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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천마제천 1권 (1화)
第一章 대막의 미친 모래바람




버석.
버석거리는 모래 소리가 정겹다. 몇 걸음 더 움직여 모래언덕 위에 올라선 사내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
모래언덕 위, 우두커니 자리 잡은 사내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휘―오오오.
거센 모래바람이 사내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몸을 죄는 옷 탓에 몸집이 왜소해 보였지만 실상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다부진 근육이었다. 붉은색 천으로 질끈 묶은 장발 사이로 미처 묶지 못한 머리칼이 마구 흩날렸다.
구릿빛 피부를 매끄럽게 가로지르는 코가 있고 짙은 흑색의 눈썹이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롭게 솟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천성인지 두 눈은 살짝 휘어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눈웃음처럼 보였다.
상처투성이의 한 손에는 서슬 퍼런 도가 들려 있었는데 상대의 살을 베는 것이 아니라 뜯어 내리는 듯한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힌 낭아도였다.
손에 들린 낭아도만 아니라면 팔자 좋은 한량으로 보일 법한 사내였다. 하지만 사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절대자의 그것이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인 절대자의 기운을 내뿜는 사내, 사내가 바로 ‘대막의 미친 모래바람’이라 일컬어지는 광풍사의 두목 혈무악이었다.
꾸허엉.
“진정해라, 광풍(狂風).”
‘광풍’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가진 낙타가 주인의 손길에 울음을 멈추고 애꿎은 모래바닥을 밟았다. 낙타의 콧잔등을 몇 번 더 어루만진 혈무악이 허리춤에 달린 도갑에 도를 넣었다.
찡.
시원스러운 맑은 소리와 동시에 사라진 도와 마찬가지로 혈무악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절대자의 기운 또한 사라졌다.
“재미없어…….”
작게 중얼거린 혈무악이 몸을 돌려 자신의 뒤를 바라봤다.
“어떻습니까, 두목.”
어느새 다가온 흑서가 손바닥을 비비며 물었다.
쳇 하고 혀를 찬 혈무악이 답했다.
“네가 직접 봐라.”
“예?”
“네가 집적 보라고!”
빽 하고 소리를 지른 혈무악이 광풍의 고삐를 쥐고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혈무악의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이백의 광풍사 마적들이 반으로 쫘악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우두커니 혈무악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흑서가 육포를 씹는 적돈을 향해 물었다.
“저 양반 요즘 왜 저래?”
“요즘 맛있는 찬이 안 나와서 그런가?”
“두목이 너냐, 새끼야!”
적돈을 향해 소리를 지른 흑서가 비쩍 마른 나무에 광풍의 고삐를 묶는 혈무악을 향해 다가갔다.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문제없다.”
혈무악이 귀찮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요? 천룡표국이면 저번에 턴 매화표국 놈들보다 더 빵빵한 놈들이라고요. 잘 찾아보면 두목이 좋아하는 술도 수두룩할걸요?”
흑서의 말에 잠시 주춤하던 혈무악이 곧 에이, 하며 다시 모래언덕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냥 너희끼리 대충 작업해라.”
“대체 뭐가 문젠데요?”
“나는 흥미 없다니까!”
날카로운 혈무악의 외침에 흠칫한 흑서가 그의 등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왜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야, 지랄이…….”
“뭐?”
“헤헤. 아닙니다, 두목.”
웃음과 함께 손바닥을 비비며 한걸음에 혈무악에게 달려간 흑서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대체 요즘 왜 그러는데요? 아, 이유라도 알아야 뭐를 해 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닙니까. 요새 밑에 애들이 얼마나 수군거리는 줄 아세요? 작업 때마다 맨 앞에서 칼질하던 양반이 요즘에는 늙은이 불알처럼 축 처져서 뒤에서 구경만 하니까 애들 사기도 덩달아 떨어지지 않습니까.”
“늙은이 뭐?”
혈무악이 눈을 번뜩이며 묻자 흑서가 헤프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두목이 요즘 들어 기운이 없으니까 애들이 걱정한다, 이 말입니다. 물론 저도요, 헤헤.”
피식 하고 웃어 보인 혈무악이 말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게, 진짜 늙은이 뭐 같네. 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혈무악을 보던 흑서가 모래언덕 밑을 지나가는 기다란 행렬에 눈을 돌렸다.
“대충 보니까 지키는 놈들은 삼백 명 정도에 잡일꾼들이 오백 명 정도네요.”
재빠르게 대상에 관한 파악을 마친 흑서가 혈무악을 향해 다시 물었다.
“정말 안 할 거예요?”
“그래. 너희끼리 작업하라니까.”
“알겠습니다.”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 흑서가 한쪽에 따로 모인 조장들에게 다가갔다.
“대장이 뭐랍니까?”
육포를 우물거리며 묻는, 작달막한 몸에 비대한 체구를 가진 붉은 피부의 사내가 바로 사조 조장인 적돈으로, 자기 키만큼 작달막한 단창(短槍)을 사용해서 붙은 별호가 단창마웅(短槍魔熊).
그것도 본래는 단창마돈(短槍魔豚)인 것을 끝까지 우겨 돼지 돈(豚) 대신 곰 웅(熊)자를 넣은 것이었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식탐이 많고 고집이 강했다.
“…….”
그 옆에서 아무 말 없이 흑서를 바라보는 차가운 인상의 학사풍의 사내가 일조 조장인 백랑으로, 일조를 맡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무공만큼은 광풍사 내에서 발군이었다.
본래 고아였던 것을 전대 두목이었던 혈무악의 아버지가 거둬 무공을 가르쳐 준 이로, 한 자루 도를 사용해 붙은 별호가 독행혈랑(獨行血狼).
별호 그대로 성격이 차갑고 남과 어울리기를 피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맡고 있는 조의 조원들은 절대 희생시키지 않는 의리 깊은 이였다.
“누가 잘난 두목 아니랄까 봐 잘나게 노는군. 크큭.”
백랑의 옆에서 낮게 웃으며 비꼬는 이가 바로 이조 조장인 혈갈(血?)로, 혈마수(血魔手)라는 수법(手法)을 사용해 붙은 별호가 독수혈마(毒手血魔).
본래 혈무악의 아버지가 광풍사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광풍사를 이끌던 두목이었다. 성격이 비열하고 고집이 강해 그가 맡고 있는 이조의 조원들조차 꺼리는 자였다.
이들 네 명이 각각 오십 명씩 한 조를 맡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광풍사다. 정작 두목인 혈무악 휘하의 조는 따로 없지만 비상시에는 혈무악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르도록 처음부터 교육되어 있다.
“입조심해라, 혈갈.”
“뭐!”
백랑의 말에 혈갈이 눈을 부라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스르르.
혈갈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그 주변의 모래가 둥그렇게 퍼졌다.
스윽.
백랑 또한 슬그머니 도를 들어 올렸다.
“또 시작이구만, 시작이야.”
육포를 씹던 적돈이 투덜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잠자코 있던 흑서가 헤픈 웃음을 지으며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 사이로 흐르던 날카로운 기운이 엇갈리며 끊어졌다. 백랑과 혈갈의 눈이 잘게 떨렸다.
“자자, 모두 그만 하지? 두목이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혈갈, 너도 그만 해라. 백랑 저놈이 어려서 그런데, 뭐.”
“난 어리지 않다.”
백랑이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미간을 구긴 흑서가 말했다.
“그래, 너 다 컸다. 됐지?”
“뭐…….”
“자자, 모두 주목!”
막 무언가 말하려던 백랑의 목소리가 흑서의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 흑서가 입을 열었다.
“오늘도 두목은 뒤에서 폼이나 잡는단다. 그럼 우리는? 당연히 나가서 빼앗아야지. 거기 너, 뭐? 죽이냐고? 그럼 네가 죽을래? 어쨌든, 두목이 안 나간다고 너무 기죽지 말자. 우리 조장들만 있어도 충분하잖아? 아, 나는 제외하고 말이야. 솔직히 나는 너희보다 약하잖아.”
“우하하하, 거 맞는 말이네.”
“하하하, 흑서 형님, 제 뒤에 숨으세요.”
능청스러운 흑서의 말에 긴장으로 굳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광풍사의 조장들 중, 유일하게 그 무공의 깊이를 모르는 이는 흑서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장들 중 백랑이 발군이라고 하는 것이지 만약 흑서의 무공이 측정 가능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기이할 정도로 기다란 기형장검(奇形長劍)을 사용하는 흑서에게 붙은 별호는 소면살(笑面殺).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얼굴로 적을 죽인다 해서 붙은 섬뜩한 별호였다.
“자, 모두 준비됐냐?”
흑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백의 마적들이 각자 무기를 꼬나 쥐고 낙타에 올라타 자신들을 이끄는 조장들의 뒤에 서서 대열을 맞췄다.
자신 휘하 조원들을 확인한 흑서가 씨익 웃으며 검을 치켜세웠다.
“우리는?”
“대막의 미친 바람이다!”
우렁찬 외침에 모래언덕 밑의 행렬이 주춤했다.
“우리는?”
“대막의 미친 바람이다!”
다시 한 번 우렁찬 외침이 퍼지자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행렬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계획은 없다!”
고막을 때리는 종소리를 음미한 흑서가 번쩍 검을 치켜세웠다.
“나가서 죽이고 빼앗아라! 우리는 대막의 미친 바람이다!”
“우와아아아!”
“죽여라!”
두두두두.
이백 필의 낙타가 언덕을 내달리며 뿌연 모래먼지를 피워 올렸다.
“거 새끼들, 잘 뛰어가네.”
이백의 광풍사가 지나간 자리에서 하나의 인영이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광풍사의 선두에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던 흑서였다.
“미친 바람 좋아하네. 에이 미친 새……!”
흠칫.
옷매무새를 만지며 먼지구름 속에서 빠져나온 흑서가 뒤늦게 혈무악을 발견하고는 주춤했다.
“아, 안 가셨어요?”
“…….”
흑서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혈무악의 시선을 애써 회피한 채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지금 나가려고 했어요…….”
“애들 부려먹으면 좋냐?”
“누가 부려먹었다고 그러십니까!”
“너.”
혈무악의 도갑이 흑서를 가리켰다.
흑서가 낙타의 머리를 톡톡 치며 투덜거렸다.
“에이, 누가 안 나가고 싶어서 안 나가나. 나도 나이가 들어서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또…….”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가라.”
“내가 누구 키우느라고 뼈 빠지게 고생을 했는데…….”
“셋 셀 때까지 안 나가면 죽는다.”
은근한 협박조의 말에 흑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춤 몸을 사렸다.
“내가 왜요?”
“하나, 넌 광풍사 아니야?”
“저는 조장이잖아요.”
“둘, 조장은 광풍사 아니야?”
“그럼 두목은요! 두목은 광풍사 아닙니까!”
발악적인 흑서의 외침에 혈무악이 씨익 웃었다.
“둘 반, 난 두목이잖아. 꼬우면 내 목 따고 네가 두목 하든가.”
“에이, 더러워서 진짜 목을 따 버리든가 해야지…….”
“뭐?”
“간다고요, 가요!”
꾸허엉.
신경질적으로 외친 흑서가 낙타의 배를 걷어찼다.
어찌나 강하게 걷어찼는지 흑서의 낙타가 비명을 지르며 모래언덕 밑으로 내달렸다.
“애들 잘 챙겨서 데리고 와라!”
검은 점이 된 흑서를 향해 외친 혈무악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광풍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슬며시 걸려 있던 웃음이 다시 슬며시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거운 한숨이었다.
“휴우.”
요즘은 뭘 해도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 마치 무공을 익히다 벽에 부딪힌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고 땀을 쫘악 빼면 그나마 편하지만 요즘에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여자를 안아 보라는 흑서의 권유도 있었지만 내키지 않아서 하지 않던 차였다.
‘정말 여자나 안아 봐?’
광풍의 등에 올라탄 혈무악이 곧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주책이냐.”
낮게 웃어 보인 혈무악이 광풍의 고삐를 잡아채 광풍사가 머무는 동굴로 움직였다. 가슴이 답답한 것이 나머지들이 약탈을 끝내고 돌아오기 전에 연무장에 가서 도나 휘둘러야 할 듯싶다.
꾸허엉.
이름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은신처에 도착한 광풍이 거칠게 울었다.
광풍사 마적들의 거처는 광풍처(狂風處)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동굴로, 대막에서는 흔하지 않은 바위산에 위치해 있었다.
광풍처는 총 네 개의 동굴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광풍사의 마적들이 쉬는 곳과 식량, 그리고 약탈한 물건들을 두는 곳, 포로, 낙타를 챙기는 곳, 마지막으로 혈무악의 거처 겸 회의장이었다.
탁.
광풍처에 도착한 혈무악이 광풍을 동굴에 둔 뒤 연무장으로 발을 옮겼다. 말이 연무장이지 바위산 앞에 있는 그리 넓지 않은 돌땅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