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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24화)
그에게 이번 일은 기회나 다름없었다. 현 장문인의 직계 제자이자 묵유자의 사형인 묵경자가 무당으로 돌아온다면, 묵유자와 묵경자가 장문인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될 것은 뻔한 상황.
그때 자신이 어느 한쪽에게 지지를 보내 장문인으로 만든다면, 장문인보다 항렬이 낮은 자가 외원주직을 맡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 따위는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묵유자에게 접근하여 이런 이유를 들어 외원주직을 보장해 달라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묵진자로서는 묵경자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묵경자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아까 있었던 불쾌한 일까지 떠오르자 묵진자는 한껏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젠장! 뭐, 묵유 놈보다 내 지위가 낮아? 허! 그따위 안목을 지닌 놈이 우리 송암 다음으로 뛰어난 자질을 지녔다니. 내원 놈들의 눈도 제대로 삐었지!”
‘젠장! 범인은 송방이로구나.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묵유 사숙의 이야기를 해 가지고…….’
현수는 그제야 사정이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묵유자에 관해서라면 자칫 기분을 풀어 줄 요량으로 위로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더 크게 경을 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현수는 숨을 죽인 채 투덜대는 묵진자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무량수불…….’
어쩌면 오전 내내 시달림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도호를 연달아 외우며 묵진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수를 묵진자의 마수에서 구해 줄 존재가 집무실을 방문했다.
“사조님, 저 송암입니다. 아, 사부님도 계셨군요.”
묵진자의 사손이자 현수의 제자인 송암이 온 것이다.
평소 자신의 앞에서는 본심을 드러내도, 송 자 항렬의 어린 도사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지닌 송암의 앞에서는 언제나 인자한 모습을 보이던 묵진자였기에 현수는 송암의 등장에 화색이 되었다.
현수의 예상대로 묵진자는 순식간에 얼굴 표정을 바꾸며 인자한 얼굴로 송암을 맞았다.
“오오, 우리 송암이 왔구나. 어여 이리 와 앉거라.”
송암은 묵진자의 환대에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묵진자의 옆에 앉았다.
그의 사부인 현수가 일어서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버릇없는 행동이랄 수 있었다. 하나 묵진자가 워낙 제자와 사손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고수했기에, 이 자리에서 송암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냐? 내원에서 수련할 시간이 아니더냐?”
“예. 그렇긴 합니다만 어젯밤 내원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 그것에 대해 보고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외원에서 생활하는 묵진자나 현수와는 다르게 내원에서 같은 송 자 항렬 아이들과 함께 수련하는 송암이 가끔 이렇게 찾아와 내원의 소식을 전해 줬기에 묵진자는 기껍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으음, 그랬구나.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예.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사오나 사제들에게 들은 바 어젯밤 진선각에서 거대한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고 합니다.”
“흐음, 진선각에서 거대한 빛무리가? 아아, 불이라도 난 모양이구나.”
이성적으로 불이 나지 않고서야 거대한 빛무리라는 표현을 쓰기 힘들었기에 묵진자는 그리 단정 지었다.
하지만 송암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제들은 한사코 불이 난 것은 아니었다고 그러더군요. 시뻘건 불빛이 아닌, 새하얀 불빛이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곳으로 오기 전, 진선각에 들렀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화재가 일어난 흔적 따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쯤 되자 묵진자도 송암이 말하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흐음, 그래? 허, 새하얀 빛이라니……. 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선각이라면 평소 묵유 사숙조께서 자주 들르시는 곳이 아닙니까? 또한 최근에는 송방 녀석도 자주 그곳을 들락날락거리는 거 같았습니다.”
묵유자에 이어 송방까지.
이쯤 되자 묵진자의 머릿속에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금 전, 송방과 함께 본 아이.
하지만 이내 그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송암을 바라보며 물었다.
“흐음……. 송암아, 그 현은 녀석이 예전에 아들로 삼았다는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었지?”
“아, 저도 이름은 기억이 잘…….”
묵진자와 마찬가지로 송암 역시 진송하의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의 진송하는 이름이 아닌 송방이 붙여 준 병약한 돼지라는 뜻의 약저라는 별명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송암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진선각에서 일하는 진 노인이 예전에 주워 온 아이라고 들었습니다. 진 노인은 그 아이를 손자로 삼고, 현은 사숙께서는 아들로 삼은 데다, 자신의 제자로 들이겠다고 하신 적이 있었지요. 아마 그렇기에 묵유 사숙조와도 잘 아는 관계일 겁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묵진자는 이 사랑스런 사손 앞에서 그런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렇구나.”
“그런데 그 아이에 대해서는 왜 물으시는 건지요?”
“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닌 말로 단지 머릿속에 떠올랐을 뿐, 겨우 잡일꾼 꼬마 애와 이번 일을 연관 지을 수는 없었다.
잠시 세 사람은 대체 무엇 때문에 거대한 빛무리가 일어날 수 있는 건지 고민해 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으음. 아무래도 이것 역시 당장은 답을 내릴 수 없을 것 같구나.”
‘이것 역시’란, 묵경자의 일도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말한 것이었다. 송암이야 못 알아들었다지만 현수는 달랐기에 그 즉시 다시금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쯧쯧.”
묵진자는 그런 현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차다가, 송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앞으로 진선각을 좀 주시해 주려무나. 특히 묵유 녀석과 무슨 연관점이라도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송암 역시 묵유자가 장문인 자리에 오르면 현재 자신의 사조가 외원주의 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송 자 항렬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고 있는 데는 사조인 묵진자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었기에, 사숙조인 묵유자가 장문인 자리에 오르는 걸 그 역시도 원치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묵진자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눈치채고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예. 앞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허허. 그래, 내 너만 믿는다. 이제 그럼 둘 다 나가 일 보거라.”
자신의 제자와 사손이 집무실을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묵진자는 생각에 잠겼다.
‘왠지 이번 일이 나한테 좋은 쪽으로 작용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묵경의 소식도 큰 기회라 할 수 있건만, 연이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역시 원시천존께서 내가 외원주 일을 계속하기를 원하시는 건가?’
대단한 착각이었다. 대체 도교의 최고신이 무슨 이유로 한 개인의 직위를 보장해 준단 말인가?
하지만 분명 묵진자가 그런 착각을 할 정도로, 돌아가는 상황이 그에게 유리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 * *
“자, 여기가 바로 무당파 내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야.”
“오오!”
진송하는 송방이 가리키는 방향에 위치한 이 층 건물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외원이 내원보다 사람이 많다고는 하나, 그래도 도가의 사원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내원 못지않게 조용했다.
그런데 외원 북쪽 구석에 위치한 이곳만은 건물 안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는데, 진송하의 탄성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곳은 무당객잔이라는 참으로 뻔한 간판을 지닌 객잔이었다. 기본적으로 무당파 내에서는 술과 화식(火食)을 못 하게 되어 있었으나, 도사도 아닌 일반인들에게 이를 지키라 강요하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곳 무당객잔으로, 무당산 내에서 유일하게 술과 화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진송하는 안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송방이 진송하의 손목을 잡아 제지하며 말했다.
“잠깐! 우리들은 저기에 들어가면 안 돼.”
“어, 왜? 여기가 정문 아니야?”
진송하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으나, 송방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바보야. 내가 이렇게 도복을 입고 저리로 들어가면 내원에서 먹는 거랑 다를 게 없는 음식들만 나온다고. 우린 저기로 가야 해.”
진송하는 송방에게 이끌려 건물 뒤편으로 가야 했다. 무당객잔이 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보니 건물 뒤편에는 높다란 담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자, 이리로.”
그런데 그런 담 한가운데 조그만 문이 하나 보였다.
진송하는 의외의 장소에 또 하나의 문을 발견하자, 절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저 문은 어디로 통하는 거야? 저리로 가면 무당객잔으로 가는 게 아니잖아.”
“후후. 모르면 잠자코 있어라. 저곳이야말로 무당의 도사들에게만 공개되는 진정한 무당객잔이라고.”
“흐응…….”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아주 오래되어 낡아 보였음에도 송방이 문을 열 때, 작은 소음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송방을 따라 작은 문을 통해 담 밖으로 나간 진송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우, 우와!”
담을 통과했으면 응당 밖이 나와야 하건만 그게 아니었다. 담 밖에 또 하나의 담이 사방을 가로막은, 꽤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곳곳에 십여 개의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도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앞에 놓인 탁자에는 술병과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백운촌과 내원에서만 생활하던 진송하에게는 정말 충격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진송하는 연달아 탄성을 내지르며 하나같이 술에 취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도사들을 구경했다.
송방은 그런 진송하를 제지하지 않았다. 원래 외원에 있을 때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정갈한 몸가짐을 보여야 하지만, 이곳만은 외원뿐만 아니라 내원까지 통틀어 무당의 도사들에게 일탈이 허용된 유일한 공간이었다.
“송방, 여기 엄청 시끄럽다!”
아닌 말로 아까 무당객잔의 건물보다 이곳이 몇 배는 더 시끄러웠다.
“당연하지! 원래 평소 얌전한 사람들이 놀 땐 화끈한 법이라고! 이 법칙이 도사들에게 적용되지 말란 법은 없는 거지. 푸하핫!”
“헤헤헷!”
두 사람은 이 비밀스런 공간 안에서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봤자 주변의 소음에 완전히 묻혀 버렸기에 다른 도사들에게 피해를 줄 염려도 없었다.
한낮임에도 꽉꽉 들어찬 도사들 때문에 한참을 둘러보고 나서야 빈자리를 찾은 둘은 재빨리 그곳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이 들어온 문이 열리며 기름끼가 잔득 묻은 회의(灰衣)를 입은 뚱뚱한 중년인이 음식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그는 다른 탁자에 음식을 내려놓은 후 주변을 둘러보다가 진송하와 송방 쪽의 탁자가 비었다는 걸 알아채고는 다가왔다.
“호오. 이번에는 어린 손님들이시군요. 아무리 사정해도 술은 안 됩니다?”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송방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진송하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 손 아저씨? 대체 이곳에서 뭐하세요? 지금 한창 내원에서 요리하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송하가 손 아저씨라 부르는 존재는 백운촌에 기거하며 내원의 요리를 담당하는 자였다. 며칠 전 송방에게 준 경단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줄 정도로 진송하와는 꽤 가까운 존재이기도 했다.
진송하 역시 예전에 뚱뚱하던 시절, 자신의 몸매와 그리 다를 바 없었던 이 손 씨를 유난히 따랐었다.
그런데 그런 손 씨를 백운촌이나 내원이 아닌 외원, 그것도 북쪽 구석에 위치한 이 비밀스런 장소에서 봤으니 진송하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