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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3화)
Chapter 1. 이세계 이플렌시아(3)
슈아악―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림이 정확히 몸으로 재현된다. 그 순간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빠각!
뭔가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녀석이 어깨를 부여잡고 발작하듯 바닥을 뒹굴었다. 위력을 줄여 어깨를 때렸는데도 견갑골에 금이 간 것 같았다.
“크아악! 아악!”
해치웠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갑고도 뜨거운 감각이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드르륵―
― 강민혁. 플레이어 고유 능력 각성.
아, 누군지 모르지만 끈질기게 장난질이네? 하지만 장난 문자 덕분에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냈다.
“이런! 늦겠다!”
내 사전에 지각은 없다. 난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현재 시각은 7시 38분 16초.
여우가 전혀 없어. 빠듯해!
난 서둘러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난 생각했다.
평화주의자. 그렇다. 지금까지의 난 비폭력 평화주의자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폭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남들에게 평화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녔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에 친구 중 하나가 이렇게 질문했다고 치자.
“민혁아, 아까 그 새끼 때려 주지 그랬냐?”
그러면 나는 부처님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을 것이다.
“난 비폭력주의자야. 폭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해선 안 돼.”
그러나 그건 진실이 아니다. 사슴이 비폭력주의라서 사자랑 맞서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사실 난 맞는 게 두려워서 최대한 학급 아이들과 다툴 만한 일을 피했다. 남부럽지 않은 체격에 여가 시간을 운동으로 보내며 헬스 트레이닝까지 빼먹지 않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트레이닝으로 체격을 키우고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은 단지 아이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면 함부로 시비를 걸지 않으니까.
“비폭력은 무슨. 녀석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패 놓고.”
난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나는 분명히 폭력을 즐겼다.
힘으로 쓰러뜨려 나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 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숨겨진, 잔혹한 본성을 엿보고 깜짝 놀랐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휩싸이긴 했어도, 그건 분명 내 자신의 의지로 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그쯤에서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투쟁 본능은 남자의 DNA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것, 억눌러 왔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싸우지 않으면 고민할 것 없는 문제다. 법을 지키며 착실하게 사는 한, 주먹으로만 해결해야 할 상황에 처할 일은 없다고 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때 열차가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삐리리리리―
지하철이 멀리서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늘 들려오던 안내 방송이 무의미하게 들려온다.
치익―
지하철 문이 열리자 난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서 열차에 올라탔다. 운이 좋은지 빈자리가 하나 보이기에 가서 털썩 앉았다. 오늘 하루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어서인지 앉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 꾸벅.
으음. 이러다 잠들면 안 되는데…….
덜컹∼ 덜컹∼
나도 모르게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설마, 내릴 역을 지나친 건 아니겠지?
창밖을 보았지만 온통 어둠뿐이다. 역 사이의 터널을 달리고 있나 보다. 얼른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고장이라도 났는지 꺼져 있었다. 그러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등골이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사람들이 없다!
지금은 지하철이 꽤나 붐빌 시간. 이 시간에 승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일의 연속이다.
“이번에는 또 뭐야? 납량특집이라도 찍나?”
나는 오싹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그러나 텅 빈 객실에 내 목소리가 울리는 건, 그것 나름대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그런데 초침이 점점 느려지더니 딱 멈춰 버렸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건전지가 다 될 게 뭐람?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냈지만 핸드폰도 배터리가 다 됐는지 꺼져 있었다.
이상하네? 좀 전까지만 해도 배터리가 빵빵했었는데?
―이플렌시아의 세계로 곧 진입합니다.
방금 안내 방송에서 뭐라 그런 거야? 이플렌시아가 뭐? 지금 개그 해?
끼이익∼
그때 마찰음이 들리며 지하철이 서서히 감속하기 시작했다. 그래, 흥분하지 말자. 다음 역이 어딘지만 확인하면 된다. 만약의 상황에는 다음 역에서 내려 버스라도 타고 가면…….
치익∼
마침내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고 문이 열렸지만, 난 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침염 수림.
짹. 짹. 짹.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듯, 원시의 자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열려진 문을 통해 맑고 쌀쌀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지금은 7월인데 쌀쌀한 공기라니,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긴 어디? 누구 아는 사람 손? 참! 이플렌시아라고 했지?
갑자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거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엘리스는 시계를 들고 뛰어가는 수상한 토끼를 쫓다가 토끼굴에 빠졌고, 난 그냥 평범하게 지하철을 탓을 뿐인데 이상한 곳에 오게 됐다는 점뿐이다.
아, 알았다. 이거 꿈이구나?
짜악!
난 꿈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뺨을 힘차게 때렸다.
통통한 얼굴 살이 아주 손에 착착 감기는구나. 어쨌거나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 걸 보니 애석하게도 이건 꿈이 아닌가 보다.
내려? 말아?
내리면 잽싸게 문이 닫히고 열차가 총알택시처럼 떠나 버릴 것 같다.
그럼, 현실과는 아주 빠이빠이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리지 않고 가만히 버티려고 하니, 열차가 언제 출발할 지 언제까지 멍 때리고 앉아 있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일단 가만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이상한 곳의 밖엔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가만히 있는 쪽이 더 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난 곧 지루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시간이 매우 느리게 간다.
군대 가 본 사람들은 신병 대기 기간이라고 알 거다.
자대 배치 받아 들어가면 처음 1주나 2주 정도는 대기 기간이라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하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대기만 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든데,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처지였다.
시계와 핸드폰이 멈춰 버려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더 답답했다.
“휴우. 일단 근처에라도 나가 보자.”
지루함을 견딜 수 없던 나는 결국 지하철 문 밖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서늘한 바깥공기가 나를 반겼다. 조금 추웠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선선한 초가을 날씨 정도?
발밑에 밟히는 흙이나 풀, 눈앞에 보이는 나무들도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갑자기 괴물로 변해 촉수를 내뻗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용기를 내 조금 더 산책하듯 걸어 보았다.
꼬르륵.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배꼽시계가 운다. 시간이 꽤 지난 건가?
난 원래 체격이 큰 만큼 식사량도 많다. 하지만 이곳에는 특별히 먹을 것은 없는 것 같다. 혹시나 하고 올려다본 나무에도 열매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버섯 같은 게 조금씩 발견되기는 했지만 독이 있는지 없는지 분별해 낼 능력이 없다.
먹을 건 그렇다 치고 물이라도 조금 마시고 싶다. 그러나 평소에 다큐멘터리 같은 걸 잘 보지도 않는 내가 숲 속에서 간단히 물을 찾아낼 재능은 없다.
이거 이러다 혹시 굶어 죽는 거 아냐?
지하철이 언제 이 숲을 떠날 지 알 수가 없으니, 농담처럼 떠올린 생각이 단순히 농담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쓸데없이 딴생각하지 말라는 듯 잿빛 털의 늑대가 불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
잠깐! 늑대라는 게 원래 이렇게 몸집이 큰 동물이었나?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늑대 이미지는 개보다 좀 더 사납고 몸집이 큰 정도였다.
하지만 눈앞에 녀석은 몸길이가 3미터가 훌쩍 넘을 것 같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뽑아 단검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컸다.
보통 늑대가 이렇게 덩치가 크진 않을 텐데……. 이 녀석 뭐야 괴물인가? 이길 수 있을까?
거리에서 양아치들을 해치웠을 때 생겼던 이상한 힘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힘이 지금은 유일한 희망이다.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필요할 때 그 능력이 발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 능력이 어떤 원리도 발현하는지 잘 모른다.
크르르르르―
잿빛 늑대는 내게 다가오며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늑대에서 시선을 뺏기고 있는 사이, 등 뒤의 수풀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지잉―
위기를 느끼자 머릿속에서 뭔가 울리며 이상한 감각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다행히 필요할 때 초능력인지 뭔지 모를 능력이 발현된 것이다.
준비 완료!
고개를 돌려 보니 뒤에서 기습을 해 온 것도 잿빛 늑대였다.
이것들이 짐승 주제에 제법 머리 쓰는데?
주변이 슬로우 모션으로 바꿨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다. 난 늑대의 이빨을 피해 녀석의 배를 주먹으로 깊숙이 올려쳤다.
파앙!
가죽이 터지는 듯한 시원스런 소리가 나며 늑대가 멀리 날아갔다.
“케엥!”
아픈 듯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즉사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추가 공격을 할 여유는 없었다. 등 뒤를 공격하는 다른 늑대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빙글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늑대의 관자놀이에 힘껏 주먹을 꽂았다.
빠각!
단단한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잿빛 늑대는 혀를 길게 뺀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이번엔 한 방에 보낸 것 같다.
샤아악―
그때 숲 속에 숨어 있던 마지막 한 마리의 늑대가 내게 덤벼들었다.
숨어 있었다고는 해도 난 이미 민감해진 청각으로 녀석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회전에서 얻은 힘을 살려 늑대에게 돌려차기를 먹였다.
빠악!
발차기의 파괴력은 늑대의 머리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 버렸다.
두개골이 부서지며 뇌수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생생하게 보였다. 내가 직접 해 놓고도 믿기지 않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다. 그런데 부서진 늑대의 머릿속에서 보라색 구슬 하나가 땅으로 토옥 떨어졌다.
저건 또 뭘까?
뭔가 단서가 될까 싶어서 구슬을 집어 들었다.
지름이 5cm 정도 될까? 표면은 유리처럼 단단하고 미끈했는데, 힘을 주면 깨어질 것 같았다. 뭐가 들었는지 부숴 보지, 뭐. 난 땅바닥을 향해 구슬을 힘껏 내동댕이쳤다.
파앗―
구슬이 깨지며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그 자리에 금빛의 동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설마, 이거 진짜 금?
난 동전을 집어 깨물어 보았다. 동전 위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났다. 순금인 것 같은데 이 정도 무게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한 돈 반 정도 될 거 같은데.
그러다 난 다른 늑대들에게도 생각이 미쳤다. 그 녀석들도 구슬을 가지고 있겠지?
그때 즉사하지 않은 한 마리 늑대. 그러니까 처음에 내게 배를 맞은 놈이 고개를 빼며 길게 울었다.
아우― 우우우―
동료들을 불러모으는 건가? 나야 좋지. 많으면 많을수록 황금이 내 발 앞에 쌓일 테니까.
두두― 두두두―
그런데 발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게 심상치가 않다.
새까맣게 늑대 무리가 몰려온다. 너무 많아서 살짝 징그러운 느낌이 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