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ON 플레이어 1권(22화)
Chapter 7. 사이코 닥터(2)


기다려야 한다니 좀 불쾌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10분 후, 나는 김광수 원장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지금 여동생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원장은 의외로 내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곧 만나 보실 수 있도록 조치해 드리죠.”
음. 내가 괜히 민감하게 생각한 건가?
잠시 후, 나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면회실로 들어갔다. 곧 분홍색 환자복을 입은 은진이가 면회실로 들어섰다.
“잘 지냈어? 은진아.”
“으응…….”
면회실에서 만난 여동생의 모습은 다소 기운이 없어 보였으나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간호사들은 잘해 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으응……. 괜찮아.”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으나 은진이는 굉장히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처음에 입원시켰을 때 실어증 증세를 보였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간단한 대답이라도 하니 상태가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난 그녀에게 한 가지 확인해 볼 것이 있었다.
“저……. 혹시, 병원에 입원한 후에 별다른 일 없었어? 한참 동안 이상한 꿈을 꾼다거나 꿈에서 뭔가 초능력 같은 걸 쓰게 되었다거나.”
은진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역시 괜한 걱정이었나?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남기는 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면회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김광수 원장을 만났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민혁 씨. 여동생 분은 보기보다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넉넉잡아 3개월 안에 치료를 마치고 퇴원할 수 있을 겁니다.”
원장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태도에 난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걸 느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장님. 우리 은진이 좀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정성껏 치료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그날 오후. 난 시내의 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설린 씨를 만났다.
저녁 식사라고 해도 중국집이나 고기 뷔페 정도를 생각했던 나에게 그곳은 너무 비싼 곳이었다.
정장을 차려입길 잘했구나.
왠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으면 입장을 거부당했을 것 같은 고급스런 분위기다.
“민혁 씨. 오늘 멋지네요.”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깔끔한 정장을 입고 나타난 나에게 가벼운 칭찬을 해 주었다.
나도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설린 씨야말로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그런 말을 하고 나니 조금 낯간지럽긴 했지만 절대 과장하거나 아첨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낀 건 솔직한 내 진심이니까.
“주문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봉골레 비앙코에 리조또 깜베로니로 주시구요. 샐러드는 카프리제로 주세요. 와인은……. 음. 적당할 걸로 추천해 주세요.”
난 설린 씨가 주문하는 동안 재빨리 메뉴를 훑어보았지만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에 이탈리아 요리라고 알고 있었던 건 스파게티와 피자밖에 없는데 둘 다 느끼해서 싫어하는 편이었다.
차라리 라면에 김치가 훨씬 더 맛있지 않은가?
“같은 걸로 주세요.”
결국 쪽팔림을 무릅쓰고 그렇게 주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설린 씨는 내가 난처해질 만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제가 사는 거니까 맛있게 드세요.”
“네. 설린 씨도 맛있게 드세요.”
난 그녀의 손놀림을 눈여겨본 뒤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괜찮은 여자 앞에서 ‘난 이런 곳에 처음 왔어요.’라는 듯한 인상을 풍길 수는 없지 않은가? 이미 눈치챈 것 같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 봐야지.
어디 보자. 포크는 왼손, 나이프는 오른손.
와인 잔은 체온으로 덥혀지지 않게 기둥만 잡는다.
달그락.
이크! 소리를 내면 안 되는 것 같은데?
전쟁을 치르듯 간신히 식사를 끝냈다.
그녀의 표정을 슬쩍 훔쳐보니, 내가 특별히 실수한 건 없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단숨에 와인을 비우자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와인 한 잔 더 하시겠어요? 민혁 씨.”
“아뇨. 괜찮습니다. 충분히 마셨습니다.”
설린 씨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야경이 꽤 괜찮죠? 예전엔 이곳에 자주 와서 식사를 하곤 했거든요.”
“네. 그렇군요.”
“민혁 씨. 딴생각하고 있군요.”
“네. 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
나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다가 설린 씨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 다행히 그녀는 별로 화난 것 같지 않았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세요? 민혁 씨.”
“그게 사실은……. 조금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주면 안 되나요?”
사실은 하루 종일 여동생에 대한 걱정을 좀처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갔다 온 이후로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걱정거리를 마음에만 담아 두는 건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난 설린 씨에게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꺼냈다.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진지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미궁에서 여동생 분을 보셨다고요?”
“아니, 아무래도 제가 잘못 본 것 같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지만 설린 씨는 다시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그 병원과 의사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이야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특별히 그녀에게 숨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말해 주었다. 심지어는 단순한 사실이 아닌 의심스런 내 느낌과 추측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 설린 씨처럼 예쁜 여자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준 게 내심 기뻐서 좀 과장해서 말하게 된 것 같았다.
“확실히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군요. 어쩌면 그 의사, 플레이어일지도 몰라요.”
“플레이어라고요?”
뜻밖의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확실한 건 아니에요. 다만 사이코 닥터란 플레이어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녀는 사이코 닥터라는 별명이 붙은 플레이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도 의사인 그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들을 산 채로 잡아 해부하거나 이상한 실험을 하는 걸 즐기는 미치광이다.
그의 특수 능력에 대해 정확히 모르지만 정신 계열 능력이라 추측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의 진료 과목은 정신과.
만약 은진이가 입원한 XX 신경정신과 병원 원장이 바로 그라면, 지금 여동생은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혹시 그의 이름은 모르나요?”
설린 씨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플레이어의 이름은 스스로 밝히기 전에는 알아내기 힘들어요.”
내 여동생의 일이다.
1퍼센트라도 의심할 만한 부분이 있으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놈이 플레이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내지? 다짜고짜 공격이라도 해 봐야 하나?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민혁 씨. 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에요.”
설린 씨의 말이 옳다는 건 머리로 이해했다. 그러나 초초하고 불안한 기분은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 여동생의 일이니까.
“그렇게 걱정된다면 좋아요. 제가 한번 알아보죠.”
“설린 씨가요?”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이 있어요. 제게 병원 위치를 알려 주고 몇 시간만 여유를 주세요.”
도움을 청할 곳이라면 흥신소? 경찰?
그녀가 말하는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지만 말하길 꺼려하는 것 같아서 난 캐묻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플레이어예요. 믿을 만한 사람이니 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요.”
그래, 한번 설린 씨를 믿어 보자.
병원의 위치를 알려 주자 그녀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한두 시간 뒤면 연락이 올 거예요. 식사 다하셨으면 나갈까요?”
나는 설린 씨와 함께 시내를 한 바퀴 돌며 시간을 때웠다. 평소 때의 나라면 그녀와 데이트하는 게 즐거웠겠지만 지금은 그저 시간이 가지 않아 초초했다.
띠리리∼ 띠랑∼
드디어 설린 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설린 씨. 전화 왔어요.”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그녀는 다소 어두워진 안색으로 나에게 말했다.
“짐작이 맞는 것 같아요. 민혁 씨. 그가 사이코 닥터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환자들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연락이 왔어요.”
“젠장! 그럴 리가?!”
아니길 바랐는데, 왜 불길한 예감은 항상 잘 들어맞는 것일까?
“진정해요. 민혁 씨. 은진 씨는 입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아직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원장이 플레이어일 가능성은 높지만 사이코 닥터가 아닐 가능성도 높아요.”
그녀의 말을 들어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은진이를 빨리 퇴원시켜야겠어요!”
“그건 위험해요. 민혁 씨. 이쪽에서 뭔가 눈치챘다는 걸 들키면 그쪽에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요.”
생각할수록 마음이 초초해졌기 때문에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설린 씨. 괜찮으시다면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병원에 가 볼 생각이라면 같이 가요. 민혁 씨!”
“…….”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난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자 설린 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린 파트너 아닌가요? 당연히 함께 가야죠.”
생각해 보니 그녀는 강력한 뇌전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
그녀가 같이 가는 쪽이 훨씬 더 유리했다.
내가 지금 병원에서 가서 하려는 건 결코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려는 것은 아니니까.

그로부터 1 시간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병원 근처에 도착했다.
“저기 앞에서 내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손님.”
택시에서 내리자 산 중턱에 위치한 병원이 우리 눈앞에 보였다.
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 있어서 등 뒤로 어렴풋이 그림자가 생길 정도였다. 창백한 달빛 아래 더욱 하얗게 빛나는 병원 건물의 모습은 어딘지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덜컥.
난 기타 케이스를 열어 뱀프 블레이드를 꺼냈다.
원래는 도검소지증이라도 발급 받을 예정이었는데, 발급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고 신청 처리 기간이 너무 길어 당분간은 그냥 이렇게 가지고 다닐 생각이었다.
“민혁 씨! 상당히 멋진 칼이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설린 씨 서클릿도 꽤 멋진데요?”
설린은 미궁에서 구한 미스릴 서클릿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참고로 서클릿(Circlet)은 반지를 크게 확대한 듯한 단순한 원형 형태의 왕관이다.
미스릴 서클릿의 성능은 원소계 마법의 파괴력 30퍼센트 강화와 집중력 보조.
뇌(번개) 속성의 능력을 가진 그녀에게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이다.
“일단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설린 씨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힘을 아껴 두세요.”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에 난 일부러 그렇게 말해 두었다. 설린 씨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민혁 씨만 믿고 있을게요.”
우리는 병원에 침입하기 전에 모자와 마스크를 미리 착용했다.
사실 CCTV를 모두 부수며 전진할 계획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CCTV를 전부 부수지 못할 경우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말 정문으로 들어갈 거예요?”
“네. 그편이 더 빠를 겁니다.”
정면 돌파하는 건 얼핏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