 뭘 그리 보고만 있는 건가? 내가 죽어 가는 게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일단 어서 의사를 불러라!”
부상이 깊지 않은 사람답게 우렁차고 오만한 말투. 아니, 오만하다 못해 아예 철이 없는 어린애 같은 말투였다.
그 모습을 본 주변의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은 입은 다치지 않은 건가?’
‘이런 경박한 놈이 대장이란 말인가? 젠장!’
‘명색이 대장이라는 녀석이 군대를 걱정하기는커녕 자신의 몸부터 챙기다니…….’
비록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시우스는 페디토르의 투정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끄럽군.”
그는 상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약간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어 병사들로 하여금 강제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네 이놈…… 웁! 웁!”
졸지에 건장한 병사들에게 입이 막힌 페디토르가 심하게 발버둥을 쳤지만, 카시우스는 끝내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약간은 흥미로운 눈으로 여전히 로메루스의 상처만을 찬찬히 살폈다.
‘어째서 적장을 죽이지 않는 걸까?’
당연히 주변의 장졸들은 모두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 동안이나 그저 상대를 관찰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이윽고 로메루스 또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서도 카시우스를 알아보았다.
“그대가 대장인가?”
한참 후, 그가 억지로 쥐어짜듯 쇳소리를 내며 물었다, 가까이 있어야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다, 내가 대장인 카시우스다.”
카시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페디토르를 상대할 때와 달리 진지한 어투로.
“카시우스…… 카시우스라……. 멋진 이름이군.”
“…….”
“내…… 이름은 로메루스. 제, 제국의 폭정에 하, 항거하는 대공화의 기병대장이다.”
로메루스는 더듬거리면서도 최대한 힘을 짜내 말을 이었다, 비록 패장이긴 했지만 한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품위와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이.
약간의 뜸을 들인 뒤, 로메루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 전투, 그대가 승리했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라. 만약 처음부터 레, 레오 님이 지휘를 했더라면, 어제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승리하는 건 우리였을 테니까. 내, 내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 하나, 레오 님께서 원대한 포, 포부를 펼치는 것을 끝까지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마치 레오라는 자를 신처럼 떠받들며 존경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
이 말과 함께 로메루스는 다시 피가 섞인 기침을 한참이나 토해 냈다.
주변의 모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레오? 그게 누구지?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저토록 대단하게 존경을 받는 걸까?’
‘적장의 이름은 아키에스라고 하지 않았던가?’
곁에 있던 셉티무스와 다른 장졸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했다. 로메루스쯤 되는 기병대장이 칭찬할 자라면, 그것도 지금처럼 죽음을 앞둔 상황에까지 칭송해 마지않을 자라면, 그자는 필시 범상치 않은 뛰어난 인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한데 그런 대단한 인재가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자였으니…… 좌중은 모두 의문을 갖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레오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카시우스가 보인 반응이었다.
‘레오! 아니,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Leonis Vita Audacius)! 설마 그가 지금 공화에 몸을 담고 있었단 말인가?’
그는 쇠망치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강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의 침착함이나 차가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카시우스는 아직도 그 이름을 잊지 못했다. 아니,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전쟁과 전투, 전략과 전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자! 어째서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지를 일깨워 주고, 전쟁과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의 악순환을 타파할 것을 역설한 자! 친구이자 형제요, 때론 스승과도 같았던 그자!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라는 이름을 카시우스는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적장이 말한 레오가 그가 알고 있는 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게다가 레오라는 이름은 대륙에서 그다지 드문 이름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전투에서 적이 보여 준 완벽한 포위전법, 그것은 분명 언젠가 레오가 그에게 가르쳐 준 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카시우스 님! 카시우스 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누군가가 몇 차례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카시우스.
옆을 보니 셉티무스를 비롯한 장졸들, 그리고 로메루스 또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약간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시우스 님, 이자를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그의 우측 뒤편에 시립해 있던 셉티무스가 재차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시우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그저 로메루스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
로메루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삶에 대한 집착 따위는 애초부터 안중에 없었던 듯 의연한 태도로.
이윽고 카시우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떤 처우를 원하는가?”
“쿨럭! 그…… 말은 날 사, 살려 주겠다는 뜻인가?”
로메루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는 목을 쳐서 수급을 챙기거나, 혹은 포로로 잡고 심문을 통해 적의 정황을 알아내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살려 줄 수도 있지.”
카시우스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슨 의도일까? 표정부터가 차갑고 냉정한 녀석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로메루스는 짧은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그의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짧게 숨을 몰아쉰 뒤,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쿨럭! 나, 난 무인이다. 신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살며…… 신념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무인! 따라서 내 꿈은 언제나 전장에서 죽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다! 부디…… 무인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도록 해 다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의 어투는 처음과 달리 끝으로 갈수록 더욱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마치 마지막 모든 것을 짜내기라도 하는 듯이.
로메루스는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사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