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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2화)
Chapter 1. 이세계 이플렌시아(2)


위이이잉―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받기 위해 화장실로 가면서 난 녀석에게 주의를 줬다.
“5분 후에 그거 검사한다? 다 풀어 놔.”
녀석이 들으라는 듯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린다.
“쳇! 검사하든지 말든지.”
저런 X가지 없는 녀석! 혈압이 오르며 뭐라고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선불로 받은 과외비 때문에 꾹 참는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으며 난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민혁이냐? 나야, 나! 창수!”
“어, 오랜만이네. 근데 갑자기 웬 연락이냐?”
창수는 중학교 동창이다. 옛날에는 꽤 친하게 지냈지만, 중학교 졸업 후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왜 전화가 왔을까?
보험 가입 권유? 피라미드 판매?
부정적인 생각만 머릿속에 떠오르며 경계심이 들었다.
“무슨 일이긴. 임마! 우리가 용건이 있어야지만 연락하는 사이냐?”
우리 사이? 아무 사이도 아닌데 무슨?
저절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입 밖에 꺼내 놓진 않았다. 너무 삭막하게 보이긴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일로 전화했는데?”
“너, 종현이랑 철우 기억나지? 오늘이 철우 생일이라서 그 녀석들이랑 술 한잔 꺾기로 했는데 말이야. 종현이가 너 얼마 전에 제대했다 해서, 같이 봤음 해서.”
전부 다 중학교 동창들인데, 종현이랑은 최근까지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다.
시간이 되긴 하는데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다 죽어 가는 몰골로 항암 치료를 받고 있고 남동생은 죽어라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텐데, 친구들과 술 마시며 희희낙락거리기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우 생일이라지만 그 녀석하고는 생일을 축하해 줄 만큼 친하지도 않다.
“나올 거지?”
“글쎄. 뭐, 시간 되면 갈게.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빼지 말고 나와라.”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과외를 마치기 직전에 종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녀석들이 번갈아 가면서 전화를 하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은가?
난 결국 마음을 바꿨다.
평소에 친구들과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만에 만나는 건데 한두 시간 정도야 기분 전환하는 셈치고 쓰지 뭐. 딱 1차만 하고 돌아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7시 28분.
밖으로 나오며 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8시까지 주점에 도착해야 하니까 시간이 빠듯했다. 하지만 두통약이 떨어졌으니 약국에 잠깐 들려야겠다.
꾸준히 진통제를 먹는데도 두통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언제 한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지.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다행히 약국에 대기하는 손님이 한 명밖에 없었다.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겠군.
난 잠깐 기다리는 동안 여동생인 은진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역시나 신호만 가고 전화를 받진 않는다.
이 계집애는 발랑 까져 가지고, 이 시간에 어디서 노느라 전화도 안 받는 거야? 어머니 아픈지도 모르고 또 불량스런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고 있겠군.
“두통약 좀 주세요.”
“네. 4000원입니다.”
무슨 알약 몇 개에 4000원이나 하는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일단 정수기 물로 알약 하나를 먹고 밖으로 나왔다. 주머니 사정이 얄팍해지니 마음도 얄팍해진다.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 떠들지만 돈 없으면 진짜 궁상맞아지고, 역시 가난은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통장에 입금된 돈은 뭐냐고? 그거야 어머니 치료비로 들어갈 돈이니 당연히 다른 데 쓸 수가 없지.
찌잉―
황급히 지하철로 향하고 있는데 또다시 머리가 울리며 지독한 두통이 몰려왔다. 이번엔 전보다 강도가 더 심하다.
두통약까지 먹었는데 짜증 나게 왜 이러는 거야? 정말.
“크으윽.”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지독한 통증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난 건물 벽에 몸을 기댄 채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좀처럼 통증이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심각한 병이라도 생긴 거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든다.
나까지 아프면 그 병원비를 누가 감당하지? 혹시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시간이 좀 지나자 통증이 천천히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대신 공중에 붕 뜨는 듯 약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예민해진 탓인지 주변의 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껌 씹는 소리, 멀리서 나누는 대화 등이 선명하게 들려오더니 급기야는 사람들의 심장 소리와 숨 쉬는 소리까지 분명하게 들려왔다.
뭐지? 내가 환청을 듣는 건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 뇌가 베타 엔도르핀이란 호르몬을 방출한다는 소릴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그것은 진통제의 200배에 해당하는 진통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환청을 듣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청각만이 아니었다.
멀리 있는 간판의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고 온몸에 이상한 활력이 흘러넘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야? 마치 XX 코믹스에 나오는 히어로가 된 듯한 기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가슴속에서 불안감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온몸의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시적 현상일 거다. 일일이 신경 쓰면 지는 거야. 아무렴.
드르륵―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문자가 온 것 같았다.
뭔가 싶어서 즉시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핸드폰 액정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다.

― 강민혁. 플레이어로 선발됨.

난 무의식중에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야?!”
발신 번호가 0000으로 뜨는 걸 보니 누군가의 장난 문자인 듯.
누가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하는 건지, 정말 할 짓 없는 인간인가 보다. 누군 앞날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지금 걱정이 태산 같은데. 거참!
그런데 문자를 보며 걷느라 잠시 부주의한 탓일까? 난 마주 오는 누군가와 어깨를 세게 부딪치게 되었다.
타악!
“뭐야? 이 XX 새끼야!”
다짜고짜 욕설을 날리는 천박한 목소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어쨌거나 내가 부주의했던 건 사실이어서 일단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냐? 이 XX 같은 새끼야?”
“이 새끼 눈깔 똑바로 뜨는 거 봐. 먹물을 쪽 뽑아 버리고 싶네!”
황급히 사과하고 보니 이 녀석들 꼬락서니가, 머리부터 옷 입은 거 하며 인상이 딱 양아치다.
나이는……. 음. 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고 20대 초반?
나랑 비슷하거나 한두 살 어릴 것 같다. 말본새를 보아하니 그냥 좋게 넘어갈 것 같진 않다.
잘 걸렸다 이거지?
“죄송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난감해진 난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것마저 녀석들의 눈엔 거슬렸나 보다.
“이 XX 같은 자식이! 실실 쪼개네?”
“미안하면 무릎 꿇어. 이 X새끼야!”
그런데 기세등등해서 목에 핏대 세우고 펄펄 뛰는 것과는 달리, 녀석들이 금방 덤벼들진 못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덩치가 크고 평소엔 표정도 거의 없는 편이라 만만해 보이질 않아서인 듯했다.
하지만 난 어릴 때부터 싸움에는 영 젬병이었다.
무엇보다 새가슴이라 폭력만 보면 다리가 후덜덜 떨린다.
그런 성격을 고치려고 어릴 때부터 태권도나 권투를 배우긴 했지만, 결국 내 심성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그나마 대련이나 스파링에서는 경기 규칙이란 심리적 안전장치가 있어서 괜찮았는데, 실전에서는 몸이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지금도 긴장으로 몸이 얼어붙고 있다. 그러니 제발 좀 그냥 가 주라.
“이 새끼 말씹네?”
“우리가 X밥으로 보이냐? 씹X야!”
이것들은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열 내는 자가발전 스타일인가 보다.
어느새 주변엔 사람들이 모여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릴 본다. 아무리 싸움 구경, 불구경이 제일 재밌는 구경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말려 주는 놈은 하나도 없을까?
이것 싸움이 아니라 집단 린치라고! 무려 ‘3대 1’ 상황인데 그렇게 보지 말고 신고 좀 하라고. 다들 핸드폰 가지고 있잖아? 이런 매정한 현대인들 같으니라고.
“엇쭈! 형님들 말씀하시는데 한눈을 팔아?”
“네가 아주 죽여 달라고 발악을 하는구나.”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입을 열 수가 없다. 그나마 지금의 포커페이스마저 깨지면, 이 녀석들이 굶주린 들개처럼 덤벼들어 물어뜯을 것 같다.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두근. 두근.
숨 막힐 듯한 공포와 긴장으로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지나친 긴장 탓일까? 다시 머리가 쿡쿡 쑤시며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의외로 통증이 별로 크지 않다.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랄까?
찌잉―
공중에 붕 뜨는 듯한 묘한 감각이 다시 날 찾아왔다.
감각이 예민해지며 심장을 조여 오던 공포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샘솟으며 이 녀석들에게 질 것 같지 않다는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두근. 두근.
가슴이 여전히 힘차게 뛰고 있지만 이젠 공포 때문이 아니라 녀석들을 때려눕히고 싶다는 묘한 흥분 때문에 뛰기 시작했다. 내가 갑자기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때 선두에 서 있던 덩치 하나가 예고도 없이 주먹을 날려 왔다.
쉬익―
그런데 주먹이 왜 이렇게 느려? 양아치가 날린 주먹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아니, 세상 모든 것이 갑자기 느리게 움직인다.
뭐야?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어쨌거나 뻔히 보이는 공격을 맞아 줄 수는 없다. 살짝 피하는 것과 동시에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비록 5년 동안 주구장창 스파링만 했지만 열심히 권투를 배웠던 몸인데다가 체급이 이쪽이 훨씬 크니 제법 타격이 들어가리라.
빠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턱이 깨졌다.
깨어진 치아 조각이 붉은 핏방울을 달고 공중으로 튕겨져 나가는 광경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그와 동시에 녀석이 빙글 원을 그리며 아스팔트 바닥으로 튕기듯 나가떨어진다.
마치 영화 속의 스턴트맨이 하는 과장된 리액션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세게 때리진 않은 건 같은데?
털썩!
턱이 부서진 녀석이 바닥에 쓰러지자 나머지 두 놈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덤벼든다. 한꺼번에 덤벼 봤자 어차피 슬로우 모션이니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한 녀석의 소중한 그곳을 빠악 하고 소리 나도록 올려 찼다.
“크아악!”
무언가 으깨지는 듯한 감각이 발끝에 걸리고, 녀석이 자지러질듯 비명을 지른다.
제구실을 못하게 될지 모르지만, 어차피 죄 없는 여자 강간하는 데나 쓸 물건. 범죄 예방 차원에서 미리 터뜨려 주었다 생각하면 그뿐이다.
마지막 남은 뚱뚱한 녀석이 그걸 보고 갑자기 주눅이 드는 듯 흠칫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조롱하듯 말했다.
“도망가고 싶으면 가. 뒤쫓진 않겠다.”
“씨바! X까!”
녀석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칼날이 별로 크진 않지만 불빛을 반사하며 살벌하게 번뜩였다.
“까악!”
구경꾼 중에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다들 심각성을 조금은 깨달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때의 나라면 소스라치게 놀랐을지도 모르지만 기묘한 감각이 몸을 채우고 있기 때문인지 지금은 칼날을 보고도 무덤덤했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며 머릿속에 뭔가 잔인한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잔인한 충동을 억누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여긴 대로변이야. 지금도 CCTV에 찍히고 있을지 모르고, 언제 경찰이 나타날지도 몰라. 잔인한 건 좀 더 최악의 악당을 위해 남겨 두자고.
녀석은 칼날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내게 덤벼 왔다.
휘익― 휙―
어차피 공격이 다 보이는 상황. 나는 가볍게 칼날을 피하며 어떻게 마무리를 할지 궁리했다.
이왕이면 마무리는 멋진 것이 좋겠지. 요즘은 비주얼이 대세인 시대잖아?
몸이 묘하게 가볍고 왠지 머릿속으로 떠올린 동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이 깊숙이 공격해 들어오는 순간, 나는 몸을 공중에 띄워 720도 회전 차기를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