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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2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유극 진인의 둘째 제자인 묵유자였다. 그는 진 노인을 데려온 현은의 사부이기도 했다.
유극 진인은 둘째 제자가 말수가 없는 만큼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묵유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묵유자는 목함 안에 든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바스러지기는커녕 완전히 새 책이지 않습니까? 백오십 년은커녕 십 년도 채 되지 않아 보입니다.”
“그, 그런! 아니다. 진짜로 진무대제께서 축복을 내리셔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묵유자의 말은 유극 진인의 기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사부님, 이는 분명 누군가 우리들을 놀리려고 꾸민 일이 분명합니다. 책의 제목을 보십시오.”
제자의 말에 유극 진인의 시선이 책으로 향했고, 순식간에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도, 도덕경?”
도덕경(道德經).
태상노군이 썼다는 너무나도 유명한 도교의 경전을 말함이다. 문제는 너무도 유명하기에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가장 흔해 빠진 경전이란 사실이다. 결코 진무대제가 축복을 내릴 정도로 희귀한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체 어느 놈이 이런 장난질을 친 게야!”
“크윽!”
유극 진인은 너무도 분노하여 곁에 무공을 익히지 못한 진 노인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내력을 일으켜 분노를 토해 냈다.
진 노인은 괴로운 얼굴로 급하게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숙였지만 유극 진인을 비롯해 분노에 사로잡힌 도사들은 그런 진 노인의 상황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뒤늦게 진 노인의 상황을 눈치챈 묵유자가 재빨리 다가가 등에 손을 대고 내력을 주입하여 보호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한 상황이었다.
그 뒤로도 진 노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유극 진인은 노발대발하며 사당의 문을 뻥 차며 밖으로 나갔다. 다른 도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분노에 찬 얼굴로 따라나섰다. 기대가 컸던 만큼 분노도 컸던 탓이다.
이제 사당에 남은 사람은 진 노인과 그의 등에 손을 대고 있는 묵유자, 그리고 그의 제자인 현은이 전부였다.
“영감님, 괜찮으십니까?”
현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진 노인에게 다가가며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 노인이 거칠게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콜록! 콜록! 성질 급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저러고도 장문인 짓을 하고 있는 걸 보면 하여튼 용하다니까!”
“…….”
“…….”
진 노인의 빈정댐이 유극 진인을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묵유자와 현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극 진인이 둘에게는 사부와 사조가 되었기에 동조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비판받아 마땅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 노인의 말은 유극 진인을 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성급함을 탓한 것이었다.
“묵유자, 네가 틀렸다. 이건 가품이 아니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 노인의 난데없는 말에 일순 이해를 하지 못한 묵유자와 현은이 동시에 반문했다.
“쯧쯧. 어찌 이리 인물이 없누. 내 아까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백오십여 년간 목함을 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야.”
진 노인의 말에 현은이 놀란 얼굴로 외쳤다.
“그럼!”
“그래. 이 책은 분명 진품이야. 그럼에도 수백 년 동안 이렇게 변질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건 어쩌면 정말로 진무대제께서 축복을 내리신 건지도 모르지.”
“오오!”
밝아진 얼굴로 감탄사를 내뱉는 현은과 다르게 묵유자는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도덕경이 아닙니까? 이제 와서 사부님께 말씀드린들 별로 기뻐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
그제야 현은도 사정을 깨닫고 기뻐하던 표정을 재빨리 가라앉혔다.
진 노인도 묵유자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찬가지로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웃긴 것이다. 도덕경이 흔해 빠졌다지만, 그만큼 도사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책이 아니냐? 도사가 되어서 도덕경을 찬밥 취급하는 게 어디 말이 되느냔 말이다. 네놈들은 그 도복부터 벗어 버려야 해. 차라리 무복을 입으란 말이다. 사람들은 무당파가 도교의 성지(聖地)라고들 한다지? 지금 벌어진 일을 보거라. 웃기는 말이지. 암, 웃기는 말이고말고.”
묵유자와 현은은 진 노인에 말에 진한 현기를 느꼈다. 또한 동시에 도사인 자신들이 잡일꾼에 불과한 진 노인의 말에 현기를 느낀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들이 어찌 생각하든 진 노인은 상관없다는 듯이 목함을 들고는 사당을 나서려고 했다.
진 노인이 사당을 나가고 나서야 현은이 정신을 차린 듯 달려 나오며 진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영감님, 그 책은 어쩌시려고요?”
진 노인은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어쩌기는? 무공 비급도 아니고, 도교의 경전이지 않느냐? 당연히 내가 관리하는 진선각으로 가져가야지.”
“아, 하긴 그렇지요.”
수백 채에 이르는 무당파의 건물들 중 책을 보관하는 장경각은 단 두 곳. 이는 관리와 이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무공 비급을 보관하는 곳을 정응각(定應閣), 도교의 경전을 보관하는 곳을 진선각(眞仙閣)이라 불렀다.
진 노인은 진선각의 청소를 담당하는 잡일꾼이다. 원래 진선각은 무당파의 도사가 담당해야 했지만 현 무당의 세태에 따라 관리에 힘을 쏟지 않아, 지금에 이르러서는 진 노인의 말대로 그가 관리하고 있다고 말해도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뭐하냐?”
“예?”
갑작스레 들린 진 노인의 말에 현은은 무슨 말인지 몰라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업어야지!”
“아, 예!”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달은 현은이 재빨리 진 노인의 앞에 앉아 등을 보였다.
진 노인이 업히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왕 업는 거 이 상태로 마을에 내려가자.”
“예에? 아니, 마을에는 왜요?”
현은의 말투엔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등선암에서 무당산 아래에 있는 마을까지는 적게 잡아도 이십 리 길이다. 절벽을 오르내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니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이놈아! 아무리 장문인이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이 도덕경이 귀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느냐? 이제 목함을 열었으니 이후로도 지금과 같이 책이 보호되리란 보장이 있느냐? 그러니 마을에서 재료를 사 와서 제대로 된 목함을 만들어 보관해 둬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현은, 네가 진 노인을 업고 마을에 다녀오거라.”
묵유자까지 그리 말하니, 현은은 그저 속으로 투덜거릴 뿐 결국 진 노인을 업은 채 마을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마을로 내려온 현은은 대놓고 진 노인에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무당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촌락에서 갑자기 숯을 살 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 백 리가 넘는 거리에 있는 단강까지 가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 노인이 하는 말이 기가 막혔다.
“내 분명 마을에 가자고만 했지, 그 마을이 이 마을이라고 했느냐?”
“이익!”
현은은 연배고 뭐고 따질 것 없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사부가 명을 내린 이상 그에게는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현은은 코를 골며 잠이 든 진 노인이 깨지 않게 주의를 하며 단강까지 밤새 계속 걸음을 놀려야 했다.
* * *
“이놈아! 오늘 안에 목함을 만들려면 서둘려야 하는데, 어딜 가?”
“아니, 그래도 제가 도사이지 않습니까? 어찌 이 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가란 말씀이십니까?”
“호오? 네놈이 도사였냐?”
“아니, 근데 이 영감탱이가 진짜!”
“어, 어험! 그래 봤자 마을 안에서 들리는 소리이지 않느냐?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일단 가서 확인이라도 해 보자는 말입니다.”
진 노인과 현은이 이제 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이른 아침에 단강 기슭의 한 마을에서 티격태격 대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귀에 들리는 어떤 소리 때문이었다.
응애! 응애!
그것은 아기 울음소리였다.
마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였으나, 청력이 뛰어난 현은의 귀에 벌써 일각이 넘도록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래. 혹시 모르니 확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결국 성화에 못 이긴 진 노인은 현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걸음을 옮긴 진 노인과 현은은 꽤나 큰 장원의 대문 앞에서 보자기에 싸인 채 놓인 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대문 주위에서 구경하고 상황이었다. 다들 아기를 거두는 것에는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쯧쯧.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다 해도 어찌 자기 핏줄을 버릴 수 있누.”
진 노인은 버려진 아기를 보게 되자 혀를 쯧쯧 차며 안타까움을 보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길가에 버린 것도 아니고, 한눈에 봐도 잘사는 집 앞에 버려두었으니, 굶거나 추위에 떨다 죽진 않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하는 현은의 말에 진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잘못되진 않을 것 같으니 우리는 어여 볼일이나 보러 가자.”
“예.”
하지만 두 사람의 발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경을 하던 사람들의 대화 내용이 귀에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니, 엄마가 대체 누구여? 하필 버릴 데가 없어서 장가장 앞에 애를 버리나?”
“필시 이곳 사람이 아니었던 게지. 저러다 진짜 장가가 거두면 평생 노비처럼 살아가야 할 텐데 말이여.”
“그렇것지. 거 몇 달 전에 저 집 하인인 조삼이 녀석이 오죽 힘들었으면 도망까지 쳤겠어? 그런데 장가 놈은 사람까지 사 모아서는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와 자기 손으로 때려죽였다는 거 아녀.”
“허! 그거 단순히 소문 아니었어?”
“말도 말어! 내가 그때 저 담 너머에서 조삼이가 비명 지르는 걸 직접 이 두 귀로 들었다니까! 마지막까지 살려 달라고 비는데, 대체 얼마나 무식하게 몽둥이로 후려치는지 퍽퍽거리는 소리가 조삼이의 비명이 뚝 끊긴 이후로도 한참을 울리더군!”
“마, 맙소사!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인간 말종이구먼! 저 애의 미래도 이제 뻔하겠어. 불쌍해서 어쩌누.”
그들의 대화를 듣던 현은이 결국 돌아서며 진 노인에게 말했다.
“안되겠습니다. 저희가 거둬야겠습니다.”
“그래, 차라리 무당파로 데려가는 것이 낫겠구나.”
진 노인까지 동의하자 현은은 내공을 끌어올려 순식간에 아기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파앗!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현은은 장원 안에서 대문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뭐, 뭐야?”
그때까지 아기를 바라보던 동네 사람들은 갑자기 아기가 사라지자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그때 대문이 열리면서 하인인 듯한 자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자신처럼 사방을 살피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었다.
진 노인과 현은은 그렇게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품에 안은 아기를 달래며 장원에서 멀어져 갔다.
* * *
“음…….”
“…….”
“으음…….”
진 노인은 상인이 내놓은 네 가지 목재를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현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거참! 언제까지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만 보실 겁니까? 그렇게 보면 태상노군께서 정해 주시기라도 한답니까?”
“……네놈. 어째 갈수록 비꼬는 투가 날 닮아 가는 거 같다?”
“크, 크흠!”
현은은 자신이 생각해 봐도 그런 것 같아 그저 헛기침만 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