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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3화)
그런 현은을 일견하고 다시 목재로 시선을 가져간 진 노인이 말했다.
“책을 보관할 목재라는 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물론 일부러 이 먼 곳까지 올 정도로 이 목재들이 최상품이긴 하다만, 이 중에 참나무는 겉보기에나 번지르르할 뿐 장시간 책을 보관하는 목함의 재료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지. 또 남은 삼나무, 노송나무, 대나무는 모두 책을 보관하는 용도로는 최고의 재료들이나, 각기 그 효능이 조금씩 달라 보관 장소의 습도나 기후, 종이의 재질에 따라 신중히 택해야 한단 말이다.”
진 노인은 자신의 박식함에 놀라기를 바랐으나, 현은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거 어차피 책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것도 아니고 무당산에서만 보관할 텐데, 그곳에 익숙한 영감님께서 그리 고민할 필요가 뭐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저 가진 지식을 자랑하고 싶으신 게 눈에 뻔히 보인단 말입니다.”
“커, 커흠! ……응?”
정곡을 찔린 진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아기가 보자기에서 빠져나와 목재 쪽으로 기어가는 모습에 눈을 빛냈다.
“허! 이놈 봐라? 네놈이 목재를 아느냐?”
“어브. 어브.”
아이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양 고개를 돌려 맑은 눈으로 진 노인을 빤히 바라본 후 다시 목재들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엉금엉금.
느린 속도로 기어가던 아이는 정말로 네 가지 목재 중 하나에 손을 갖다 대고는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으버버. 버브!”
이에 진 노인이 놀라 소리쳤다.
“오오! 현은아, 저 녀석 봐라! 제대로 골랐구나!”
아기가 손으로 툭툭거리는 나무는 바로 삼나무였다.
“그래, 인석아! 삼나무야말로 산에서 책을 보관할 때 제격인 목재란다! 이제 보니, 정녕 태상노군께서 내 뒤를 이으라고 너를 보내 주셨나 보구나!”
그때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상인이 고작 아기가 우연히 건드린 목재를 선택하자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어르신, 삼나무로 목함을 만들면 통풍이 힘들어 오히려 책에 곰팡이가 쉽게 생깁니다. 차라리 대나무가 어떠신지요.”
“쯧쯧. 그거야 그냥 목함 안에 책만 넣어서 그렇지. 곰팡이가 생기는 원인은 습도 때문인데,그건 목함 안에 숯을 같이 넣어 주면 해결된다네. 거기에 삼나무는 독특한 향 때문에 책벌레가 생기지 않으니 숯과 삼나무의 조합이야말로 습도가 높은 산에서 보관하기엔 최적의 재료인 게지. 대나무도 나쁘진 않지만 자주 책을 꺼내 응달에 말려야 하기 때문에 귀찮단 말이야.”
“오오.”
목재 가게를 운영하는 자신도 몰랐던 걸 아는 박식한 진 노인의 모습에 상인의 얼굴에는 어느새 존경심이 어려 있었다.
현은도 그제야 무당산 아랫마을에서 숯을 산 이유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진 노인에게 딴죽을 걸었다.
“잠깐! 영감님의 뒤를 잇는다니요? 분명 제가 거두어 도사로 키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진 노인이 현은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게 뭔 소리냐? 거둔다고만 했지, 언제 도사로 키운다고 했어? 그리고 네놈이 분명 우.리.가 거둔다고 했지, 언제 네놈 혼자 거둔다고 했느냐?”
“허! 아니, 바쁘다고 애를 모른 체하고 가 버리자고 한 분이 누구신데, 이제 와서 욕심이십니까?”
그 말에 방금 전까지 존경스런 태도를 보이던 상인이 돌변하여 혐오스런 눈초리로 진 노인을 째려봤다.
졸지에 박식한 노인에서 인정머리 없는 노인으로 격하된 진 노인이 당황스런 얼굴로 현은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 이놈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날 아주 못된 놈으로 알겠구나! 그때야 마을에서 울리는 아기 울음이니 당연히 별일이 없을 줄 알고 그런 게지!”
그 뒤로도 한동안 티격태격 대던 둘은 갑자기 들린 아기의 울음소리에 싸움을 멈춰야 했다.
“으아앙!”
아기가 오줌을 지린 것이다.
아기의 가랑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란 국물에 상인이 기겁했다.
“어이쿠, 내 목재!”
진 노인의 주문대로 최상품의 목재를 내놓은 건데, 거기에 오줌이라도 묻으면 큰일이었다.
상인은 재빨리 목재들을 아이와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치워 둔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반면 진 노인과 현은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서로의 눈치를 보기만 했다.
“뭐, 뭐하느냐? 어여 가서 치워라.”
“아니 왜 제, 제가 합니까? 아까 영감님께서 거두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커허! 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가 거둔 것이 아니냐? 이제 저 아이에게 넌 아버지나 마찬가지이니 당연히 네가 치워야지.”
도사이기에 이립을 넘긴 지금까지 여자를 돌같이 여겨 왔던 현은이 졸지에 애 아빠가 되는 순간이다.
“윽! 아니 그럼 영감님께선 할아버지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어르신이 치우십쇼!”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여자 치마 속이 어떤지도 모르고 있던 진 노인에게 졸지에 손자가 생긴 순간이다.
“으아앙! 으아아앙!”
그때 갑작스레 커진 아기의 울음소리에 놀란 둘은 동시에 아기를 향해 달려갔다.
먼저 도착한 현은이 아기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들었고,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진 노인이 아기의 목을 한 손으로 받쳐 주었다.
“꺄르르.”
사람의 온기를 느꼈음인가?
아기는 언제 울었냐는 듯 이제는 귀여운 얼굴로 꺄르르 웃기 시작했다.
“어이쿠! 내 손자!”
“어유! 내 아들!”
아기의 귀여운 모습에 질세라 양쪽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비벼 대는 진 노인과 현은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옷이 아기의 소변에 묻어 젖어 드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그렇게 아기를 안은 채 서 있었다.
* * *
무당산 천주봉.
천주봉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무당파의 내원과 외원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외원과 내원의 중간에 작은 마을이 하나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당파 내부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잘 몰랐다.
마을의 이름은 백운촌(白雲村).
사계절 내내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니,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운촌은 그 멋스러운 이름과는 다르게 무당파 내원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잡일꾼이 모여 사는, 오십여 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다.
특이한 점은 이곳에 사는 모두가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향화객인 여성들의 출입이 가능한 외원과는 달리 무당의 도사들만이 기거하는 내원은 오로지 남자들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곳 역시 남자들만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백운촌 북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초가집.
바로 진선각의 청소를 맡고 있는 진 노인이 홀로 기거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평소와 다르게 진 노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방문해 있었다.
방 안에 앉아 있던 진 노인은 혹여 잊을까 두려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앞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고, 현은은 그 옆에서 진 노인과 완벽하게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는 같은 곳을 주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이런 걸 할 줄 아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습니다.”
아기에게 기저귀를 채워 주던 묵유자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내 너를 다섯 살 때 거두었지 않느냐. 이후 아홉 살이 되도록 똥오줌을 가리지 못해서, 직접 마을까지 내려가 기저귀 채우는 법을 배워 왔었지. 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복하던 일이다 보니 용케 잊지 않아 제대로 되는구나.”
그 말에 현은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고, 진 노인은 그런 현은을 보며 크게 웃어 댔다.
“낄낄! 맞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 다 커서도 강보를 차고 다녀서 바지가 유난히 불룩했었지! 그때 네 별명이 소의 볼기짝 같다 하여 우둔(牛臀)이었지 아마?”
“여, 영감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으윽! 대체 사부님께선 왜 새삼스레 과거의 일은 들춰서 제자를 궁지에 몰아넣으시는 겁니까?”
현은이 사부인 묵유자에게 버릇없게 따지고 드는 데는, 그가 그때의 일을 크나큰 상처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기에게 기저귀를 다 채운 묵유자는 그런 현은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하고는 진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진 노인께서는 이 아이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아기를 무당파로 데리고 온 사정을 들었던 묵유자였기에 이후의 일에 대해 묻고 있었다.
“뭐 별거 있나? 그냥 거두어 키우다가 내가 하는 일을 물려주면 되는 게지.”
“으음. 역시 그게 가장 좋겠군요.”
묵유자도 그것이 가장 무난하다 생각하여 곧바로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현은은 진 노인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게도 아이를 책임질 권한이 있는데, 어찌 혼자 결정하십니까?”
친부모도 아니고, 아이를 책임지는 데 권한까지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현은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내심 현은의 무례한 태도를 꾸짖을 작정이었던 묵유자는 현은의 표정을 보고는 살짝 벌렸던 입을 그냥 다물어 버렸다.
묵유자가 현은을 말리지 않으니 곤란해진 건 진 노인이었다. 단강의 목재 가게에서 소변을 치우기 싫어 한 말에 불과했지만, 분명 자신의 입으로 자신과 현은이 같이 아기를 거두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할아버지라 했고, 현은이 아버지라고까지 했으니 아기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는 현은과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순리에 맞았다.
결국 진 노인이 현은에게 물었다.
“끄응. 그래, 그럼 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제가 제자로 거둘 겁니다.”
너무도 단호한 말에 진 노인이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내질렀다.
“뭐야? 이놈이 어디서 지 멋대로 내 손자의 미래를 정하고 난리야?”
“그러는 진 노인께서도 제 아들의 미래를 맘대로 정하려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놈아! 네놈이 아버지면 난 이 아이의 할아비다! 아비보다는 할아비 말을 따라야지!”
“말도 안되는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할아버지보다는 아버지가 아들과 더 가깝지 않습니까?”
그 뒤로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유치한 이유를 대 가며 말다툼을 해 댔다.
묵유자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는 고성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곤히 잠든 아기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녀석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구나. 하필이면 저 두 사람에게 거두어지다니 말이다.’
진 노인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무당산에서 평생을 보낸 노인이다. 가족이 없는 건 무당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찬가지라지만, 그래도 자신은 제자가 있고, 스승이 있지만 진 노인은 아니다. 정이 뭔지도 모른채 평생을 고독하게 보낸 그에게, 비록 친혈육은 아니라지만 조손이란 이름으로 이어진 끈을 만났으니 강한 애착을 가지는 거야 당연지사였다.
현은이 이상하리만치 아이에게 정을 느끼는 것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이는 아까 진 노인이 말한 우둔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연유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어린 시절, 우둔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또래 도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따돌림을 받았던 제자였다. 그에 대한 반작용인지 커서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하산할 일이 있을 때마다 친구를 잔뜩 사귀었고 친분을 유지시켜 나갔기에, 젊은 나이임에도 무당파 내에서 가장 넓은 인맥을 지니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럼에도 현 자 항렬의 도사들은 현은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현 자 항렬 중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높은 실력을 질시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현은이 아직도 사람들과의 사귐에 집착하는 건, 바로 제집이라 할 수 있는 무당파 내에 친구라 할 만한 존재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사부인 자신 말고도 또 하나의 혈연에 가까운 인연이 생긴 것이니 저리 욕심을 부리는 것도 당연했다.
‘허나, 아버지면 족하지, 벌써부터 사부가 되고 싶으냐? 그것도 내 눈앞에서 말이야.’
아직도 모자라 보이기만 하는 제자였다.
한동안 계속된 두 사람의 유치한 말싸움이 끝이 나지 않자, 마침내 묵유자가 입을 열었다.
“현은아, 이제 그만하거라. 진 노인도 그만하시지요.”
말싸움도 슬슬 한계에 부딪치고 있던 두 사람은 묵유자의 제지에 별말 않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허, 참. 거 죽이 정말 잘 맞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