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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태극혜검 1권 (1화)
一章. 거두어져 이름 지어지다



무당파에서 진 노인의 위치는 참으로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도사가 아닌 단순히 도경을 보관하는 진선각의 청소를 담당하는 잡일꾼에 불과했다. 하나 무당파의 그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올해로 예순일곱이 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당산에서 생활해 왔고 장문인과 격의없이 대하는 동배라 장로라 해도 존대를 하며 존중을 표했다.
물론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잡일꾼이면서도 고서에 해박하여 잊혀진 무당파의 절기가 적힌 비급이나 도교의 경전이 간간이 발견되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존재였다.
오늘도 진 노인은 고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젊은 도사의 안내를 받아 무당파 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헥헥! 아이고오. 현은 이놈아! 천천히 좀 가자!”
진 노인이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듯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외쳤다.
그러자 현은이 펄쩍 뛰며 진 노인을 붙잡아 일으키려 들었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장문인께서 최대한 빨리 모셔 오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헥헥! 그거야 네놈 사정이지! 이러다 숨이 차 골로 가면 네놈이 책임질 테냐? 이 나이에 어찌 젊디 젊은 네놈 발걸음에 맞출 수 있겠느냐? 참으로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놈이로고!”
하지만 그런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이순을 훌쩍 넘긴 진 노인은 힘차게 현은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다시금 바위 위에 걸터앉아 버렸다.
이에 현은이 답답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러 대자 진 노인이 짐짓 놀란 얼굴로 말했다.
“오호! 네 녀석이 꼴에 무당의 도사라고 발을 굴리는 것 하나에도 태극의 이치가 느껴지는구나!”
웃기는 소리다. 무당파에서 태극이 잊혀진 지 어느덧 일 갑자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현은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허억! 거, 진짜! 제가 누차 태극! 아, 아니, 그것을 입에 담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무당의 치부와 같은 거라 높은 분들께서 그 소리를 들었다가는 아무리 진 노인이라도 경을 치실 겁니다!”
진 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무당의 치부.
백오십여 년 전 우화등선한 장삼봉이 만들어 낸 무림 역사상 가장 현묘한 무리인 태극.
이를 잊었다는 건 무당파 수뇌부의 치부였고, 전 무림을 대상으로 봤을 때는 무당파 전체의 치부였다.
더욱이 태극을 대표하는 무공인 태극검과 태극권의 구결이 온전히 전수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이를 대성하는 자가 나오지 않고 있으니, 무당파의 인물이라면 이를 치부를 넘어 치욕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니 현은이 지금처럼 펄쩍 뛰며 주의를 주는 것도 하등 이상할 바 없었다.
그러한 사정을 진 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무당에서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현은이나 다른 무당의 도사들보다 더욱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의 생각은 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거 완전 웃기는 소리구나! 그래, 상처가 있으면 까발려서 고칠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감추기만 한다고 절로 치료가 된다더냐? 그러다 썩어 문드러져 아예 죽어 버리면 어쩌려고!”
“…….”
현은은 진 노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진 노인의 말이 옳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은이 아무런 말이 없자 진 노인은 지루했던지 화제를 돌렸다.
“쩝. 그건 그렇고 이번에 발견된 책은 무엇이라더냐?”
“아, 그게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책이 아닙니다.”
진 노인은 책이 아니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책이 아니라면 왜 나를 불러?”
“책은 아니지만 등선암에서 책이 들어 있을 거라 짐작되는 목함이 발견되었습니다. 등선암이라면 예전에 장삼봉 조사께서 등선하신 곳으로 유명한 곳이지 않습니까? 그 목함이 족히 백오십 년은 된 것일 수도 있으니, 혹여 무턱대고 열다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죠. 그래서 아무도 손대지 않게 해 놓고 영감님을 모시러 온 겁니다.”
현은의 설명에 진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건 잘한 일이다. 거 성격 급한 장문인께서 예전에 한 번 크게 데이시더니, 이번에는 제대로 조치를 취하시는구나.”
현 무당파의 장문인 유극 진인(逾極眞人)은 현천검(玄天劍)을 극성까지 연마하여 강호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절세의 고수였다. 다만 도사답지 않게 성격이 급하고 화통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년 전, 지금과 같이 목함을 발견되자 진 노인을 부르지 않고 성급히 여는 바람에 안에 든 책이 바스러져 버린 일이 있었다. 진 노인은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진 노인은 그 뒤로도 한참을 쉰 후에야 다시 걷기 시작했고, 한참 후에야 등선암이 위치한 높다란 절벽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참.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진 노인은 위를 올려다보다가 목을 삐끗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높은 절벽 위에 대체 어떤 방법으로 건물을 지은 건지 신기해했다.
현은이 그런 진 노인에게 등을 보이고 앉으며 말했다.
“자, 빨리 업히세요.”
무공을 모르는 진 노인이 직접 이런 절벽을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현은이 업고 오르려 했다.
“왜 어린 도사들이 아닌 네 녀석이 직접 날 데리러 왔나 궁금했는데,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현은은 이미 이립에 가까운 나이였고, 그의 사부인 묵유자(默流子)가 장문인인 유극 진인의 둘째 제자였기에 이런 심부름을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어쨌든 현은에게 업혀 절벽을 오른 진 노인은 절벽 위 공터에 내려서자마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노도인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노도인이 바로 현 무당파의 장문인인 유극 진인이었기 때문이다.
“거 아직 목함을 열지 않으셨다는 말에 성격이 좀 고쳐졌나 싶었더니, 여전하십니다!”
“응?”
유극 진인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진 노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사당 앞에 있던 서 있던 십여 명의 도사들 중에 앞으로 달려 나온 사람은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유극 진인은 그것이 꽤나 멋쩍었는지 긴 수염을 긁어대며 진 노인에게 말했다.
“진 노인의 입심도 여전하구먼. 그나저나 빨리 오게나. 다른 곳도 아닌 등선암에서 나온 목함이라네. 장삼봉 조사께서 등선하신 이후로 아무도 쓰지 않은 곳이니, 족히 백오십 년은 된 목함이 틀림없을 게야.”
유극 진인에게 이끌려 사당으로 향하던 진 노인의 눈에 사당의 낡은 편액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쓰여진 무당파란 글귀가 들어왔다.
‘무당파라…….’
등선암은 장삼봉이 등선한 곳일 뿐만 아니라, 말년에 기거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바로 이곳 등선암이 곧 무당파였으리라.
그런데 이제는 수백 채의 건물을 지닌 대문파로 변모하였으니, 진 노인은 세월의 힘이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세월의 힘이라기보다는 그 세월 동안 이런 변화를 만들어 낸 인간의 힘이야말로 대단한 건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는 진 노인이었지만 조사인 장삼봉이 지금의 무당파를 보고 기뻐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규모가 그때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커졌지만, 무공에만 빠져 제대로 도를 닦는 도사는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장삼봉은 무에 있어서 당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절대 고수였지만, 도에 대한 지식과 이해에 있어서도 어느 도사보다 깨우침이 깊었다.
일평생을 무당에서만 지내며 도경을 공부해 온 진 노인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장삼봉의 주석이 달린 도경들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장삼봉 진인의 무공은 그 깊은 도가의 깨달음에서 연유한 것일진데, 당금 무당의 도사란 놈들은 도경만 보면 골이 아프다며 무경만 파고들고 앉았으니, 쯧쯧.’
진 노인이 그런 생각을 하며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당의 끝에는 조그마한 진무대제의 목상이 놓여져 있었다.
진 노인은 그 낡고 단출한 목상을 보자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호오. 금전(金殿)에 있는 커다란 황금상과는 참으로 대비되는 목상입니다. 잘나가는 무당파도 이런 때가 있었군요.”
유극 진인은 진 노인의 말에서 비꼬는 기색을 느끼고는 움찔거렸지만 이내 못 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지금 그의 주의는 모조리 목함에 쏠려 있었기에 진 노인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 노인은 오히려 그런 유극 진인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다.
수백 채의 건물과 수천 명의 사람들을 거느리는 대무당파의 장문인이라는 자가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의 비꼼은 계속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유 자 항렬의 장로들과 연배가 비슷하고, 가진바 기술로 문 내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해도 무당파 내에서의 신분은 고작 잡일꾼.
이 이상 흉을 봤다가는 유극 진인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주변의 장로들과 제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방금 전에 한 말 때문인지 몇몇 장로들의 시선이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진 노인은 그런 장로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양 피하며 유극 진인의 눈길을 따라 목함에 시선을 가져갔다.
“호오!”
진 노인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겉보기엔 단순한 목함에 불과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이 목함이 백오십 년 이상 된 오래된 물건임을 알아본 것이다.
진 노인의 감탄사에 유극 진인이 기대감이 담긴 얼굴로 재빨리 물었다.
“어찌 그러는가?”
“백오십 년 이상 된 것은 확실합니다.”
“오오!”
유극 진인의 감탄사를 뒤로하고 진 노인은 그를 지나쳐 목함으로 다가갔다.
‘이건 진짜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확실히 알겠다. 장식이 화려하다거나 상품(上品)의 목재를 쓴 목함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진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전의 무당파는 비싼 목함 따위에 책을 보관할 정도의 재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 이건…….’
한순간 진 노인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당연히 이어지는 말 역시 부정적이었다.
“별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유극 진인이 기겁하며 반문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이 목함, 노송도 아니고 그저 흔하디흔한 소나무로 만든 목함입니다. 백오십여 년 동안 열었던 흔적도 없으니, 안에 책이 들어 있다고 해도 이미 바스러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런!”
“허어!”
“역시 이번에도 그렇구먼!”
진 노인의 말에 사방에서 탄식이 흘러나오며 낙담했다.
애초에 무당파는 물욕에 관심이 없는 도가의 문파.
사실 목함을 만들어 책을 보관한 것만으로도 대단히 크게 신경 써서 손을 쓴 것이었다. 무당파에서 책을 만들 때 종이의 질에까지 신경을 쓰게 된 것도 근 백여 년 동안의 일이다. 그간의 경우를 볼 때도 초창기 무당파의 책들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번엔 목함 안에 있었기에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 노인은 그들이 낙담하든 말든 목함을 살짝 들어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무게로 보아 빈 목함은 아니구나.’
하지만 안에 든 책이 바스러져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셈이다.
목함을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여는 진 노인의 손길은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끼이익.
갑자기 들리는 마찰음에, 한탄하던 도사들이 혹시 모를 기대를 담아 진 노인 주위로 몰려들었다.
마침내 열린 목함.
“오오오!”
모두가 탄성을 내뱉었다.
심지어는 진 노인도 탄성을 내뱉는 무리에 속해 있었다.
목함 안에는 멀쩡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는 진무대제께서 이 책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기 위해 축복을 내리신 게야!”
유극 진인이 흥분한 얼굴로 그리 외쳤지만 책을 들어 세밀하게 관찰하던 진 노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이것은……?’
“가본이군요.”
가본(假本).
가짜란 소리다.
갑자기 나온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는 음성이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