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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25화)


진송하의 말에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던 중년인은 이내 사정을 짐작한 듯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제 보니 동생 녀석과 착각을 한 모양이구나? 내 이름은 손일정(孫一丁). 네가 아는 손이정(孫二丁)의 쌍둥이 형이란다. 바로 이곳 무당객잔의 주인이자 요리사이며, 지금처럼 바쁠 때는 이렇게 직접 음식을 나르기도 하지.”
진송하는 자신이 아는 손 아저씨의 이름이야말로 손일정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이 저리 자신 있게 자기가 손일정이라고 말하니, 아마도 지금까지 손이정을 손일정이라 잘못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 그랬군요. 못 알아 뵈서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손 아저씨한테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은 거 같네요. 전 밖에서 자기랑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만 들었는데, 무당산 밖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고 계셨군요?”
“허! 그 동생 놈이 너한테 지가 형이라 말하더냐? 그 말 믿지 말거라. 분명 내가 먼저 태어났다.”
사실 손일정, 손이정 둘은 고아였기에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그 진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만나면 서로가 형이라 우겨 대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그들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진송하는 그냥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손일정을 향해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운촌에 사는 진송하라고 합니다.”
“진송하? 아! 동생 녀석이 제자로 삼고 싶다는 아이가 바로 너였구나.”
“엥? 제자? 송하야, 이건 또 뭔 소리냐?”
느닷없는 제자 타령에 뭔 말인가 싶어 송방이 묻자, 진송하가 곤란한 듯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그게 백운촌에 아이라고는 나밖에 없잖아. 그래서 손 아저씨뿐만 아니라, 칼을 만드시는 장 씨 아저씨랑, 집 짓는 박 씨 아저씨, 농사짓는 배 씨 아저씨까지, 백운촌에 사는 모두가 자신의 제자가 되라고 성화시거든.”
진송하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가 언급한 인물 중 특히 장 씨와 박 씨는 무당 내에서 진 노인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칼을 만든다는 장 씨는 무림에서도 유명한 무당의 청강검(靑舡劍)을 만드는 솜씨 좋은 장인이었고, 집을 짓는다는 박 씨는 각종 기관(機關)과 토목(土木)에 해박한 인물로 혹여 기문둔갑에 관한 책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수시로 진선각을 방문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물론 송방이나 손일정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기에 그저 그렇냐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손일정은 워낙 바빴기에 곧 주문을 받은 후 물러갔다.
그 후, 진송하가 시끌벅적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눈치를 보니까 음식이 나올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네.”
“뭐, 여기는 항상 이래. 아마 한 식경은 족히 기다려야 할 거야. 그보다 너 이제 어쩔 거냐?”
갑작스런 질문에 진송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응? 뭐가?”
“지금까지는 그 도덕경 속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다지만, 이제는 제대로 무학을 배우게 된 거잖아.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잡일꾼으로 생활할 거야? 그러니까 정식으로 입문해야 하지 않겠냐 이 말이야.”
“…….”
송방의 말에 진송하는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사제라 불렀다는 이유로 정말 모질게도 괴롭히며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던 저 입에서 직접 무당의 제자가 돼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송방도 그런 기미를 눈치챘는지 쑥쓰러워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거 대체 몇 번을 미안하다고 해야 하냐. 처음에야 자존심 때문에 그랬던 거고, 후에는 현은 사숙한테 죽어라 맞은 거 때문에 화가 나서 그랬던 거라고. 나라고 너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란 말이야.”
“응, 나도 알아. 미안해.”
도리어 진송하가 사과를 하니, 송방은 쑥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재차 볼을 긁적거렸다.
진송하 역시 그런 송방의 모습에 편안한 미소를 얼굴에 띠며 송방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너도 알겠지만 예전에는 이미 내가 무당의 제자인 줄 알았거든? 아버지께서 언제나 ‘너는 내 아들이자, 제자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말이야. 물론 지금이야 아버지가 그렇게 혼자 주장한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작은 할아버지께서 할아버지와 상의하셔서 해결하시겠지.”
물론 묵유자가 오늘 장문인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며 무당의 제자로 들일 생각이라는 것을 둘은 모르고 있었다.
송방은 진송하의 답변에 시큰둥한 얼굴을 보였다. 애초에 자신이 물으려던 건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 그거야 나도 이미 잘 알고 있는 거고. 내 말은 예전에 익히던 태극심법이야 사숙조님 말씀대로 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으니 괜찮다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중단전의 무학은 자칫 네가 그걸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졌다가는 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경을 칠 거란 말이야.”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익히고 있는 것도 태극심법이잖아?”
“응? 아아…, 그, 그렇긴 하다만 아무튼 일반적으로 알려진 태극심법하고는 완전히 다른 무공이잖냐.”
송방은 이전까지 진송하가 익히던 태극심법과 어제 기연을 통해 손에 넣은 중단전의 무학인 태극심법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송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다르다니? 분명 태극심법은 태극심법인걸. 사 년 전, 처음 배울 때부터 바로 어제 몽계에서 운기했을 때까지 변한 게 전혀 없다고.”
“야, 왜 변한 게 없어? 묵유 사숙조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니 몸에서 기운이 차고 넘치고 있잖냐.”
“에이, 그거야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께서 구해 오신 영약들을 먹은 후 항상 있던 기운들인데 뭐. 지금도 태극심법으로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건 할 줄 모른단 말야.”
왠지 두 사람 사이에 인식의 간극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랄 수 있었다.
진송하는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반면, 송방은 도덕경을 통한 기연으로 새로 얻은 힘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런가?”
어찌 되었든 송방은 진송하의 설명을 통해 그 간극을 상당히 좁힐 수 있었다.
그러자 이제부터는 두 사람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중단전의 무학이라면 무언가 대단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그게 뭘까?”
“으음……. 작은 할아버지 말씀대로라면 기운을 진기로 소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점?”
“에이, 그거야 물론 신기하긴 하지만, 좀 더 대단한 거 말이야. 그런 거 없을까?”
“아…….”
진송하는 송방의 말에 불현듯 어제 느꼈던 진한 아쉬움을 또다시 느껴야 했다.
어제 운기 중 불안함 마음을 갖는 바람에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던 진송하는 앞으로는 될 수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은 가지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에서도 지우려 노력했는데, 송방의 말에 그 일이 또다시 떠오른 것이다.
진송하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송방이 의문스런 얼굴로 물었다.
“야,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으음……. 아무튼 대단한 점을 굳이 꼽자면 이전보다 힘이 세졌다는 거 아닐까? 아 참, 맞다! 나 이제 더 이상 너한테 물 주먹이라고 불리지 않을 거야, 흥!”
갑작스런 진송하의 외침에 송방은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훗! 그래 봤자 물 주먹이 하루아침에 돌주먹이라도 되겠냐?”
“어어? 진짜라니까! 어디 한 번 시험해 볼래?”
“호오. 이제는 알아서 맞겠다고 머리를 들이밀 생각이냐? 좋지, 어제는 대련(對鍊)이었지만 이번에는 비무(比武)다!”
대련이란 두 사람이 공방을 주고받으며 수련하는 수련법의 일종이지만, 비무란 두 사람의 무예를 비교하는 것으로 수련이 아닌 실전이다.
사실 송방이 이렇게 대련과 구분지어 비무라는 말을 한 것은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내심 진송하의 실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후에 비무를 벌이기로 기약한 두 사람은 이후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자 대화를 멈추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손일정이 진송하가 동생과 같은 마을에 산다고 신경을 좀 썼는지, 몇 번 들른 경험이 있는 송방이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허겁지겁 탁자 안의 음식들을 먹어 댔다.
송방이 이럴진대 이렇게 자극적인 음식을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진송하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 우와! 너무 맛있다! 난 그래도 백운촌에서 손 아저씨가 해 주는 음식을 먹으며 나름 잘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음식들은 또 다르구나! 백운촌의 손 아저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역시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맞나 봐. 외원의 손 아저씨 음식이 더 맛있어!’
진송하는 진 노인 몰래 손 씨에게 요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경험을 살려서 대체 이런 음식들은 어떻게 만드는지 고민을 하면서도 동시에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려 음식을 입에 집어넣어 댔다.
하지만 송방이 음식들을 입에 잔뜩 문 채로 지나가듯 던진 물음에 잠시 손을 멈춰야 했다.
“쩝쩝……. 아, 맛있다. 그런데 너 이곳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리 묻자 진송하는 이렇게 도사들을 위한 일탈 공간을 만든 자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우움. 쩝쩝……. 꺼억, 후우! 그래, 이곳을 만든 게 누군데?”
“원래 이곳은 저기 담 안에 있는 무당객잔의 창고로 쓰던 곳이었대. 그런데 수십 년 전에 어느 한 무당의 도사가 아까 그 손일정 아저씨와 함께 논의한 끝에 이곳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내가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곳을 만든 건지 궁금해서 사부님께 물었더니, 웃으시면서 그 도사가 술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만날 몰래 무당산을 내려가 근처의 마을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게 멀다 보니 매일 오가는 게 불편해서 이곳을 만든 것이라고 하시더라.”
“와아! 도사가 되어서 이런 곳을 만들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니. 대체 그 사람이 누구야? 지금도 무당에 있어?”
진송하의 질문에 송방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흐흐. 뭐 지금도 잘 먹고 잘살고 있겠지만, 현재 무당에는 없어. 일 년 전에 무림맹으로 파견 나갔다더라.”
일 년 전 무림맹.
이쯤 되면 진송하가 모를 리 없었다.
“커, 커헉! 설마 아버지가?”
“푸하하! 정말 놀랍지 않냐? 거기다 이런 곳을 만든 것을 알았을 때 묵유 사숙조께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해 봐. 사실 내가 현은 사숙님을 존경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곳을 만든 게 그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였거든. 크큭!”
진송하는 작은 할아버지가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왜 한숨을 내쉬는지 그제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자상한 모습을 보였기에 상상이 가진 않았지만, 젊은 시절 이런 일을 저지를 정도라면, 정말 말도 못 할 사고뭉치였을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술을 그렇게 좋아하셨다니. 용케 내 앞에서는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셨구나. 그럼 설마 지금도 술통에 빠져 사느라 연락을 주지 않고 계신 거 아냐?’
술에 취해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는 주변의 도사들을 둘러보면서 진송하의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