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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8화)


한참 후에야 소브리우스가 약간은 자신이 없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글쎄? 어쩌면 적은 자네들이 지원군과 합류하는 시점을 잘못 계산했거나, 혹은 자네들의 저항이 너무도 완강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잡지 못한 게 아닐까?”
“그건 말이 되지 않네. 일단 적은 이곳의 지리에 밝아 치고 빠지는 전법을 능숙히 구사하는 자들이네. 그런 자들이 우리가 합류할 시점을 잘못 계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그리고 저항이 완강하다고 하여 패잔병들을 그대로 놓아준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고.”
“그렇다면 자네의 말은 뭔가? 적에게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는 뜻인가?”
카시우스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재차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잠시 후에야 여전히 무거운 어투로 대답했다.
“처음 적의 이차 추격대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후, 난 적의 행동을 두 가지 경우로 상정했었네. 적이 기습으로 기회를 보다가 일거에 아군을 공격하거나, 혹은 아군을 공격하는 척 시간을 끌고 다른 것을 노리는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 우리가 구원군과 합류함으로써 적의 의도는 명확해졌네. 역시나 적의 노림수는 두 번째 경우, 즉 도망치는 패잔병을 미끼로 하여 다른 것을 노렸던 것이네. 어쩌면 적의 목적은 처음부터 패잔병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패잔병들을 이용하여 아군의 지원부대를 밖으로 끌어내는 게 아니었을까?”
“지원부대를 밖으로 끌어낸다? 그렇다면 적의 다른 목표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그때였다. 소브리우스를 비롯한 모두의 궁금증에 절정에 달했던 순간, 카시우스가 다시 막 말을 이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막사 밖에서 돌연 요란하고 다급한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 막사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피와 땀으로 얼룩진 젊은 병사 하나가 예를 갖추지도 않은 채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무슨 일인가?”
일순 모두의 시선이 병사에게 집중됐다.
사실 이 자리는 일반적인 회의가 아니었다. 비록 전체 병력은 일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상급 장교들만이 참석한 중요한 회의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예를 갖추지도 않고 불쑥 병사가 들이닥쳤기 때문에 좌중은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병사는 대답 대신 한참이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소브리우스가 몇 번이나 말을 재촉한 다음에야, 겨우 왼쪽 무릎을 꿇는 예를 갖추고 대답했다. 여전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긴박한 목소리로.
“헉…… 헉…… 보, 보고드립니다. 방금…… 제7요새가 적에게 함락됐습니다. 적의 숫자는 불명(不明)…… 살아서 간신히 요새를 빠져나온 자들은 고작 천여 명에 불과합니다.”
“뭐야?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소브리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쾅! 하고 거칠게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오랜 분쟁 속에서도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요새가, 게다가 오천 명의 병사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단단한 요새가, 자신이 요새를 비운 지 불과 나흘 만에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열 배가 넘는 병력이 덤벼들어도 함락되지 않던 최고의 요새가 함락됐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적의 병력은 대체 얼마란 뜻인가?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요새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데…… 적은 대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요새에 접근했단 말인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병사를 향해 고함치는 소브리우스.
그는 너무도 당혹스러운 탓에 어떻게 화를 내야 되는지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하긴, 그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경험 많은 장교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만.
하지만 이어진 병사의 대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그게…… 적이 어떻게 요새를 공격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분명 경계를 단단히 하고 요새를 지키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 요새는 적의 병사들로 가득했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요새를 빼앗겼다고? 적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단 말이냐, 아니면 땅에서 불쑥 솟았단 말이냐?”
소브리우스가 더욱 크게 고함을 질렀지만, 병사는 그저 말끝을 흐리며 움츠러들 뿐이었다.
잠시 후, 분위기를 진정시킨 것은 카시우스였다.
“세상에…… 특히 전장에 있어 절대라는 말은 없다. 언제든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등장하는 곳,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전장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하듯이 비교적 담담한 어투로 나직이 말했다. 이런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침착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그런데 신기한 것은 카시우스가 말한 다음이었다.
약간은 차가운 듯한 그의 말이 거칠어진 분위기를 단숨에 가라앉혔던 것이다, 마치 타오르던 불길에 갑자기 차가운 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이.
오히려 좌중은 방금 전의 격앙된 감정마저 까맣게 잊고,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카시우스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병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도 뭔가 알아낸 것은 없나? 작은 것이라도 상관없네. 기억에 남는 뭔가가 있다면 있는 그대로 내게 말해 주게.”
카시우스와 다른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탓일까?
“저…….”
병사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크게 숨을 몰아쉬어 마음을 진정시키곤 대답했다.
“워낙 경황 중이어서 정확한 것인지는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요새를 빠져나오는 도중 적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자의 이름을 얼핏 들었습니다.”
“적장의 이름? 적장은 누구였나? 혹시 이번 아조루스 전투의 공화 측 사령관, 아키에스였나?”
“그건 아닙니다. 적들의 유명한 장군 정도는 저도 몇 번 이름을 들어 본 바가 있습니다만…… 이번 요새에서 들은 이름은 저도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
“그자의 이름은 레오니스! 젊은 나이에 직급 또한 낮은 것 같았지만…… 병사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카시우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3장 제7요새 공략전(I)



1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
그는 처음부터 패잔병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단 제국 전체의 거국적인 입장에서 보면 수천 명의 패잔병은 그다지 중요한 숫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거듭된 내란으로 군사력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각지에서 제국을 우습게 보고 반란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상비군만 해도 50만 명에 이르는 대륙의 주인인 제국이었다.
따라서 겨우 수천 명의 패잔병들은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작은 흠집에 불과했다.
게다가 상대 또한 패잔병이긴 해도 전력을 상실한 일반적인 패잔병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패잔병들.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 참가하지 못해 울분에 쌓인 특수부대였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억지로 패잔병의 추격전을 벌였다면 그들 또한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아니, 어쩌면 나와 흑사자대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오히려 추격을 벌인 그들이 패배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오니스의 입장에선 아무리 상대가 대단한 자들이라고 해도 일껏 얻은 승리를 이대로 허망하게 보내기엔 아쉬웠을 것이다.
원래 전투란 승리가 전부가 아니라, 승리한 이후의 마무리가 더 중요한 법이니까.
그래서 레오니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저 패잔병들을 미끼로 이용하자. 미끼를 이용해 난공불락으로 불리는 요새를 탈취하자.

지형과 지리에 밝은 이점,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 압박하는 전법으로 패잔병을 괴롭힌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심리적으로 쫓기는 패잔병들은 당연히 가장 가까운 요새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요새를 지키는 병력은 자연스럽게 평소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레오니스가 어떤 길로 우회하여 요새에 접근했는지, 그리고 어떤 마법으로 불과 나흘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요새를 탈취했는지는 나 또한 알지 못한다.
기변(奇變)의 천재라 불리는 레오니스라면 분명 일반적인 상식을 비웃는 기발한 전법을 사용했을 테니까.
다만 쫓기는 입장에서는 그의 전법에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고, 만약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계획은 성공했다. 그는 수만 명으로도 함락시키기 힘든 요새를 불과 수천 명의 병사들로 탈취했고, 요새 내에 있던 각종 군수물자 또한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이는 단순히 요새 하나가 아니라 장차 제국을 압박할 수 있는 교두보를 얻은 것이며, 레오니스 개인적으로도 공화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돌 하나로 네 마리의 새를 잡은 셈.
단,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만 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속한 ‘공화’의 최대 장점이자, 동시에 최대 약점.
절대적 하나보다 평등한 다수에 의해 대의(大義)가 결정되는 공화의 특징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4)
요새를 장악한 직후, 그는 시기하는 반대파의 모략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의회에 소환되었고, 이것은 나에게 요새를 탈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제7요새 탈환전.
이것은 오래도록 지속될 그와 나의 질긴 운명을 알리는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2

그들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카시우스와 흑사자대에게는 이대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아조루스에서 패배한 것으로도 부족해, 제7요새마저도 적의 손에 빼앗기도록 했다.

이것은 보나마나 최소 사형감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조루스의 패배는 카시우스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적처럼 제국은 누군가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고, 현재로써 그 대상은 카시우스와 흑사자대밖에 없었다.
소브리우스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는 군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고 군복을 벗을 수밖에 없을 터.
따라서 군대만이 유일한 출세 수단인 하급 귀족 출신에게는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했던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7요새를 재탈환하자고.
모든 지휘권은 카시우스가 갖기로 했다. 비록 직급과 직위는 소브리우스가 위였지만, 나이나 병사들 사이에서의 명성도 그가 조금 더 위였지만, 그는 모든 지휘권을 카시우스에게 넘겼다.
그가 카시우스를 믿은 이유는 단순했다.

―사관학교 역사상 손꼽히는 군사적 재능의 소유자이자, 동기생 중에서 가장 월등한 실력을 자랑한 천재.

이것이 바로 그가 아는 카시우스였기 때문이다.
사실 무모했다. 언뜻 보기엔 그저 무모한 도전에 불과했다.
견고한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에는 그 열 배 되는 병력이 필요하다는 병법의 가르침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변변한 공성무기 하나 없는 그들이 견고하기로 유명한 제7요새의 재탈환에 도전하는 것은 그저 무모한 도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카시우스!장차 군사(軍史)상 수많은 전설을 만들게 되는 그에게 있어, 제7요새 탈환전은 그저 불가능만은 아니었다.

* * *

“정말 자신있나?”
소브리우스가 말했다. 셉티무스 외 다른 장교들을 모두 물리고 카시우스와 은밀히 작전 회의를 벌이기에 앞서 그는 재차 카시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