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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
ON 플레이어 1권(1화)
프롤로그(1)
이세계 이플렌시아를 방문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을 위한 룰 북(Rule Book).
Rule. 플레이어 선발은 무작위로 이루어지며 선발된 플레이어에게는 특수 능력이 부여된다.
Rule. 플레이어들은 각자 자신만의 통로를 통해 이플렌시아로 이동할 수 있다.
Rule. 플레이어는 하루에 한 번 이플렌시아에 접속할 수 있다. 이때 접속 시간은 2분이다.
Rule. 현실에서의 2분은 이플렌시아에서 8시간이다.
Rule. 이플렌시아에서 얻은 물건은 플레이어가 현실에서 임의로 처분해 이익을 얻어도 상관없다.
Rule. 이플렌시아에서 플레이어가 죽으면 현실에서도 사망한다. 단, 남아 있는 라이프 포인트가 있는 한 되살아날 기회를 얻게 된다.
Rule. 라이프 포인트를 가진 플레이어가 현실에서 죽으면 이플렌시아의 세계에 갇혀 버린다.
Rule. 플레이어 규칙은 공개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숨겨진 규칙을 알아내는 건 각자의 몫이다.
Chapter 1. 이세계 이플렌시아(1)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뭘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해도 정말 불행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물이 반쯤 찬 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네.’ 하고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 하고 삐딱선을 탄다는 유명한 예화도 있지 않은가?
결국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저언―혀!
쾅!
홧김에 벽을 후려쳤더니 주먹이 까졌다. 까진 곳에 피가 나고 아려 오니 더욱 울화가 치민다.
이건 정말 너무 하잖아요. 신(God)님!
바로 오늘 오후,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은 나는 황급히 XX 종합병원에 갔다.
의사는 너무나도 친절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폐암 중기라는 사실을 알려 줬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은 우리 집에는 돈이 없다는 사실이다. 돈은커녕 아직 갚지 못한 빚도 있는데, 당장 수술비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한숨만 절로 푹푹 나온다.
왜 그렇게 가난하냐고?
그건 전부 사업한답시고 설쳐 대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집은 그럭저럭 부유한 중산층에 속했다.
아버지는 다들 철밥통이라 불리는 7급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그냥 가정주부이지만 외갓집이 제법 잘사는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가 갑자기 직장을 관두고 사업하겠다고 나설 때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모아 둔 돈 다 까먹고도 정신을 못 차린 아버지는 급기야 사업한답시고 외가에까지 손을 뻗어 돈을 빌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하는 사업마다 쫄딱 말아먹었지, 뭐.
어느새 나름대로 곱게 자라 왔던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되어 버렸다.
또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고급 학용품을 쓰며 급우들의 부러움을 사던 나는 냄새 풀풀 풍기는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다니는 재수 없는 거지새끼가 되어 있었다.
배고파서 수돗물을 마신다는 70년대 헝그리 복서 같은 일이 내겐 빈번하게 일어났다.
중학교까진 겨우 어떻게 진학했지만,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미안해서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사람 구실하려면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패스한 것이다.
자식새끼가 이런 눈물겨운 드라마를 찍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주위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을 벌였다, 쫄딱 말아먹는 짓을 반복했다.
아버지는 진정한 용자였다.
결국,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던 어머니도 참다못해 폭발하고 말았다.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
“여……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나가! 잘못한 거 알면 나가 죽으란 말이야! 이 인간아!”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분노한 어머니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바들바들 떨었고, 다시는 사업 같은 거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지장 찍고 도장까지 콱 찍어 버렸다.
그 후로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건설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난 나대로 검정고시를 패스한 후, 피 터지게 공부해 서울대에 진학했으니 이제 그나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고, 지 버릇 개 못 주는 게 세상 이치인지.
내가 제대를 3개월 정도 남겨 뒀을 때, 아버지는 또다시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가족들도 모르게 금융권과 대부 업체 등에서 대출 받아 몰래 다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이번에도 사업을 완전 말아먹었다.
빚쟁이에게 쫓기게 된 아버지는 어디론가 무책임하고 도망쳐 버렸다. 돈을 받으러 온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던 어머니는 마음 독하게 먹고 이혼 소송을 걸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남남이 된 어머니는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결국 앓아눕고 말았다.
돈 벌어 올 사람이 없게 되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둘째 동생 형기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은진이는 소위 말하는 불량 학생이 되어 이미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엇나가고 있었다.
집안 꼴이 잘 돌아간다. 얼씨구! 지화자!
그리고 조금 전, 난 어머니가 폐암 중기라는 충격적인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의사는 수술하고 항암 치료를 잘 받으면 생존율이 꽤 높다고 했다. 그렇지만 수술비와 입원비는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어머니가 젊은 시절 들어 뒀던 보험은 아버지 빚을 갚느라 진작 다 해약해 버렸으니 앞이 깜깜한 상황이다.
그래도 절망하진 말자. 장남인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지.
“형!”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둘째인 형기의 얼굴이 보였다. 가뜩이나 무더운 7월 날씨에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다.
“무슨 일로 쓰러지신 거래?”
“그게…….”
난 한참이나 머뭇거린 끝에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숨긴다고 감출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뭐? 농담하는 거지?”
“형기야…….”
폐암이란 말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굳어 있던 동생은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추슬렀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철없이 굴던 동생의 의연한 모습에 나는 가슴이 찡해졌다. 그동안의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마치 딴사람처럼 의젓해졌을까?
“수술 받으시면 살 수 있는 거야?”
“생존율 60퍼센트 정도라니까 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수술비가…….”
“걱정하지 마! 형, 당장 수술비 정도는 어떻게 될 거야.”
다행히 동생이 그동안 받은 월급을 꾸준히 모으고 있었다.
그 돈으로 우선 수술비를 지불하고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도 공장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술비만 겨우 냈을 뿐이다.
항암 치료비 등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역시 복학은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디라도 당장 돈 될 만한 곳에 취직해야겠다.
요즘은 임금이 비싸다는 이유로 대학 졸업생보다 고졸만 뽑는 데도 있는데 뭘…….
그렇게 위안 삼아 보지만, 힘들게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유명한 대학까지 간 게 너무나 아깝다. 제대하고 나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까진 안 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울해하고 있을 수는 없다.
아니, 우울한 표정을 함부로 지을 수도 없다. 침상 맞은편에서 동생이 날 보고 있으니까. 말은 안 해도 동생들은 마음으로 날 의지하고 있으니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으윽!”
마치 딱따구리가 머릿속을 콕콕 쪼아 대는 것 같다.
이 극심한 두통은 대략 일주일 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별로 아프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지는 것 같다. 통증을 느끼는 빈도도 부쩍 늘었다.
“형 괜찮아?”
형기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본다. 동생 걱정시키는 형이 되고 싶지 않아 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머리가 좀 지끈거리네.”
두통은 더욱 심해진다.
콰앙!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것 같다. 젠장!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거냐?
아무래도 심각한 것 같다. 애써 아프지 않은 척 찌푸렸던 미간을 폈지만, 동생이 보기엔 내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형! 안색이 창백해.”
동생은 괜찮다는 나의 팔을 끌고 복도에 나가 소파에 앉혔다.
평소라면 신장 187센티의 거구인 내가 동생에게 힘으로 끌려 나갈 리 없건만, 지금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차가운 음료수라도 뽑아 올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거절의 뜻으로 손을 저었지만 동생은 자판기를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착한 녀석. 내가 녀석을 엄히 키우긴 했나 보다.
아버지가 사업한다고 자꾸만 밖으로 돌았기에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내가 챙기고 단속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엄격하게 동생들을 대한 결과. 둘째 형기는 아주 예의 바른 청년이 되었고, 막내 여동생 은진이는 내게 반발해 자꾸만 엇나가 버렸다.
지금은 여동생에게 너무 엄하게 대한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째깍. 째깍.
두통 때문에 예민해진 탓인가? 벽시계 초침 소리가 내 귓가를 울려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7시가 넘었다.
“형! 이거 좀 마셔 봐.”
동생이 가져온 음료수를 받아 들며 난 말했다.
“고맙다.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공장에 가 봐.”
“아냐, 형. 컨디션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긴 내가 있을게.”
근무시간에 빠졌다고 동생이 혼나지 않을까 싶어서 난 화난 척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까불지 말고 가 봐. 난 좀 쉬면 괜찮아질 테니까.”
“오늘 못 갈 거 같다고 미리 말해 놨어. 공장에서도 그 정도는 봐주니까. 걱정 마!”
예전에는 내 말에 말대답 같은 거 하지도 못하던 녀석이 많이 큰 모양이다. 공장에서 돈 벌고 하니까 기가 좀 산 모양이지. 하지만 이제 어린애도 아니고 제 앞가림은 제가 하겠지 싶어서. 뭐라고 하진 않았다.
“그보다, 형. 지금 아르바이트 가야 할 시간 아냐?”
그제야 난 뒤늦게 주점 아르바이트가 생각났다. 돈이 별로 되지 않으니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둬야겠다. 그래도 그만두기 전까진 성실하게 출근해야지, 뭐.
“그래?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몸은 좀 괜찮아?”
“그래.”
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통이 좀 가라앉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피곤하면 쪽잠이라도 자.”
“걱정하지 마. 형.”
그로부터 일주일 후, 다행히 어머니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난 어머니의 입원비와 항암 치료비를 벌기 위해 고민 끝에 과외 선생을 시작했다.
대학교를 한 학기밖에 못 다닌 내가 당장 취직해 봐야 얼마 벌지도 못할 테고, 그래도 XX대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믿고 과외 전선에 뛰어들었는데 생각보다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과외라고 해도 하루 종일 학생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니 체력만 되면 몇 탕이나 뛸 수 있으니까.
이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하고 돈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니, 나 정말 머리 좋은 거 맞을까? 공부 빼고는 잘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조금 우울하다.
어쨌거나 선불로 받은 과외비 때문에 통장은 절로 두둑해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그건 과외 받는 학생들의 성적이 별로 오를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뭐해? 아직 다 못 풀었어? 집중 안 해?”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 거거든요?”
하나같이 집중력 부족, 주의 산만에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돌대가리들이다.
이런 녀석들 과외시키는 거 완전 자원 낭비인데, 어째서 부모들은 한결같이 ‘우리 아이가 좀 엇나가서 그렇지. 마음먹고 하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거든요?’라고 말하는 걸까?
ON 플레이어 1권(1화)
프롤로그(1)
이세계 이플렌시아를 방문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을 위한 룰 북(Rule Book).
Rule. 플레이어 선발은 무작위로 이루어지며 선발된 플레이어에게는 특수 능력이 부여된다.
Rule. 플레이어들은 각자 자신만의 통로를 통해 이플렌시아로 이동할 수 있다.
Rule. 플레이어는 하루에 한 번 이플렌시아에 접속할 수 있다. 이때 접속 시간은 2분이다.
Rule. 현실에서의 2분은 이플렌시아에서 8시간이다.
Rule. 이플렌시아에서 얻은 물건은 플레이어가 현실에서 임의로 처분해 이익을 얻어도 상관없다.
Rule. 이플렌시아에서 플레이어가 죽으면 현실에서도 사망한다. 단, 남아 있는 라이프 포인트가 있는 한 되살아날 기회를 얻게 된다.
Rule. 라이프 포인트를 가진 플레이어가 현실에서 죽으면 이플렌시아의 세계에 갇혀 버린다.
Rule. 플레이어 규칙은 공개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숨겨진 규칙을 알아내는 건 각자의 몫이다.
Chapter 1. 이세계 이플렌시아(1)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뭘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해도 정말 불행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물이 반쯤 찬 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네.’ 하고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 하고 삐딱선을 탄다는 유명한 예화도 있지 않은가?
결국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저언―혀!
쾅!
홧김에 벽을 후려쳤더니 주먹이 까졌다. 까진 곳에 피가 나고 아려 오니 더욱 울화가 치민다.
이건 정말 너무 하잖아요. 신(God)님!
바로 오늘 오후,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은 나는 황급히 XX 종합병원에 갔다.
의사는 너무나도 친절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폐암 중기라는 사실을 알려 줬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은 우리 집에는 돈이 없다는 사실이다. 돈은커녕 아직 갚지 못한 빚도 있는데, 당장 수술비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한숨만 절로 푹푹 나온다.
왜 그렇게 가난하냐고?
그건 전부 사업한답시고 설쳐 대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집은 그럭저럭 부유한 중산층에 속했다.
아버지는 다들 철밥통이라 불리는 7급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그냥 가정주부이지만 외갓집이 제법 잘사는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가 갑자기 직장을 관두고 사업하겠다고 나설 때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모아 둔 돈 다 까먹고도 정신을 못 차린 아버지는 급기야 사업한답시고 외가에까지 손을 뻗어 돈을 빌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하는 사업마다 쫄딱 말아먹었지, 뭐.
어느새 나름대로 곱게 자라 왔던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되어 버렸다.
또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고급 학용품을 쓰며 급우들의 부러움을 사던 나는 냄새 풀풀 풍기는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다니는 재수 없는 거지새끼가 되어 있었다.
배고파서 수돗물을 마신다는 70년대 헝그리 복서 같은 일이 내겐 빈번하게 일어났다.
중학교까진 겨우 어떻게 진학했지만,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미안해서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사람 구실하려면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패스한 것이다.
자식새끼가 이런 눈물겨운 드라마를 찍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주위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을 벌였다, 쫄딱 말아먹는 짓을 반복했다.
아버지는 진정한 용자였다.
결국,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던 어머니도 참다못해 폭발하고 말았다.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
“여……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나가! 잘못한 거 알면 나가 죽으란 말이야! 이 인간아!”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분노한 어머니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바들바들 떨었고, 다시는 사업 같은 거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지장 찍고 도장까지 콱 찍어 버렸다.
그 후로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건설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난 나대로 검정고시를 패스한 후, 피 터지게 공부해 서울대에 진학했으니 이제 그나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고, 지 버릇 개 못 주는 게 세상 이치인지.
내가 제대를 3개월 정도 남겨 뒀을 때, 아버지는 또다시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가족들도 모르게 금융권과 대부 업체 등에서 대출 받아 몰래 다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이번에도 사업을 완전 말아먹었다.
빚쟁이에게 쫓기게 된 아버지는 어디론가 무책임하고 도망쳐 버렸다. 돈을 받으러 온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던 어머니는 마음 독하게 먹고 이혼 소송을 걸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남남이 된 어머니는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결국 앓아눕고 말았다.
돈 벌어 올 사람이 없게 되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둘째 동생 형기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은진이는 소위 말하는 불량 학생이 되어 이미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엇나가고 있었다.
집안 꼴이 잘 돌아간다. 얼씨구! 지화자!
그리고 조금 전, 난 어머니가 폐암 중기라는 충격적인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의사는 수술하고 항암 치료를 잘 받으면 생존율이 꽤 높다고 했다. 그렇지만 수술비와 입원비는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어머니가 젊은 시절 들어 뒀던 보험은 아버지 빚을 갚느라 진작 다 해약해 버렸으니 앞이 깜깜한 상황이다.
그래도 절망하진 말자. 장남인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지.
“형!”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둘째인 형기의 얼굴이 보였다. 가뜩이나 무더운 7월 날씨에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다.
“무슨 일로 쓰러지신 거래?”
“그게…….”
난 한참이나 머뭇거린 끝에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숨긴다고 감출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뭐? 농담하는 거지?”
“형기야…….”
폐암이란 말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굳어 있던 동생은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추슬렀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철없이 굴던 동생의 의연한 모습에 나는 가슴이 찡해졌다. 그동안의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마치 딴사람처럼 의젓해졌을까?
“수술 받으시면 살 수 있는 거야?”
“생존율 60퍼센트 정도라니까 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수술비가…….”
“걱정하지 마! 형, 당장 수술비 정도는 어떻게 될 거야.”
다행히 동생이 그동안 받은 월급을 꾸준히 모으고 있었다.
그 돈으로 우선 수술비를 지불하고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도 공장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술비만 겨우 냈을 뿐이다.
항암 치료비 등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역시 복학은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디라도 당장 돈 될 만한 곳에 취직해야겠다.
요즘은 임금이 비싸다는 이유로 대학 졸업생보다 고졸만 뽑는 데도 있는데 뭘…….
그렇게 위안 삼아 보지만, 힘들게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유명한 대학까지 간 게 너무나 아깝다. 제대하고 나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까진 안 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울해하고 있을 수는 없다.
아니, 우울한 표정을 함부로 지을 수도 없다. 침상 맞은편에서 동생이 날 보고 있으니까. 말은 안 해도 동생들은 마음으로 날 의지하고 있으니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으윽!”
마치 딱따구리가 머릿속을 콕콕 쪼아 대는 것 같다.
이 극심한 두통은 대략 일주일 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별로 아프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지는 것 같다. 통증을 느끼는 빈도도 부쩍 늘었다.
“형 괜찮아?”
형기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본다. 동생 걱정시키는 형이 되고 싶지 않아 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머리가 좀 지끈거리네.”
두통은 더욱 심해진다.
콰앙!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것 같다. 젠장!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거냐?
아무래도 심각한 것 같다. 애써 아프지 않은 척 찌푸렸던 미간을 폈지만, 동생이 보기엔 내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형! 안색이 창백해.”
동생은 괜찮다는 나의 팔을 끌고 복도에 나가 소파에 앉혔다.
평소라면 신장 187센티의 거구인 내가 동생에게 힘으로 끌려 나갈 리 없건만, 지금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차가운 음료수라도 뽑아 올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거절의 뜻으로 손을 저었지만 동생은 자판기를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착한 녀석. 내가 녀석을 엄히 키우긴 했나 보다.
아버지가 사업한다고 자꾸만 밖으로 돌았기에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내가 챙기고 단속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엄격하게 동생들을 대한 결과. 둘째 형기는 아주 예의 바른 청년이 되었고, 막내 여동생 은진이는 내게 반발해 자꾸만 엇나가 버렸다.
지금은 여동생에게 너무 엄하게 대한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째깍. 째깍.
두통 때문에 예민해진 탓인가? 벽시계 초침 소리가 내 귓가를 울려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7시가 넘었다.
“형! 이거 좀 마셔 봐.”
동생이 가져온 음료수를 받아 들며 난 말했다.
“고맙다.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공장에 가 봐.”
“아냐, 형. 컨디션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긴 내가 있을게.”
근무시간에 빠졌다고 동생이 혼나지 않을까 싶어서 난 화난 척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까불지 말고 가 봐. 난 좀 쉬면 괜찮아질 테니까.”
“오늘 못 갈 거 같다고 미리 말해 놨어. 공장에서도 그 정도는 봐주니까. 걱정 마!”
예전에는 내 말에 말대답 같은 거 하지도 못하던 녀석이 많이 큰 모양이다. 공장에서 돈 벌고 하니까 기가 좀 산 모양이지. 하지만 이제 어린애도 아니고 제 앞가림은 제가 하겠지 싶어서. 뭐라고 하진 않았다.
“그보다, 형. 지금 아르바이트 가야 할 시간 아냐?”
그제야 난 뒤늦게 주점 아르바이트가 생각났다. 돈이 별로 되지 않으니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둬야겠다. 그래도 그만두기 전까진 성실하게 출근해야지, 뭐.
“그래?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몸은 좀 괜찮아?”
“그래.”
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통이 좀 가라앉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피곤하면 쪽잠이라도 자.”
“걱정하지 마. 형.”
그로부터 일주일 후, 다행히 어머니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난 어머니의 입원비와 항암 치료비를 벌기 위해 고민 끝에 과외 선생을 시작했다.
대학교를 한 학기밖에 못 다닌 내가 당장 취직해 봐야 얼마 벌지도 못할 테고, 그래도 XX대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믿고 과외 전선에 뛰어들었는데 생각보다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과외라고 해도 하루 종일 학생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니 체력만 되면 몇 탕이나 뛸 수 있으니까.
이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하고 돈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니, 나 정말 머리 좋은 거 맞을까? 공부 빼고는 잘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조금 우울하다.
어쨌거나 선불로 받은 과외비 때문에 통장은 절로 두둑해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그건 과외 받는 학생들의 성적이 별로 오를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뭐해? 아직 다 못 풀었어? 집중 안 해?”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 거거든요?”
하나같이 집중력 부족, 주의 산만에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돌대가리들이다.
이런 녀석들 과외시키는 거 완전 자원 낭비인데, 어째서 부모들은 한결같이 ‘우리 아이가 좀 엇나가서 그렇지. 마음먹고 하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거든요?’라고 말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