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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6화)


자신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주고, 포로로 잡아가 자신의 전공을 위한 노리개로 쓸 거라 생각했다.
전장에서 사로잡힌 포로는 그것이 당연한 신세였으며, 자신 또한 그런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달랐다.
“그 말…… 받아들이기로 하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옆구리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장엄한 의식을 거행하듯 천천히 검끝으로 상대의 목을 겨눴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고…… 고맙다. 다만 그대 같은 장수를 진작 만나지 못한 게 아쉽고, 그대와 레오 님의 결전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만약 내 예감이 맞는다면 그대는 언제고 우리 레오 님과 전장에서 칼을 맞대게 될 것이다.”
로메루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이 로메루스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들것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고, 잠시 후 심장을 관통한 상대의 검을 바라보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명은 없었다. 한탄도 없었고, 후회도 없었다. 그의 죽음은 오로지 편하고 홀가분하기만 했다.
카시우스는 잠시 감상에 젖은 눈으로 상대의 시신을 바라봤다, 피가 흥건히 흐르는 가운데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적장의 시신을.
“적이지만 의연한 자였다. 조촐하게나마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고 예를 갖추도록…….”
그는 한참 후에야 특유의 냉정함을 되찾고 돌아섰다.
페디토르의 처분은 그다음이었다.
페디토르는 눈앞에서 로메루스가 죽는 모습을 보고 황망한 표정만 짓고 있다가, 카시우스가 자신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본 다음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발버둥을 쳤다.
그래 봐야 여전히 건장한 병사들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 말 없이 페디토르를 노려보길 한참.
이윽고 카시우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곁에 있던 셉티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나 묻겠다. 평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 뭐라고 했는가? 내가 우리 흑사자대에 필요 없는 존재를 어떤 유형이라고 정의했는가?”
“네! 이기주의자! 자신만 알고 동료를 배신하는 이기주의자를 가장 경멸한다고 하셨습니다!”
셉티무스는 차렷 자세로 크게 대답했다. 내심으로는 갑작스런 질문의 의도를 몰라 당황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크고 힘차게 대답했다.
카시우스의 싸늘한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러면 내가 그런 인간쓰레기들을 어떻게 한다고 했지?”
“죽음! 동료를 배신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예외는 있는가?”
“예외는 없습니다! 설사 그것이 대장님이라 해도 동료를 버리는 자에겐 오직 죽음뿐입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면서도 씩씩하게 대답하는 셉티무스.
카시우스는 셉티무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나직하면서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아는군. 그런데 언제부터 내 말이 이렇게 우습게 됐는가?”
약간은 짜증이 섞인 책망하는 어투.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셉티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지만, 카시우스의 굳어진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동료를 배신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자에겐 오직 죽음뿐이라고. 그런데 지금 버젓이 내 눈앞에서 숨 쉬고 있는 저 돼지 녀석은 뭔가? 너희는 언제나 내 명령만을 듣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대체 언제부터 내 명령이 이렇게 우스워진 건가?”
그는 여전히 페디토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과 어투로 셉티무스를 꾸짖었다.
“아!”
그제야 셉티무스는 상관의 의도를 깨닫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리둥절해 있던 페디토르도 그 의도를 깨닫곤 안색이 사색이 되어 더욱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카시우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나 카시우스, 그리고 우리 흑사자대는 자신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비겁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자는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피아를 막론하고 결코 예외가 없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맡겨 놓았던 말에 올랐다. 그래도 자신의 상관이었던 페디토르에게는 끝끝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오히려 그는 페디토르를 바라보는 것조차 역겹다는 듯, 그리고 자신의 검에 그런 놈의 피를 묻히는 것 또한 아깝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보고서는 셉티무스, 네게 일임하겠다. 돼지 녀석뿐만 아니라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던 놈들은 모두 적과 맞서다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처리하도록……!”
“Etiam, mei dominus!”
셉티무스가 절도있는 몸짓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으아아악! 살려 줘!”
“이, 이봐……! 아니, 카시우스 님!”
곧이어 페디토르와 그를 따르던 상급 장교들의 절규가 길게 울려 퍼졌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그들의 비명은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사그라졌다.
검은 사신!그 별명처럼 방금 전까지 카시우스가 서 있던 곳에는 오직 싸늘한 죽음만이 존재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카시우스가 아무런 대가가 없이 적장을 쉽게 죽인 것은 평소의 행동으로 봤을 때 너무도 의외였다.
모순에 찬 이중적 행동이었으며, 실제로 일부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겪어 본 자들의 평가는 달랐다.
셉티무스를 비롯해 그와 직접 전장을 누볐던 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카시우스의 매력은 비정하지만 비열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그는 비겁하고 무능한 자에겐 피아를 가리지 않고 한없이 차갑고 비정했다.
그러나 한 번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겐 신분과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예의를 지켰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원칙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항상 우수한 인재가 넘쳐 났던 것이며, 그가 약간은 독선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의 낭만주의자!그것이 바로 카시우스라는 남자였다.





제2장 귀로(歸路)



1

카시우스가 로메루스의 매복 부대를 전멸시키고 정확히 20시간 뒤, 공화군의 이차 추격 부대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
비록 첫 등장이라 할 수 있는 아조루스 전투에서는 일개 하급 참모로 출전하여 본연의 실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차 추격 작전에서는 마침내 사천 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장교가 되어 본격적으로 전장에 투입된 것이다.



2

퇴각 사흘째 되던 날의 정오 무렵.
카시우스가 처음 보고를 받은 것은 붉게 물든 산기슭을 가로질러, 아군의 제7요새를 향해 한창 북상하던 중이었다.
그가 막 점심 식사를 겸한 약간의 휴식 시간을 명령하려는 찰나, 사방으로 보냈던 척후병 중 하나가 급히 말을 몰고 그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척후병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보고했다.
“보고드립니다. 후방 5km 부근에 적의 추격대가 출현했습니다. 숫자는 최소 삼천 이상. 이동 속도가 일반적인 부대보다 빠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기병과 경무장 보병들로 구성된 것 같습니다.”
굳이 내용을 볼 것도 없이, 그저 표정과 말투만 보더라도 상당히 긴박한 보고였다.
그리고 그가 뭐라 대답을 하기 전,
“헉! 벌써? 이건 너무 빠르군!”
언제나처럼 그의 곁을 따르던 셉티무스가 먼저 깜짝 놀라며 카시우스를 바라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장교들도 하나같이 크게 헛바람을 들이켜거나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전혀 예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고 적의 이차 추격대가 닥칠 것이라 예상은 당연히 했던 바다.
그래도 막상 그 예상이 현실로 되자, 당황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예외였다. 상기된 셉티무스와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듯 냉정할 따름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장교들의 입을 다물도록 한 뒤, 나직한 어조로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대응이 신속하면서도 끈질긴 적이군. 하긴, 나라도 더욱 강력한 추격대를 보내 적의 패잔병을 공격했겠지.”
그의 어투는 오히려 적의 대응에 감탄이라도 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척후병에게 담담히 물었다.
“예상되는 적의 이동 경로는? 현 속도를 봤을 때, 적이 아군을 따라잡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척후병의 반응이었다.
“저, 그게…….”
그는 황당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뭔가? 어째서 그렇게 뜸을 들이는가?”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는 카시우스.
분명 척후병은 그동안 여러 차례 정찰 임무를 수행했던 베테랑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렇게 말끝을 흐린다는 모습에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곧이어 셉티무스가 재차 재촉을 해서야, 척후병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적의 이동 경로는 아군의 것과 동일합니다만…… 적의 이동 속도가 조금 이상합니다. 아군이 속도를 높이면 같이 속도를 높이고, 반대로 아군이 휴식을 취하면 같이 휴식을 취하며, 계속해서 아군과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척후병이 보고를 하면서도 계속 머뭇거렸는지.
“……?”
셉티무스와 장교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동 경로가 아군의 것과 동일하다면 적도 척후병들을 파견해 아군의 위치를 정확히 감지하고 있다는 뜻인데……. 아군을 따라잡지 않고 계속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건 무슨 뜻일까요?”
잠시 후, 셉티무스가 조심스럽게 카시우스에게 물었다. 그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고 자부하는 셉티무스였지만, 이런 황당한 추격전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적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건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뭐지? 지난번엔 추격 부대가 없어서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추격 부대가 있어서 문제인가? 아무래도 역시 적의 대장은 상당히 재미있는 자인 것 같군.’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적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음이 분명할 터. 이것은 어쩌면 카시우스에 대한 도전, 로메루스의 매복을 간파하고 그들을 섬멸한 카시우스에 대한 일종의 도전일지도 몰랐다.
아직 적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결정을 내리는 것은 위험했다.
때문에 결국 카시우스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한 가지뿐이었다.
“일단 계획대로 후퇴를 진행하는 한편, 가장 가까운 제7요새로 급히 병사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라! 단, 언제든지 적과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며, 또한 이제부터는 셉티무스가 직접 백인대를 지휘하여 척후 활동을 강화하도록!”
언제나처럼 그의 결정에 반론은 없었다.

―Etiam, mei dominus!

곧이어 셉티무스와 휘하 장병들이 오른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큰 소리로 복명했다.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이런 장난 같은 기묘한 움직임을 보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레오니스…… 설마 그가 추격 부대를 지휘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직감했다, 이제부터 펼쳐질 본격적인 후퇴 작전이 그다지 순조롭지는 않을 것임을.

* * *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적의 기묘한 움직임은 계속됐다. 그들이 움직이면 적도 움직이고, 그들이 휴식을 취하면 적도 휴식을 취했으며, 날이 저물어 그들이 숙영을 하면 적도 숙영을 했다. 마치 그들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혹은 그들과 싸울 의도가 전혀 없다는 듯이.
그사이 적과의 조우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셉티무스가 지휘하는 흑사자대의 척후병들은 적의 척후병들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조우하며 신경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