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ON 플레이어 1권(23화)
Chapter 7. 사이코 닥터(3)
우선, 우리는 영화 속의 특수 요원이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 잠입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병원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낮에 병원을 방문할 때 느꼈지만 이 병원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잠입하려다 오히려 건물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나는 설린 씨에게 간략히 작전을 설명했다.
“일단 정면 돌파해서 소란을 피운 뒤, 제가 원장실로 들어가 병원 설계도를 얻겠습니다. 설린 씨는 되도록 사람들을 병원 밖으로 유인해 주십시오. 그사이 제가 설계도를 보고 들어가 여동생을 구해 내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네요.”
현재 시각은 오후 11시 37분.
늦은 시간이라 예상대로 병원 정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어차피 소란을 피우기로 작정한 터라 나는 다소 요란하게 정문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찌이잉―
뱀프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잡은 채 강화계 능력을 최대한 끌어냈다.
미궁에서 만난 노인, 그에게서 흡수한 에너지.
그 결과 보유한 강화계 에너지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때문인지 강화계의 힘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슈아아악―
칼날을 휘두르자 강철과 강화유리가 두부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충격의 여파로 부서진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난폭한 소리를 냈다.
파앙!
내가 문을 부수고 있는 동안, 설린 씨는 CCTV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환한 빛과 함께 생겨난 번개가 번쩍하고 기기에 내리쳤다.
파지직―
스파크가 튀며 안쪽의 전선과 기판이 타들어 갔는지 감시 카메라에서 매캐한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카메라를 전부 클리어했어요.”
“들어갑시다.”
뚜벅. 뚜벅.
입구를 통해 성큼 들어서자 정면에 텅 빈 데스크가 보였다.
비상구 등의 푸른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가운데, 데스크 안쪽의 문틈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있는 모양이다.
재빨리 제압하기 위해 데스크 쪽으로 다가서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간호사가 나왔다.
간호사의 모습은 어딘가 기묘했다.
간호사복을 줄여 입기라도 했는지 몸에 딱 맞았다. 글래머스한 체형에 늘씬하게 빠진 다리 덕분에 간호사는 마치 모델 같았다.
얼핏 보기에 딱 보기 좋은 모습이지만 여긴 간호사복 패션쇼나 모델 워킹을 하는 곳이 아니다.
병원 풍경과 어딘지 어긋난 듯한 부조화.
“진료 시간이 끝났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간호사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딱딱했고 표정이 전혀 없었다.
눈빛도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고 흐릿한 것이 뭔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시퍼런 칼날이 상대에게 잘 보이도록 칼을 조금 더 치켜 올려 위협했다.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얌전히 있어.”
보통의 여성이라면 90센티가 넘는 시퍼런 칼날을 보고 공포에 질리거나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러나 간호사는 여전히 고저가 없는 건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시지 않으시겠다면 강제로 쫓아내겠습니다.”
이 병원 간호사가 너무 불친절하구만! 직원 친절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간호사가 갑자기 내 얼굴을 노리고 소매 속에 숨긴 메스를 휘둘렀다.
쉬익―
제법 날카로운 공격이었지만 내 시야에는 느릿하게 보였다.
슬로우 모션으로 날아오는 메스를 가볍게 피한 뒤, 간호사의 팔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래도 일반인인데 죽일 수야 없잖아?
파악―
간호사의 팔이 깨끗하게 절단되며 잘려 나간 팔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절단면에서 피가 솟구쳤지만 간호사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핏발이 선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찌이― 이이잉―
순간 눈앞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주위의 산소가 급속도로 희박해지고 있었다.
이 여자, 플레이어였나?
번쩍―
순간 내 등 뒤에서 플래시 터지 듯 불빛이 터졌다.
번개의 줄기가 앞으로 뻗어 나가며 간호사의 몸을 때렸다.
파지지직―
고기 타는 듯한 냄새가 확 풍겼다.
실제로 번개에 휩싸인 간호사의 몸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살점이 타들어 가고 있는데도 비명 소리 하나 없이 무표정했다. 그런 상태로 그녀는 설린 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쪽 손님의 죄목은 무단 침입에 폭행. 사형입니다!”
찌이― 이이잉―
주위의 공기가 다시 일렁인다.
실제로는 공기가 일렁이는 게 아니라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입지가 일렁이는 것이다.
“허억!”
공격을 받은 설린 씨가 숨 쉬기가 곤란해진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위험해!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당황하긴 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숨을 참으며 간호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서걱!
수평으로 휘두른 칼날에 그녀의 목이 반듯이 잘렸다. 잘려 나간 머리가 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푸아!”
그제야 우리는 정상적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띠링!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왔다. 예상했던 바다.
보나마나 보상으로 얻은 라이프 포인트에 대한 안내 문자겠지?
― 상대 플레이어를 살해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라이프 1포인트를 얻었습니다.
― 상대 플레이어를 죽여 모든 속성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조금 늘었습니다.
― 상대의 능력을 흡수하는 데 실패합니다. 특수 능력의 일부분이 순수한 에너지로 변환 되어 흡수됩니다.
에너지가 흡수되며 시원한 기분과 함께 피로가 확 풀렸다.
기분 좋은 활력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설린 씨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플레이어가 여기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요?”
“게다가 간호사의 상태가 이상했어요. 마치 다른 플레이어에게 조정 받고 있는 듯. 민혁 씨도 그런 느낌이 나지 않았나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약물 주사를 맞은 것 같군요.”
나는 잘려 나간 간호사의 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간호사의 팔에는 무수한 주사 바늘 자국이 나 있었다.
머릿속에서 생각의 가지가 뻗어 나갔다.
추측컨대 항정신성 약물을 투여하고 최면이나 세뇌 같은 걸 걸어 둔 게 아닐까?
이것으로 김광수 원장이 사이코 닥터일 것 같다는 확신이 좀 더 강해졌다.
이 자식이 은진이에게 벌써 뭔가 한 거 아냐?
머릿속에 원장 녀석이 여동생의 팔에 위험한 주사를 놓는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설린 씨! 원장실로 갑시다.”
난 그녀의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계단 위로 쿵쾅거리며 뛰어 올라갔다.
“민혁 씨! 조심해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원장실 손잡이를 잡았다.
역시 잠겨 있군.
끼이익― 끼―
강제로 손잡이를 비틀어 당기자 강철로 된 문이 일그러지며 손잡이가 뽑혀져 나왔다.
샤락―
그 순간, 뭔가 공기와 마찰하는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위험을 느낀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서걱!
뭔가 얇고 예리한 것이 피부를 스쳤다.
갈라진 상처에서 뜨거운 피가 팔뚝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뭐지?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오싹 돋았다.
수십 배로 민감해진 내 감각에도 녀석의 기척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공기의 작은 일렁임까지 감지해 낼 수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샤락―
다시 뭔가 가벼운 것이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작은 소리는 들었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무작정 움직여 자리를 피했다.
샤락―
그런데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허공에서 방향을 틀며 나를 쫓아왔다.
나비.
환영처럼 언뜻 투명한 나비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서걱!
“크윽.”
날카로운 것이 내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힘줄과 동맥이 잘리며 피가 파악 뿜어져 나왔다.
투명화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인가?
뒤쫓아 올라온 설린 씨가 피를 흘리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민혁 씨!”
“설린 씨! 공격해요!”
설명이 생략된 굉장히 불친절한 요구였지만, 다행히 설린 씨는 내가 원하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번쩍―
그녀가 불러낸 번개가 상당히 넓게 퍼지며 주위로 번져 나갔다.
파지직―
스파크가 튀며 무언가 반투명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복면을 쓴 170 정도의 작은 키의 사내였다.
슈아아악―
재빨리 사내와 거리를 좁히며 난 뱀프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카앙!
사내는 길이가 짧은 칼로 공격을 막아 냈다.
“타압!”
나는 뱀프 블레이드의 날카로움을 믿고 그대로 녀석의 칼을 잘라 버리려 했다. 그러나 녀석의 칼도 마법 아이템인 듯 쉽게 잘려 나가지 않았다.
타앗―
녀석은 내 힘에 저항하지 않고 뒤로 몸을 뺐다. 순식간에 녀석의 모습이 허공에 녹아든다.
슈아아악―
녀석이 모습을 완전히 숨기기 전에 칼을 휘둘렀으나 베는 느낌이 없었다.
번쩍―
설린 씨가 다시 번개를 불러냈다. 그러자 번개에 휩싸인 녀석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녀석의 위치는 바로 설린 씨의 등 뒤.
“뒤쪽!”
난 짧게 외치며 사내를 향해 3개의 단검을 던졌다. 그러나 던지기 실력이 형편없었기에 단검들은 모두 엉뚱한 곳으로 빗나갔다.
샤아악―
사내는 설린 씨의 등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사이를 노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에 염력을 집중했다.
찌잉―
목표는 녀석의 오른쪽 손목.
파악!
바닥에서 솟아오른 단검이 칼을 쥔 녀석의 손목을 뚫고 들어갔다.
피가 튀며 힘줄이 잘리자 손목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번쩍―
바로 그 순간, 번개가 뿜어져 나와 사내의 몸을 때렸다. 나 역시 사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녀석은 망설임 없이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휘익!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한 사내는 아래로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사내를 향해 단검을 던졌으나 맞지 않은 것 같았다.
사내의 모습은 스르륵 허공에 녹아들었다.
“인비져빌리티(Invisibility)로군요!”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 놔두고 왜 영어로 하세요. 투명 능력이라 하세요. 설린 씨!”
나는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긴장을 풀었다.
곧 원장실로 들어간 나는 책상의 서랍에서 어렵지 않게 건물 도면을 손에 넣었다.
“도면이 꽤 복잡하네요?”
병원 건물은 지상 5층에 지하 2층으로, 총 7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마다 복도를 통해 여러 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으며 폐쇄 병동이라 문으로 잠겨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엘리베이터가 없고 계단을 통해서만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면을 통해 건물의 구조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혁 씨! 여기 이 공간은 뭘까요? 꽤 넓은데…….”
설린 씨가 가리킨 곳은 지하 2층.
도면에는 간단히 생각하는 방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생각하는 방이란 건 문제를 일으키는 환자를 가두어 두는 일종의 징벌방이다.
감옥의 독방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독방을 쓸데없이 크게 만들어 둘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는 건 다른 목적으로 쓰인다는 건데?
“혹시 실험실 같은 건 아닐까요? 민혁 씨. 사이코 닥터는 원래 인체 실험이나 약물 실험을 즐기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니까…….”
실험실!
갑자기 실험실이란 단어에 내 머릿속에는 온갖 실험을 당하는 여동생의 모습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