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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7화)
그러나 카시우스가 적의 의도를 파악할 때까지는 전투를 피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게다가 적 또한 아직은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던 까닭에, 척후병들은 상대를 보면 암묵적으로 자리를 피하는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과연 적의 의도는 무엇인가? 전투를 하자는 건가, 아니면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건가?
시간이 흐를수록 적의 의도는 더욱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정면 대결을 벌일 수도 없었다.
적은 로메루스의 매복 부대가 전멸한 현장을 조사함으로써 그들의 병력이 얼마인지,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무엇이 장기인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반면 카시우스는 적의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 어떤 의도인지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섣불리 전투를 벌이는 건 위험했다.
‘카드 게임을 예로 들었을 때, 현재 우리는 갖고 있는 카드를 모두 보인 상태다. 반면 우리는 적이 수중에 카드를 몇 장이나 들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지. 이런 상황에서 싸우면 그 결과는 오직 패배뿐. 전투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고 나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전투를 망설인 이유였다.
―싸워서 이기지 않고, 이겨서 싸운다.
언뜻 말장난 같지만, 사실 이 말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전략과 전술3)을 정확히 대변한 것이었다.
그는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불리한 상황이라도 그는 그 불리함 속에서 반드시 아군의 유리한 점을 찾았고, 그 이점을 활용하여 이기는 전투만을 수행했다.
사실 그도 적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가 만약 적장이라면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하고 일단 끈질긴 압박으로 아군의 평정심을 무너뜨린다. 적의 일차 매복 부대에게 승리를 거뒀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쫓기는 입장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그리고 적은 아군의 평정심과 인내가 한계가 다다랐을 즈음,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지형을 골라 일거에 승부를 건다.’
그도 이러한 적의 의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적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문득 고양이게 쫓기는 쥐가 생각났다.
고양이가 나타나면 쥐는 사력을 다해 도망친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쥐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놓아준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쥐는 결국엔 막다른 길목에 몰리고, 곧 고양이의 노리개가 되어 참혹한 결과를 맞이한다.
‘지금 우리가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가 된 건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그가 예상한 최악의 상황은 단순히 적이 아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다가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의 직접적인 공격은 그가 예상한 여러 가능성 중 그나마 제일 나은 것이었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사실 따로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레오니스.
이어진 전황은 그가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했던 대로 전개됐다.
3
그것은 괴로움과의 싸움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듭되는 적의 집요한 견제,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긴장과 불안의 연속, 그리고 이로 인해 조금씩 나타나는 사상자들과 낙오자들까지…… 카시우스와 흑사자대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특히 더욱 괴로운 것은 신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였다.
―초조하다! 이기든 지든 차라리 한바탕 전투라도 벌였으면 좋겠다! 과연 적은 언제, 어디서 전면전을 감행할 것인가?
셉티무스를 포함한 모든 흑사자대원들의 생각은 이러했다.
즉, 카시우스가 우려했던 대로 적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형의 압박을 가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던 시간이 흘러 닷새가 지났다.
카시우스와 흑사자대의 초조함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정찰을 보냈던 척후병 하나가 급히 말을 몰고 돌아왔다.
“보고드립니다! 저 멀리에서 일단의 부대가 나타났습니다. 숫자는 대략 오천가량.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붉은 매 한 마리와 일곱 개의 작은 별이 수놓아진 깃발을 힘차게 휘날리고 있습니다!”
“붉은 매와 일곱 개의 별?”
그 순간, 주변의 모두는 크게 웅성거렸다, 희망과 기대로 가득한 놀라움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어떤 자는 옆 사람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어떤 자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크게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자도 있었다.
쉽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
잠시 후, 환한 웃음을 머금은 정찰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7요새 수비군이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러 왔습니다!”
병사들의 환호에 방점을 찍는 보고.
그러나 그때, 카시우스의 안색은 전에 없이 어두워졌다.
비록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들에게 내색을 하진 못했지만, 그는 원군이 나타난 것에 웃으며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가 설마 아니길 바랐던 최악의 상황, 그것이 결국 현실로 되었다.
* * *
수십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의 막사.
십여 개의 커다란 횃불이 춤을 추듯 일렁이며 사방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그리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양탄자가 깔려 있어 아늑한 느낌마저 주는 가운데, 막사를 빙 둘러 호위하듯 스물네 명의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뒷짐을 진 채 석상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출입구를 기준으로 정면에는 제국의 상징인 흰 바탕에 붉은 매 문양의 깃발이 가로로 넓게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시 그들이 제7요새의 소속임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작은 별이 수놓아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중앙에는 원형의 커다란 회의용 탁자와 십여 개의 간이 의자가 있었으며, 다시 탁자 위에는 인근의 지형이 입체적으로 정교하게 묘사된 커다란 지형도가 펼쳐져 있었다.
바로 제국의 야전용 막사의 전형적인 모습.
이러한 막사의 중앙, 탁자를 중심으로 제국의 붉은 군복을 입은 십여 명의 장교들이 야전용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같은 제국의 장교들이었지만 그들의 옷차림이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우선 정면의 깃발을 중심으로 좌측에 앉은 장교들은 비교적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힘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반면 우측에 앉은 장교들은 옷차림이 남루하고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여기서 우측의 장교들은 카시우스와 패잔병들의 장교들, 그리고 좌측의 장교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제7요새의 지휘관과 그 휘하의 장교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네!”
좌측의 가장 상석에 앉은 장교, 구원 부대의 지휘관이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자신의 곁에 앉은 카시우스를 바라보며.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당분간 질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군.”
카시우스 또한 모처럼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반갑게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비록 상대가 자신보다 계급이 위였지만, 또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실로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했다.
지금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상대의 이름은 소브리우스 오디 레피두스(Sobrius Odi Lepidus).
그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제7요새의 책임자였다.
단순히 같은 군에 소속된 사이는 아니었다. 나이는 자신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사관학교의 동기였고, 또한 학도 시절 카시우스의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소브리우스는 귀족 출신으로 군에 입대한 청년 장교의 전형인 자였다.
신분은 귀족이지만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돈이나 권력이 없는 중산층의 하위 귀족.
그런 이름뿐인 귀족에게 있어 유일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장 확실한 출세의 수단은 사관학교를 거쳐 군의 장교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는 착실하게 출세의 길을 걸었다. 모나지 않은 둥근 성격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어 남들보다 빠르게 승진했고, 또한 임관한 지 불과 칠 년 만에 군의 주요 요직을 거친 끝에 최전방 요새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전형인 것은 비단 그가 거친 요직이나 현재 그의 지위만이 아니었다. 주름이 날카롭게 잡힌 단정한 붉은 군복, 중간 키의 적당한 체형과 단정히 빗어 넘긴 짧은 금발, 그리고 깔끔하게 면도한 각진 턱과 적당히 고집 있어 보이는 푸른 눈동자까지…… 단정한 그의 옷차림과 외모 또한 모두 교본에나 나올 법한 제국군 장교의 전형이었다.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도 여전하군. 게다가 벌써 요새의 수비대장이 되다니…… 우리 동기들 중에서는 자네가 제일 빠르군.”
카시우스는 상대를 향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평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농담까지 건넸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상대.
만약 여유가 있다면 몇 시간이고 옛이야기를 하며 회포를 풀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상황이 상황인만큼 그들의 인사는 한가롭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소한 인사 몇 마디가 더 오간 후, 카시우스와 소브리우스를 비롯한 장교들은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먼저 셉티무스가 카시우스를 대신하여 그동안의 후퇴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기습을 통해 로메루스가 이끄는 적의 매복 부대를 물리치고, 그 이후로 거듭된 적의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간신히 아군의 지원군과 조우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단, 그 과정에서 카시우스가 자신의 상관인 페디토르를 미끼로 썼던 사실, 혹은 카시우스가 적장을 포로로 잡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사실 등은 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로 각색됐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참의 설명이 있은 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끝에 소브리우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사히 귀환한 게 정말 다행이군. 물론 페디토르 님이 불의의 사고로 전사하신 게 조금 아쉽기는 하네. 게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자네나 자네의 부하들은 전투의 패배에 따른 문책을 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고…… 일단 무사히 돌아온 걸 감사히 여기도록 하지.”
그는 카시우스와 그의 장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그와 달리 어둡고 무거운 기색이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닐세.”
다시 평소의 차가운 표정과 어투로 돌아왔지만, 그의 말은 어쩐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돌아간 이후의 문책을 걱정하는 건가? 물론 돌아가면 각종 청문회와 처벌 위원회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그러나 대장군님께서 자네와 흑사자대를 높이 평가하고 계시고, 나 또한 자네들을 변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네.”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겠다니, 고맙군.”
“물론 자네들이 돌아가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은 하지 못하네. 그러나 그 처벌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소브리우스가 다시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카시우스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네. 내 말은 아직 우리의 후퇴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적의 이차 추격대가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제7요새의 정예 병사 오천이 자네들과 함께하는 이상, 적도 더 이상 자네들을 공격하지 못할 텐데……?”
여전히 카시우스가 말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소브리우스.
이에 카시우스는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나직이 대답했다.
“돌아간 이후의 문책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적이 이제부터 아군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도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러면 대체 뭐가 중요하고, 뭐가 걱정이라는 건가?”
약간의 뜸을 들인 뒤, 카시우스는 주위의 장교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적이 공격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적이 공격을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왜 적의 추격대는 거듭된 기습으로 아군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넣고 대규모의 진짜 공격을 가하지 않았을까? 왜 적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않았을까? 왜 적은 우리가 자네들 지원군과 합류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을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약간은 우문(愚問)에 가까운 이상한 질문. 그러나 이어서 일순 정적이 흐를 뿐, 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