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ON 플레이어 1권(21화)
Chapter 6. 미궁 속을 헤매다Ⅱ(4)
그게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고 지나갔는데 아마도 이거였나?
“염동력(念動力)인가?”
염동력이라 해도 고작 단검을 조정해 목표에 맞추는 정도.
그러나 특별히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는 나에겐 나름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따로 단검 던지기 연습은 안 해도 되겠구나.”
미궁의 지도를 손에 넣은 뒤에도 출구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도는 나침판과 같이 방향만 알려 줄 뿐, 복잡하게 얽힌 미로의 구조를 알려 주지 않는다.
출구에 가까워졌다가도 길이 막혀 되돌아가길 수차례.
“휴우, 이번에야말로 출구가 나타나겠지?”
눈앞의 통로가 막혀 있지만 않다면, 출구가 있는 보스 몬스터의 방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기대에 가득 차 발을 내딛는 순간, 통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드득. 드득.
아! 거의 다 왔는데…….
하필이면 미궁의 미로가 뒤바뀌는 시각과 딱 맞물린 것이다.
자칫하면 석벽에 깔릴 수도 있었기에 통로를 포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성질대로 하자면 그냥 통로에 뛰어들고 싶었다.
재빨리 이동하면 통로가 닫히기 전에 출구에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참고 버틴 거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면 될 일.
이제 와서 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드르륵. 덜컥.
석벽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통로가 사라지고 새로운 통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바뀌는 풍경 속에서 문뜩 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새롭게 생겨난 석벽 틈에 플레이어로 보이는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고집스런 눈매와 오뚝한 콧날. 옆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다.
“어? 은진아!”
난 깜짝 놀랐다. 그 여자의 얼굴이 여동생인 은진이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그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을 뿐.
드르륵. 타악.
곧 석벽이 내려오며 여자의 모습은 금세 가려졌다.
잘못 본 건가?
내가 본 것은 옆모습뿐. 그것도 거리가 멀었기에 스치듯 잠깐 본 것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꽤 닮긴 했지만 여동생이란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여동생은 플레이어가 아닌데다 지금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다. 이곳에서 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괜스레……. 기분 나쁘게 닮았네?”
석판의 움직임이 멈추고 눈앞에 새로운 통로가 열렸다.
난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리며 통로를 통해 나아갔다.
뚜벅. 뚜벅.
통로가 바뀐 게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새로운 통로는 출구가 위치한 방으로 곧장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제 나갈 수 있겠어!
나가기 전에 보스 몬스터를 만나 쓰러뜨려야 하지만 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미궁으로 들어오기 전보다 확실히 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심은 근물.
보스 몬스터가 무지막지하게 강할 수도 있었기에 나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찌잉―
석실로 들어서기 전에 나는 강화계 능력을 최고조로 끌어 올려 두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공격을 받아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기습이라면 질리도록 받아 봤으니까.
드르륵―
석실 문 앞으로 다가가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뱀프 블레이드를 살짝 휘둘러 본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석실 한복판에는 뿔이 달린 염소 머리에 아래쪽은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괴물이 있었다.
5미터는 될 듯한 거구에 등에는 검은 날개가 달려 있어 마치 중세 건물 벽화에 그려진 악마의 모습 같았다.
“어?”
그러나 악마 같은 괴물은 세 토막이 난 채로 사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누군가 이미 이곳을 통과했구나!
윤설린, 그녀가 해치운 건 아닌 듯했다.
번개에 그을린 흔적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절단면을 보아하니 분명 도검과 같은 날카로운 무기로 절단된 것이다.
조금 허무하긴 했지만 이제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미궁을 나갈 수 있다.
잠깐만! 설린 씨는?
그녀가 미궁을 먼저 빠져나갔는지 어떤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설린 씨에게는 미궁의 지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차분하고 현명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어렵지 않게 미궁을 빠져나갔으리라 추측했다.
일단, 나가자. 그런데 저건 뭐지?
미궁을 황급히 빠져나가려다 난 구석에 놓인 상자를 발견했다.
덜컥―
상자를 열자 한차례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뭔가 들어 있는 주머니가 하나 있었다. 주머니를 열어 보니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와 루비였다.
헉! 횡재했다!
이것은 아마도 미궁을 클리어한 보상인가 보다. 이걸 현금화하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프겠지만 어쨌거나 큰돈이 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무튼 이제 진짜 나가야지.
드르륵―
출구에 다가서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석벽이 열렸다.
파앗!
눈부시게 환한 빛이 각막을 찌르고 들어온다.
하얀 빛이 세상을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덜컹. 덜컹.
<잠시 후, XX 역에 도착합니다. 내리실 곳은 오른쪽입니다.>
돌아왔―다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이라도 크게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미친 아이 취급 받기 십상이라서 억지로 흥분을 억눌렀다.
대신 재빨리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재깍. 재깍.
현재 시각은 오후 10시 27분.
무려 1시간 반 동안이나 지하철에서 잠들어 있었다. 순환역이라 다행이지 자칫하다간 지하철 역무원에게 발견되어 응급실에 실려 가는 소동에 휘말릴 뻔했다.
이플렌시아의 8시간이 현실에서 2분.
하루는 6분이니까 1시간 반이면 무려 미궁에 15일이나 갇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고작 1시간 30분 지났을 뿐인데, 15일이라니! 이거 정말 시차 적응이 안 된다.
현실에 돌아오자 마치 미궁에서의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나는 원래의 성격으로 재빨리 돌아왔다.
이러다가 현실과 이플렌시아의 경계로 인격이 둘로 나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참! 설린 씨는 미궁을 빠져나왔을까?
가방에서 재빨리 핸드폰을 꺼낸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다행히 그녀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린 씨! 접니다. 강민혁.”
“아! 민혁 씨. 무사히 빠져나왔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설린 씨는 언제 빠져나오셨습니까?”
“사실은…….”
여자들의 전화 통화 습관이 흔히 그렇듯 설린 씨의 이야기는 꽤 길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녀는 나와 헤어진 후 침착하게 몬스터를 해치우며 통로를 전진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다른 플레이어와 만나는 일 없이 출구에 금방 도착했다.
“누군가 이미 출구를 통과했는지 보스 몬스터는 이미 쓰러져 있었어요. 민혁 씨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음식을 구하기가 마땅치 않아서 먼저 나와 버렸어요. 기다려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민혁 씨!”
“아닙니다. 여하튼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난 그녀를 이해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나처럼 배고프다고 몬스터의 사체를 뜯어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안해요. 대신 시간 되신다면 내일 제가 사과의 뜻으로 저녁 살게요.”
“…….”
사과의 뜻? 저녁을 산다고?
이건 데이트 신청할 때 흔히 써먹는 수법이잖아?
두근. 두근.
가슴이 뛴다.
에이, 그런 뜻이 아니겠지. 헛물켜지 말자.
나는 여자의 사소한 친절에 착각하는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아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잡생각 하느라 침묵이 너무 길었는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별로 내키지 않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내일 시간 많습니다. 한가합니다!”
황급히 대답하는 내 태도가 웃겼는지 설린 씨의 웃음소리가 조금 들렸다.
한가하다니. 젠장! 완전 한가한 남자가 되어 버렸어.
“그래요. 내일 저녁에 봐요. 민혁 씨.”
결국 우리는 약속을 정한 후 통화를 종료했다.
그런데 내일 뭘 입고 가지?
자랑은 아니지만 난 23년 동안 한 번도 데이트해 본 적이 없는 남자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가난에 찌들었던 나에겐 메이커 옷은커녕, 제대로 된 옷이라고는 없었다. 당연히 꾸며 본 적이 없으니 패션 센스에도 전혀 자신이 없다.
음, 캐주얼 정장 정도면 무난하겠지?
이번 기회에 나를 위해 정장 한 벌 정도는 장만해도 될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미궁에서 얻은 보석도 있고, 구슬도 꽤 많이 모았기에 그 정도의 지출은 감당할 수 있다.
Chapter 7. 사이코 닥터(1)
다음 날. 아침 일찍 백화점에 들렀다.
매장에 들어선 나는 늘씬하게 잘빠진 종업원이 권하는 옷을 입어 봤다.
“몸매가 좋으셔서 그런지 고객님께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그런가요?”
팔아먹으려고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몸매가 좋다는 말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긴 나 정도면 괜찮지.
원래 내 체형은 조금 뚱뚱한 편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번에 미궁을 헤매며 지방이 쫙 빠져 버렸다.
먹을 것이라고는 몬스터의 사체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
계속되는 몬스터와 플레이어들과의 사투.
살이 절로 빠지고 근육은 커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원래 나는 187의 거구. 다리도 제법 길고 머리 자체의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은 편이다.
통통했던 볼살이 쫙 빠지며 얼굴선이 선명해졌다. 그저 사람 좋게만 보였던 눈빛도 다소 강렬해졌다.
이 정도면 연예인 급 정도는 아니라도 제법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외모라고 할 수 있었다.
가격은 얼마지?
가격표를 확인한 나는 입이 절로 쩍 벌어질 정도로 깜짝 놀랐다.
37만 원.
평소에 길거리에서 파는 1∼2만 원짜리 옷만 사던 나에겐 심장이 멎을 정도의 충격적인 가격이었다.
매장을 잘못 왔어. 이곳에서 얼른 빠져나가야 해.
“좀 둘러보고 올게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며 매장을 빠져나왔으나 저 베테랑 점원은 아마 내가 매장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속으로 날 루저(패배자)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 X팔려.
백화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던 나는 비교적 저렴한 브랜드 매장에서 세일하는 캐주얼 정장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무사히 쇼핑을 마친 나는 문득 여동생인 은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궁에서 여동생과 비슷한 외모를 한 플레이어를 보았기 때문인지 왠지 마음이 약간 쓰인다.
그 녀석은 잘 있을까? 한번 병원에 가 봐야겠어.
곧바로 버스를 탄 나는 XX 신경정신과 병원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데스크에 서 있던 간호사들이 인사했다.
“면회를 신청하고 싶은데요?”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죄송하지만, 입원 후 2주가 지나기 전까지는 면회가 불가능합니다.”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말에 난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왜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환자분이 병원 치료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죄송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장님을 만나 직접 이야기하겠습니다.”
간호사는 무척 곤란해했지만 난 강경하게 요청했다. 병원 규칙이 어떻든 간에 여동생을 만나 대화를 나눠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원장실에 통화를 시도하던 간호사가 다시 말했다.
“지금 원장님께서는 상담 중이십니다. 10분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