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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25화)
Chapter 7. 사이코 닥터(5)


사이코 닥터는 여동생의 입을 빌려 계속해서 말했다.
“이 정도면 힌트는 충분히 줬으니까. 어디 한번 나랑 신나게 놀아 보자고. 참! 이 몸은 확실히 네 여동생의 것이 맞으니까. 살살 다루라고.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큭. 큭. 큭.”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나 녀석은 지금 내 여동생의 몸을 장악하고 있다.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데다 만약 여동생을 죽여도 녀석의 본체는 다른 곳에 따로 있다.
지금 상태로는 절대 녀석을 해치울 수 없다는 말이다.
과연 녀석이 자신만만, 잔뜩 여유를 부릴 만한 상황이긴 하군.
파직― 파지지직―
“쿠오오…….”
그때, 곰 인간을 해치운 설린 씨가 나를 보며 다급히 외쳤다.
“플레이어들이 잔뜩 몰려오고 있어요!”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이 좀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젠장! 너무 많다!
답이 없는 상황. 벼랑 끝에 내몰린 것 같은 기분이다.
당황스러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사이코 닥터는 기분 좋은 듯 크게 웃었다.
“큭. 큭. 크하하하하!”
저 X새끼.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미친 듯이 웃어 재끼기는!
그때 무슨 생각인지 설린 씨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사이코 닥터에게 말을 걸었다.
“실망했어요. 이것밖에 안 되나요? 김광수 씨.”
순간, 마치 여배우처럼 그녀의 기질이 갑자기 변했다.
도도한 시선. 냉소적인 말투.
살얼음이 낀 듯 차갑게 바뀌었다.
미모가 워낙 출중해서 그런지 그런 차가운 태도도 그녀에겐 매우 잘 어울렸다.
갑자기 변한 설린 씨의 태도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사이코 닥터가 그녀에게 반문했다.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아름다운 레이디.”
레이디는 임마! 사흘 전에 먹은 게 도로 올라오겠다! 버터, 마요네즈 같은 자식!
뭔가 도발적인 느낌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게임이라는 건 아슬아슬한 맛이 있어야 재미있는 거예요. 지금 김광수 씨가 하는 건 일방적인 횡포지 결코 게임이라고 할 수 없어요. 한 마디로 천박해요!”
무슨 이유로 미친놈을 도발하는 걸까?
나는 설린 씨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늘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사이코 닥터가 미친놈답게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김광수 원장은 그녀의 태도에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큭. 큭. 천박하다라? 좋습니다. 아름다운 레이디와 대화하는 건 언제나 유쾌한 일인 법. 어디 한번 날 설득해 보시죠.”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두 마리 싸움닭이 싸우고 있어요. 김광수 씨 같으면 어느 쪽에 돈을 걸겠어요.”
“그야 물론 이길 것 같은 쪽이겠죠.”
“어느 쪽이 이길 줄 안다면 내기 같은 건 애초에 성립 안 되겠죠?”
“큭. 큭. 그러니까 지금 나와 내기를 하자는 겁니까? 레이디.”
그제야 난 설린 씨가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녀석의 자존심을 슬쩍 띄워 주면서 호기심을 자극해 내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도발.
게다가 이미 사이코 닥터는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설린 씨는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그에게 선언했다.
“그래요. 당신이 내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프라이드가 높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요. 너무 쉬운 건 시시하잖아요? 나와 내기를 하죠.”
그녀의 말에 뭐가 그리 좋은지 한참을 웃어 대던 사이코 닥터가 입을 열었다.
“큭. 큭. 큭. 좋습니다.”
사이코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설린 씨가 그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 낸 건지.
의외로 간단히 녀석은 내기를 승낙했다.
“하지만 내기에 뭘 걸 생각입니까? 레이디. 그렇게 센스 없을 리는 없으시겠지만 시시한 걸 걸면 없었던 일로 하죠.”
잠시 숨을 가다듬던 그녀는 진지한 어조로 사이코 닥터에게 말했다.
“제가 지면 기꺼이 당신의 파트너가 되겠어요.”
“그건 안 됩니다! 설린 씨!”
반사적으로 나는 외쳤다.
“차라리 지금 싸웁시다!”
저 미친 변태 자식에게 그녀를 내어 줄 수는 없다. 설린 씨는 어디까지나 나의…….
그때.
「민혁 씨. 지금은 제게 맡겨두세요.」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아니, 그녀의 생각이 직접 내 머릿속에 전해진 것이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가진 또 다른 능력.
설린 씨가 정신감응(Telepathy) 능력을 숨기고 있었나?
「속인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민혁 씨.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 테니 지금은 그냥 잠자코 있어 주세요.」
“…….”
흥분한 내 반응을 보던 사이코 닥터는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웃어 댔다.
“큭. 큭. 큭. 큭. 큭.”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딱 멈춘 그가 냉소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가 왜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레이디. 저는 두 분을 쓰러뜨리고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큭. 큭.”
틀린 건가? 맞장구쳐 주는 척한 것도 결국 우릴 가지고 논 것이었나?
난 다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맹렬히 싸우다가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설린 씨는 사이코 닥터의 냉소적인 태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도도한 태도로 그를 비웃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슬쩍 흘렸다.
“그렇지만 제 영혼을 가질 수는 없겠죠. 가련하군요. 자아를 잃은 인형 따위 아무리 많아도, 김광수 씨 당신은 언제나 그랬듯이 여전히 혼자예요.”
마치 속마음을 읽는 듯한 그녀의 태도. 참! 진짜로 읽고 있는 거였지?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사이코 닥터.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당신과 같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파트너는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죠. 좋습니다. 그럼 만약 내가 지게 될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그저 한 사람만 내어 주면 돼요. 민혁 씨의 여동생을 멀쩡한 상태로 되돌려 제게 주세요.”
“좋습니다.”
사이코 닥터는 흔쾌히 그녀의 요구를 수락했다.
계속해 설린 씨는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저희들을 풀어 주세요. 김광수 씨. 그리고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좋습니다. 이틀의 시간을 주겠습니다.”
놀랍게도 사이코 닥터는 정말로 우리를 풀어 주었다.
플레이어들이 모두 병실로 돌아가 버렸기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병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어째서 정신감응 능력자라는 걸 내게 숨겼는지.
또 달리 내게 숨긴 것은 없는지.
그런데 내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내게 말했다.
“10분 정도 더 가면 우울할 때 가끔 들리는 칵테일 바가 있어요. 거기서 아직 하지 못한 제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잠시 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칵테일 바에 들어갔다.
“…….”
묵묵히 칵테일을 마시던 나는 갑자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설린 씨. 정신감응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설린 씨가 사이코 닥터를 쉽게 설득할 수 있었던 건 정신감응 능력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을 읽고 순간순간의 생각까지 정확히 읽어 낼 수 있다면. 상대의 기분을 맞춰 주거나 호응을 이끌어 내는 건,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일 테니까.
“네. 민혁 씨가 생각하는 것이 맞아요.”
“…….”
“숨겨 왔던 건 미안해요. 하지만 일부러 속이려고 든 건 아니었어요. 제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플레이어들은 한결같이 결국 나를 멀리했어요. 누군가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는 건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죠. 그래서 민혁 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이해해요. 설린 씨. 그럼 이제 숨기고 있는 건 없는 거죠?”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고, 나는 가끔씩 그녀의 말에 호응해 주며 조용히 경청했다.
그녀는 약 3개월 전, 처음 플레이어 능력에 각성했다.
원래 그녀의 고유 능력은 정신감응 능력 하나뿐.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설린 씨는 이플렌시아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신의 저주로 점점 악화되는 심장병을 고치기 위해 이플렌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우연히 이플렌시아에서 최대진이라는 이름의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정신감응 능력을 통해 그가 선한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되었고 서슴없이 동료가 될 수 있었다.
대진이란 사람은 플레이어 길드 중 하나인 궁그니르란 길드의 소속이었고 그녀도 그를 따라 궁그니르에 가입했다.
궁그니르 길드는 일그러진 자를 사냥하는 것이 주목적인 길드였다.
일그러진 자를 죽이면 라이프를 30포인트 모을 수 있으니, 금방 666개의 라이프를 모아 신들의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름 합리적인 목표를 가진 모임. 그러나 처음에 그녀는 일그러진 자를 죽이는 게 싫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일그러진 자를 죽이는 것이 싫었어요. 그들도 처음엔 사람이었으니 결국 살인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을 했어요.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거죠.”
사실 그때의 설린 씨는 궁그니르 길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그러진 자를 사냥할 만한 좋은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고 오히려 정신감응 능력도 숨겼다.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물어보지 않던가요?”
“플레이어 능력 중에는 아주 쓸모없는 것도 많아요.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이라든가, 소리 내지 않고 방귀를 뀔 수 있는 터무니없는 능력도 있죠. 제 능력도 그런 쓸모없는 것이라고 둘러댄 거예요. 그리고…….”
길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길드원으로부터 무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대진이란 남자 때문이었다.
“대진 씨는 궁그니르 길드에서 간부급 임원이에요. 그래서 충분히 절 비호할 수 있었죠. 사실 그 사람을 절 좋아했고, 전 그 사실을 이용했어요. 나쁜 짓인 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러다가 우연히 길드원 중 현우란 사람이 내 능력에 대해 눈치채게 되었어요.”
숨기고 있던 그녀의 능력에 대해 알게 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미끼로 설린 씨를 협박하며 몸을 요구해 왔다.
그녀의 탁월한 미모 때문에 생겨난 재앙이었다.
“계속해서 거부했지만 현우는 끈질기게 제 숨통을 조여 왔어요. 그러다가 대진 씨는 내가 그 사람에게 협박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무엇 때문에 협박 받고 있는지는 몰랐죠. 그러다가 결국…….”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잔뜩 흥분한 상태에서 대진이란 사람이 현우를 우발적으로 죽이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우는 라이프를 모으지 못한 초보 플레이어. 그가 완전히 소멸함으로써 설린 씨의 정신감응 능력은 노출되지 않았다.
“길드원을 죽이게 된 대진 씨는 같이 도망치자고 말했어요. 나는 그와 함께 길드를 떠나게 되었어요.”
궁그니르 길드에선 당연히 길드원을 죽인 대진이란 사내를 응징하기 위해 추적자를 파견하고 현상금을 걸었다.
플레이어들 중에는 현상금 사냥꾼들도 있었다.
두 사람은 현상금 사냥꾼들과 싸우게 되었고 그 와중에 설린 씨는 뇌전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국 대진이란 사내는 현상금 사냥꾼들의 손에 죽게 되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라이프 포인트가 모두 소모될 때까지 수백 번을 죽었다.
“대진 씨가 소멸되고 나자 더 이상의 추적은 없었어요. 원래 현상금이 걸린 건 그 사람뿐이었으니까요. 원한을 맺게 된 현상금 사냥꾼들이 있긴 했지만, 정신감응과 뇌전 능력을 갖게 된 제게 적수가 되지 않았죠.”
그렇게 궁그니르 길드에서 탈퇴한 그녀는 자신을 가까이한 사람은 불행하게 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어 혼자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우연히 일그러진 자와 사투를 벌이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민혁 씨의 영혼은 맑아 보였어요. 그 사람의 마음을 닮았어요. 나를 도와주다가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 대진 씨라는 남자…….”
티잉!
상당히 취했는지 칵테일 잔을 실수로 쓰러뜨렸다.
“괜찮아요? 설린 씨. 그러게 너무 마시지 말라고 하니까…….”
“으음. 피곤해요. 민혁 씨.”
결국 그녀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저 손님, 영업시간 끝났습니다.”
“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알겠습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설린 씨.
나는 결국 그녀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
이거 난감하네?
설린 씨가 사는 아파트는 알고 있지만 술이 떡이 된 그녀를 데리고 그녀의 부모 앞에 나타날 수는 없다.
어디서 술이라도 좀 깨고…….
주위를 살피자 여기저기 모텔의 네온사인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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