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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4화)
어쩌면 제자에게 저 아기 말고도 또 하나의 끈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고 묵유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는 나이가 차지 않아 제자를 거둘 수 없는 위치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아이는 진 노인께서 키우는 것이 좋겠구나.”
“네? 하지만…….”
현은이 놀라 반박하려 했지만 묵유자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만! 내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진 노인. 진 노인께서 키우시는 대신 현은이 제자를 거둘 나이가 되면 그때는 저 아이를 현은의 제자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그 무슨…….”
이번엔 진 노인이 반대하려 했지만 역시나 묵유자는 기회를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현은의 제자로 거두어 무당의 도사가 되더라도 진 노인이 타계하시기 전까지는 이곳 백운촌에서 생활하며 살 수 있도록, 제가 직접 사부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쯤에서 현은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 노인은 아직도 불만 어린 얼굴로 묵유자에게 말했다.
“내 처음에 말했다시피 이 아이에게 내 뒤를 잇게 할 생각이다. 내가 단순히 청소만 하는 늙은이가 아니란 걸 너도 알지 않느냐? 죽기 전에 나의 지식을 물려줄 이가 필요하단 말이야. 그런데 이 아이가 무당의 진산 제자가 돼 버리면 나보고 어쩌라고?”
진 노인의 투정과 협박이 섞인 질문에 흔들릴 만도 하건만, 묵유자는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현은이 제자를 거두려면 최소한 십 년, 늦으면 이십 년은 걸릴 겁니다. 그사이에 아이에게 지식을 전수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정식 제자가 된 후에도 이곳에서 살게 된다면, 진 노인의 지식을 전수받을 시간이 모자라진 않을 겁니다. 그 뒤 아이에게 진선각의 관리를 맡으라고 하면 되겠지요. 예전에는 도사들이 관리하던 곳이었지 않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지.”
잡일꾼이 무당파 내원의 하나를 관리하는 잘못된 일을 바로 세우는 것이니, 진 노인의 입장과 무당파의 미래까지 생각한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야 진 노인도 더 이상은 반대할 구실을 찾을 수 없었다.
묵유자는 두 사람이 뭔가 다른 이유를 들고 반대하고 나올까 봐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그저 아이라고만 하시는데, 이름을 지어 주지 않으신 겁니까?”
“…….”
“…….”
“후우…….”
두 사람이 침묵만 지키고 있자 묵유자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는 아이의 이름을 지을 차례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현은이 재빨리 묵유자에게 말했다.
“당연히 맨앞 글자는 송 자가 돼야 합니다!”
송(宋) 자는 현(玄) 자 항렬 다음 대의 도사들에게 붙여지기로 예정된 돌림자였다.
묵유자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번엔 진 노인이 반대하고 나섰다.
“무슨 소리냐? 내 손자인데 당연히 내 성을 따라 진(陳)씨가 되어야지!”
“아니, 어차피 도사가 될 아이인데 성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당연히 송 자로 도명을 지어야죠!”
또다시 싸움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묵유자가 재빨리 생각을 정리해 입을 열었다.
“현은이 제자로 거둬 정식으로 도호를 받기 전까지는 성을 진씨로 하고, 이름의 첫 자를 송 자, 그리고 도호에 걸맞는 마지막 이름자까지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진 노인이 찬성하고 나섰다.
“그거 좋구먼. 성은 내가, 이름의 첫 글자는 저 녀석이 지었으니, 마지막 이름자는 우리가 아닌 저 아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 지어 주는 게 좋을 듯싶으이.”
그러자 현은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저도 찬성합니다! 이 녀석이 목재 가게에서 오줌을 지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오줌 요(尿) 자를 써서 진송요는 어떨까요? 크큭!”
“에라, 이 미친놈아! 애 이름에 요 자가 뭐냐?”
진 노인이 얼굴을 붉히며 노발대발하자, 현은이 고개를 돌려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말했다.
“거 영감님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습니다.”
묵유자는 다시금 두 사람이 죽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는 웃으면서도 전혀 내색을 않은 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이를 큰 집 대문 앞에서 거뒀다고 하셨으니, 큰 집 하(廈) 자를 써서 진송하는 어떻겠습니까? 후에 무당의 큰 집이 되어 무당을 지켜 달라는 의미도 되니, 잘 어울린다 생각합니다.”
“진송하? 그래! 그거 좋구먼!”
“좋습니다! 제 마음에도 쏙 듭니다!”
두 사람은 묵유자의 의견이 좋다고 동의했고, 그렇게 아이의 이름은 진송하(陳宋廈)가 되었다.
二章.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다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자식이 잘 크는 법이라 했던가?
하지만 아무리 키우는 자의 사랑이 지고하다 해도 천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진송하는 백운촌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원인 모를 고열로 앓아눕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진 노인은 고뿔에 걸린 것이라 짐작하며 서둘러 무당파의 외원에서 일하는 의원을 데려와 치료케 하였다.
“어떤가?”
침을 놓는 데 방해가 될까 싶어 집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진 노인은 의원이 나오자 곧바로 그리 물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의원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답하자 진 노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게 해결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비슷한 병세로 앓아눕기 시작하니, 진 노인은 또다시 의원을 불러와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회복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고, 재차 비슷한 증세로 앓기를 반복하니, 이후 의원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진 노인의 집을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그럴 수록 진송하의 몸은 삐쩍 말라 갔는데, 급기야 아직 어린 아기가 이렇게까지 마를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되자 진 노인은 속이 새까맣게 타 버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껴야 했다.
‘그래, 그렇게 된 게군.’
진 노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부모가 진송하를 버린 근본적인 원인은 아이를 키울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라기보다, 진송하의 이런 특이한 몸 때문이라는 것을.
필시 부모는 괴로워하는 아이를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 그런 아이를 치료할 방도가 없기에 버린 것이리라.
“응애! 으애애애앵!”
볼일이 있어 잠시 무당산 밖으로 나갔다가 뒤늦게 소식을 듣게 된 현은은 진 노인과 진송하가 사는 초가집으로 단숨에 달려왔다. 그리고 거기서 진송하의 심상치 않은 울음소리를 듣게 되자 눈이 뒤집혀 마당에 서 있는 진 노인에게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야, 이 영감탱이야! 어떻게 했기에 애가 저리 죽어라 울어 대는 거야!”
“끄응…….”
진 노인이라고 어찌 노력을 안 했겠는가?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이가 회복될 줄을 모르니 현은의 막말에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때 치료를 마친 의원이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현은은 진 노인의 멱살까지 잡고 흔들어 댔을 게 분명했다.
“어, 어떤가?”
처음 진송하를 치료하던 날과 같은 물음이었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진 노인의 목소리에는 잔떨림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의원의 안색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원의 대답 역시 그때와는 달랐다.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진 노인이 원하는 대답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손을 놓고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인가?
진 노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시 몰라 물었다.
“혹시 태생적으로 몸이 허약하여 그런 것은 아니겠는가? 몸에 좋은 약초라도 구해 먹이면 어떻겠는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의원이 입을 열었다.
“음……. 예, 흔히 알려진 몸을 보해 주는 약초를 찾아 먹인다면 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요.”
이에 진 노인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분명 말투로 보아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기력하게 진송하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는데, 이제는 자신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도를 찾은 것이다.
진 노인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현은을 돌아보며 외쳤다.
“가자!”
“예!”
진 노인과 현은은 그렇게 곧바로 마을을 나서 약초를 찾기 위해 무당산 곳곳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그런 헌신적인 행동은 무려 칠 년이란 세월 동안 계속되었다.
* * *
후다닥.
“늦었다, 늦었어!”
어느새 열한 살이 된 진송하는 백운촌에 위치한 진 노인과 자신이 사는 초가집에서 나와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두르는 건 오로지 진송하의 마음뿐, 실제로 그의 걸음은 무겁고 느리기만 했다.
더구나 겨우 마을을 빠져나왔을 뿐인데도 어느새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호흡은 이제 막 숨을 거둘 것 같은 노인네마냥 거칠어져 있었다.
“후욱! 후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송하의 몸은 흡사 돼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육중했기 때문이다.
두 눈은 살에 파묻혀 앞이 보이는지조차 의심스러웠고, 튀어나온 배는 세 겹으로 겹쳐져 움직일 때마다 배가 옷을 씹어 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삐쩍 말랐던 그의 몸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어쨌든 나름대로 열심히 발을 놀려 내원의 진선각으로 향하던 진송하는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어, 어?”
바로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는데, 도사 복장을 한 진송하 또래로 보이는 소년 도사 둘이었다.
그들도 진송하를 발견했는지 잠깐 멈춰 서서 이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곧이어 오히려 걸음을 빨리해 진송하의 눈앞에 다가와 섰다.
오른쪽에 위치한 뱁새눈을 한 도사가 과장되게 놀란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약저 사형이 아니십니까?”
그러자 진송하가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 안녕. 반가워, 송방 사제. 그리고 송암 사제도 반가워.”
그 말에 둘의 표정이 순식간에 대변했다.
“어쭈, 이 새끼 장단 맞추는 거 봐라? 아주 기어오르려고 하네? 일개 잡일꾼 주제에 누가 니 사제야? 이걸 그냥 확!”
뱁새눈을 한 송방이 진송하를 치려는 듯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렸다.
“흐윽!”
이에 진송하는 맞을 줄 알고 몸을 웅크렸는데, 다행히 왼쪽에 서 있던 키가 크고 잘생긴 용모를 한 송암이 말리고 들었다.
“그만해라, 송방. 저번처럼 한 대 맞고 기절해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그때도 현은 사숙께 맞아서 한 달을 누워 있지 않았느냐.”
그 말에 송방은 그때의 기억이 났는지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젠장! 아무리 약해 빠져도 그렇지, 어떻게 내공을 싣지도 않은 주먹 한 방에 기절해 버리냐? 퉤! 내 더러워서 참는다!”
송암과 송방은 모두 현은의 사형뻘 되는 자들이 제자로 거둔 아이들이었다.
송암은 비록 장문인 직계는 아니었지만 현 자 항렬의 도사들 중 가장 연장자인 현수가 거둔 제자로, 현재 몇 없는 송 자 항렬의 도사들 중 가장 뛰어난 자질로 주목받고 있는 아이였다.
송방은 현수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현중의 제자였는데, 비록 송암보다는 못해도 역시나 뛰어난 재목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아이였다.
몇 달 전 현은은 아직은 몇 안되는 송 자 항렬 아이들 중에서 가장 자질이 뛰어난 이 둘을 따로 불러 진송하를 소개시켜 준 적이 있었다. 나름 또래 친구를 만들어 줄 생각에서였는데, 당시 현은은 그들에게 진송하가 태어나자마자 무당에 입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사형이라 부르라고 했었다.
하지만 도호도 없고 무공도 모르며, 병약한 데다 돼지같이 뚱뚱한 진송하를 어찌 사형이라 쉽게 인정하겠는가? 오히려 그때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는 진송하를 가리켜 병약한 돼지란 뜻의 약저(弱猪)란 별명까지 붙인 후, 무당파 또래의 도사들에게 소문을 퍼뜨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