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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24화)
Chapter 7. 사이코 닥터(4)


“도대체 환자들에게 무슨 실험을…….”
“이곳에서 마주친 플레이어들은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항정신성 약물이나 마약 성분이 투여되었을지도 모르죠. 게다가 정신계 능력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으니까. 약물의 힘을 빌려 세뇌시켰을지도…….”
“젠장!”
나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을 내리쳤다.
설린 씨가 말하는 그런 일을 내 여동생이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은진이의 모습을 보고도 난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에 와 닿았다.
“민혁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단번에 이런 상황을 예측하는 건 다른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고마워요. 설린 씨.”
그녀의 위로에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고 있었다.
“은진 씨는 아마도 지하 2층에 있을지도 몰라요. 그가 정신계 능력자라 해도 은진 씨가 입원한 건 고작 이틀. 세뇌를 끝마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죠.”
설린 씨의 추측은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일단 지하로 가야겠군!
“그렇다면 어서 갑시다!”
서둘러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원장실 문이 통째로 부서져 나갔다.
콰앙!
입구를 통해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불쑥 들어왔다. 불곰과 사람을 절반씩 뒤섞으면 이런 모습이 될까?
“쿠어엉!”
곰을 닮은 근육질 덩어리가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한번 해 보자 이거냐?!
뱀프 블레이드를 위에서 아래로 단번에 내리쳤다.
빠른 속도에 칼날에 담겨진 엄청난 힘.
파악!
생각대로 곰 녀석은 내 공격을 피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반 토막으로 잘려 나가지도 않았다.
그저 가죽만 베었을 뿐 칼날이 더 이상 파고들지 못했다.
칼날이 들어가지 않는 단단한 가죽이 이 녀석의 플레이어 능력인가?
“쿠어엉!”
녀석이 곰처럼 울부짖으며 앞발(?)로 가슴을 쳤다.
“쿨럭!”
갈비뼈가 왕창 부러지며 목구멍으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충격으로 밀려난 나는 벽에 머리를 쾅 하고 부딪혔다. 눈앞에 별이 번쩍하는 것 같았다.
번쩍―
때맞춰 설린 씨가 불러낸 번개가 곰 녀석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털가죽이 타며 짐승의 노린내가 물씬 풍겨 왔다.
다행히 녀석의 질긴 가죽은 물리적 타격만 막아 낼 뿐 원소계 마법엔 저항력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쿠어어어!”
곰 인간이 울부짖으며 다리가 풀린 듯 비틀거렸다.
쉐에엑―
나는 곰의 오른쪽 눈을 노리고 단검을 던졌다.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단검을 염력으로 단단히 움켜잡고 목표물을 향해 쏘아 냈다.
염력의 힘으로 더욱 빨라진 단검이 녀석의 눈으로 빨려 들어가듯 날아가 박혔다.
파악!
“쿠어어어―!”
상처를 입은 녀석은 곰처럼 울부짖으며 입구를 통해 달아났다.
“거기 서!”
재빨리 뒤쫓아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눈앞에 투명한 나비가 날아왔다.
어? 이건!
나는 몸을 튕기듯 뒤로 빼냈다.
샤락―
나비가 어깨를 스치며 피부를 찢어 놓고는 허공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투명인간 녀석, 죽지 않은 거냐?
눈치 빠른 설린 씨가 재빨리 번개를 불러내 녀석이 있는 곳을 향해 날렸다.
번쩍―
환한 빛과 함께 사방으로 뻗어 나간 번개 줄기.
그러나 그때.
최르륵― 촤악―
허공에서 나타난 물줄기가 엷은 막으로 펴지며 설린 씨의 번개를 막아 냈다.
물은 훌륭한 전도체.
물의 장막이 번개를 모조리 흡수해 버렸다.
설린 씨의 강력한 뇌전이 이런 식으로 막힐 줄이야!
난 그제야 번개의 상극은 물의 능력이라는 걸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뚜벅. 뚜벅.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으……. 은진아!”
뜻밖에도 물의 장막을 불러낸 플레이어는 바로 여동생이었다.
은진이의 낯빛은 납처럼 창백했고, 눈동자는 죽은 생선의 눈알처럼 초점이 없었다.
“치……. 침입자를 처단하라.”
고장 난 라디오처럼 중얼거리던 은진은 나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엉겨 붙은 전기톱이 들려 있었다.
드르르르륵―
어째서 은진이가 이런 몰골로 내 눈앞에 서 있는 거지?
도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패닉 상태에 빠진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여동생에게 다가갔다.
“민혁 씨! 위험해요!”
파악!
은진이는 내 어깨를 향해 전기톱을 내리찍었다.
빠득― 부지직―
어깨뼈가 톱날에 갈려 나가며 셔츠가 피범벅이 되었다. 튀어 오른 핏방울이 뺨에 철썩 엉겨 붙었다.
“크아아악!”
뼈를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에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여동생을 힘껏 밀쳐 냈다.
파앙!
충격의 여파가 은진의 갈비뼈를 뚝 부러뜨렸다.
뒤로 부웅 나가떨어진 여동생은 벽에 부딪히며 전기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은진아! 괜찮아?!”
눈을 깜빡거리던 은진은 갑자기 울먹이며 통증을 호소했다.
“흐윽. 오……. 오빠! 아파!”
“오빠가 구해 줄게! 걱정하지 마. 은진아!”
여동생에게 다가서려는 나를 향해 또다시 핏빛 나비가 날아왔다.
샤락―
“꺼져!”
나는 분노하며 핏빛 나비를 향해 맹렬히 칼을 휘둘렀다.
정신계 능력이 내 몸속에서 폭발하며, 엄청난 힘이 칼날의 속도를 가속화시켰다.
슈아아아악!
나비가 허공으로 숨어들기 전에 칼날이 그것을 베었다.
파악!
잘려 나간 나비에서 백색 분말이 확 퍼져 나왔다.
“흐읍.”
가루를 들이마시게 된 나는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조심해요! 민혁 씨!”
번쩍―
설린이 내게 외치며 번개를 불러냈다.
쉐에에엑!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나를 향해 날아든다.
꽈직!
날카로운 금속이 목젖을 뚫고 틀어박혔다. 숨통이 턱 막히며 호흡이 멈췄다.
파직― 파지직―
그 찰라, 설린 씨가 불러낸 번개가 투명인간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덕분에 녀석의 몸이 마비되며 내게 후속 공격을 날리지 못하게 되었다.
설린 씨는 투명인간을 해치우려는 듯 전력을 다해 번개의 전압을 높였다.
파아앗―
번개 다발이 굵어지며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결국 녀석은 시커먼 숯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민혁 씨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상처를 헤집어 날카로운 금속조각을 뽑아냈다.
“쿨럭!”
피가 왈칵 쏟아졌지만 숨통이 트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러서 그런지, 아니면 정체불명의 백색 분말 때문인지 시야가 일그러졌다. 어지러움 때문에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여동생의 목소리는 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흐윽. 오빠! 의사가……. 내게 나쁜 짓을 했어.”
나……. 나쁜 짓이라니?!
순간. 끔찍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쿠어어!”
그때 도망갔던 곰 인간이 다시 나타났다. 설린 씨가 재빨리 번개를 소환해 그를 막았다.
파지지직―
그런 상황에서 은진이는 계속해서 내게 말했다.
“흐윽. 전기 치료실에서 몸에 전극을 꽂았어. 전압을 높이고 어서 정신 줄을 놓으라고 다그쳤어. 아무도 널 구해 낼 수 없다면서, 절망하고 또 절망하라고…….”
“크윽. 으……. 은진아!”
가슴이 메어질 듯 아파 왔다.
어린 것이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팠어! 날 아프게 했어. 그러지 말라고. 풀어 달라고 빌었는데……. 옷을 찢었어. 그리고 의사와 남자들이 나를…….”
“으아아악!”
나는 더 이상 여동생의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 비명을 내질렀다.
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 알기에, 그래서 더욱 은진이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멈칫하던 은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끝이라고 생각했어. 완전히 절망해 버렸어.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플레이어 능력 각성이라고…….”
“…….”
무슨 말이지? 의사 X새끼가 은진이를 플레이어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 그런 게 가능해?
여기 와서 만난 플레이어는 여러 명.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사이코 닥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앞뒤가 어느 정도 맞기는 했다.
“기뻤어! 짐승들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
“…….”
“오빠! 난 물을 불러내 자유자재로 형태를 만들 수 있어. 날카로운 물의 칼날을 만들어 그것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어. 잘했지?”
“응……. 잘했어.”
무심코 대답하자 은진이가 갑자기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데 나처럼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꾸 나타났어. 너무 많았어. 결국 붙잡혔는데……. 의사 X새끼가 날 수술대 위에 눕혔어. 부분 마취만 하고 내 머리를 뚫었는데, 뭔가 이상한 걸 집어넣었어. 지금 속에서, 머릿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거 같아. 꿈틀꿈틀. 으윽! 으으…….”
갑자기 은진이가 눈을 허옇게 뒤집으며 거품을 물었다.
“으헉. 으어어―!”
몸을 털썩털썩 떨며 간질병 환자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은진아! 정신 차려. 은진아!”
“끄어어억.”
한차례 괴성을 지르던 은진이가 갑자기 경련을 멈추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
설마……. 설마 아니겠지? 은진아.
“으―은지―인아아아아!”
나는 비명처럼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왈칵 은진이를 품에 안고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은진아! X발! 젠장!”
이렇게 죽는 거냐……. 제발 가지 마. 은진아.
파악!
순간, 은진의 오른손이 갑자기 움직였다.
소매에 숨겨 뒀던 것인지 날카로운 칼날이 뱃속을 파고들며 내장을 찔렀다.
칼날을 비틀어 뱃속에서 빼낸 은진은 계속해서 내 복부를 찔러 댔다.
팍! 팍! 팍! 팍! 팍!
“크억!”
난 고통으로 신음하며 간신히 여동생을 밀어냈다. 은진의 입술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웃음소리를 냈다.
“큭. 큭. 이거 참. 재미있군!”
여동생의 입에서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났다.
“뭐……. 뭐냐?! 넌?”
“우린 구면인데. 몰라 보니 섭섭하군.”
“김광수 원장?!”
“딩동댕! 맞췄어.”
“X자식!”
복부를 찔리며 내장이 토막 났지만 상처는 금방 복구되고 있었다.
내게는 트롤에 가까운 재생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애초에 녀석이 여동생을 이용해 날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죽이려면 더 치명적인 곳을 찔렀을 테니까.
날 가지고 놀려는 거냐? 이 X자식!
녀석의 뒤틀린 정신 상태가 약간은 짐작이 되었다.
배부른 고양이처럼 쥐를 잡아먹지 않고 가지고 논다.
그러니까 녀석은 나를 지금 가지고 놀다가 죽여도 되는 쥐새끼 정도로 보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