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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2화)


스르릉.
가볍게 몸을 푼 혈무악이 허리춤에 맨 도를 꺼내 들었다.
도인(刀刃)에 박힌 날카로운 이빨이 금방이라도 살을 쥐어뜯을 듯 살기를 번뜩였다.
“후우우.”
짧게 숨을 내쉰 혈무악이 천천히 도를 들어 올렸다.
혈무악이 익힌 무공은 두 가지 도법(刀法)과 한 가지 심공(心功)이다.
아버지인 광풍마도에게 전수받은 두 가지 도법으로는 십팔로광풍도법(十八路狂風刀法)과 살형도법(殺形刀法)이 있고, 한 가지 심공은 십팔로광풍도법을 익히기 위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천잔광혈심법(天殘狂血心法)이다.
굳이 종류를 따지자면 중원에서 마공(魔功)으로 부르는 종류의 것이지만 혈무악의 경지는 이미 그 경계를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혈무악의 나이 이제 스물다섯.
나이에 비하면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높은 경지였다.
하지만 혈무악은 지금 자신의 경지가 절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란다면 지금 자신의 경지에 도달했을 테니까. 아니면 스스로의 손으로 목숨을 끊었거나.
처음 도를 쥔 것이 다섯 살 생일 때였고, 첫 살인이 그로부터 세 달 뒤였다.
광풍사 소속이었던 마적이 배신을 해서 동료를 팔아넘겼는데 그자는 혈무악의 손에 운명을 달리했다. 혈무악의 아버지인 광풍마도가 혈무악의 손에 억지로 도를 쥐어 배신자의 목덜미에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배신자의 목이 끊어질 때까지.
그때 당시 혈무악은 싯누런 위액이 나올 때까지 구토를 했고 무려 보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도를 잡기만 하면 손이 떨리고 구토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버지란 작자는 도와 자신의 손을 천 조각으로 묶어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무려 두 달 동안이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
살인의 쾌감보다 살인의 공포를 먼저 안 뒤로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누구보다 강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후웅, 후웅.
혈무악의 손에 들린 도가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은광(銀光)을 뿌렸다.
치리링.
혈무악의 손에 들린 도가 맑은 도명을 토해 냈다.
살형도법은 환(幻)의 묘리를 따르는 환도(幻刀)다.
그 변화를 예측하기가 어렵고 수많은 잔영들로 하여금 혼란을 주어 적의 목덜미에 도를 박아 넣는 도법으로, 대막의 무인들은 살형도법을 기기묘묘한 요도(妖刀)와도 같다고 했다.
그에 반해 십팔로광풍도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무지막지한 패도(覇刀)로, 거치적거리는 것은 뭐든지 간에 바스러트리는 무서운 마도(魔刀)다.
일찍이 광풍마도가 한 자루의 도로 광풍처 절벽에 삼 장이나 되는 도흔(刀痕)을 남긴 적이 있어 대막에서는 전설로만 회자되는 것이 바로 십팔로광풍도법이다.
극성으로 익히면 열여덟 개의 도강(刀|)을 폭풍처럼 쏟아 내는 도법으로, 과거에 광풍마도가 광풍사를 떠날 때 행했던 사막의 율법에서 열일곱 개의 도강을 쏟아 내어 거대한 모래폭풍을 사라지게 만든 적이 있었다.
사아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시작된 것은 살형도법의 묘리를 따르는 화려한 도무(刀舞)였다.
왼쪽에서 도가 솟구치는가 싶으면 오른쪽 밑에서 바닥을 쓸었고, 아홉 개의 도영(刀影)이 덮치는가 싶더니 바닥을 때리는 것은 한 자루의 낭아도다.
부르르 몸을 떨던 도가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그 기세가 흡사 승천하는 용과 같아 주변의 공기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차―핫!”
힘찬 기합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친 혈무악이 열 십(十)자의 형태로 도를 휘두르자 주변의 공기가 갈라져 쑤앙 하고 비명을 질렀다. 도가 가는 곳마다 허공이 비명을 지르니 그 기세는 무엇이든지 부숴 버릴 듯한 패도의 기세다.
콰―르릉!
고막을 찢을 듯한 우레 소리와 함께 뻗어 나간 도신을 타고 우악스러운 광풍이 일어나니 십팔로광풍도법의 묘리가 단순한 찌르기에 담겼다.
지―잉.
매끄러운 도신은 은은한 달빛과도 같고, 날카로운 이빨은 이글거리는 태양과도 같으니 음양(陰陽)의 조화가 한 자루 도에 담겼다.
지잉.
차가움과 뜨거움이 만나 만드는 것은 우악스러운 광풍이다.
콰―우우우.
거대한 야수의 포효가 낭아도에서 터져 나왔다.
날카롭게 솟아난 도극(刀極)이 천천히 흔들리는가 싶더니 수십 개의 잔영을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나오는 것이 살형도법의 일초식인 요란살(妖亂殺)이다.
쑤―아앙.
혈무악의 몸이 한 줄기 화살이 되어 쏘아졌다.
우뚝.
일순간 걸음을 멈춘 혈무악이 도를 든 오른손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부―우우우.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방을 제외한 모든 곳을 베기에 공방(攻防)을 한꺼번에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뒷걸음질 치면서 내뿜는 날카로운 기운이 도풍(刀風)을 타고 사방으로 퍼진다.
부―우우우.
고동나팔 소리와도 같은 파공음과 번뜩이는 은광 속에서 움직이던 혈무악이 돌연 좀 전과 마찬가지로 우뚝 멈췄다. 동시에 사방을 가득 채우던 도광 또한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후우.”
혈무악의 입이 벌어지며 그동안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차―핫!”
파앗.
혈무악이 번쩍 눈을 뜨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고오오오.
묵직한 소리와 함께 혈무악의 도 위에 선명한 도강이 맺혔다.
핑그르르 몸을 돌린 혈무악이 광풍처의 절벽을 향해 있는 힘껏 도를 휘둘렀다.
쑤―아아앙.
적색 강기가 한일 자로 뻗어 나가 광풍처의 절벽을 때렸다.
콰―아아앙!
우르르릉.
커다란 폭음과 함께 광풍처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뿌연 먼지와 돌가루가 푸스스 떨어져 내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돌가루를 맞던 혈무악이 서서히 걷히는 먼지 사이로 드러난 광풍처의 절벽을 바라봤다. 동시에 혈무악의 입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당신의 강함…… 이 정도였군.”
혈무악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전대 두목이었던 광풍마도가 남긴 도흔이 있었는데 세로로 생긴 도흔의 중앙에는 정확히 예전의 도흔과 같은 길이, 같은 깊이의 도흔이 가로로 새겨져 정확한 십자를 만들고 있었다.
찌―잉.
도갑에 도를 넣은 혈무악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거처로 들어섰다.
그의 거처에는 제법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지하에서 솟아나는 것인지 깊이가 제법 되었다. 광풍처에는 두 개의 웅덩이가 있는데 혈무악의 거처는 그중 한 곳이었고 나머지 한 곳은 마적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스륵.
갑갑한 옷을 벗은 혈무악이 알몸을 드러냈다.
다부진 근육이 빈틈없이 자리 잡고 있는 몸 이곳저곳에는 꿈틀거리는 상처가 자리 잡아 야성미를 한껏 뽐냈다. 특히나 혈무악의 등에 새겨진 검은 불꽃 문신을 가로질러 난 꿈틀거리는 상처 덕에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혈무악의 등에 새겨진 검은 불꽃 문신은 등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다랬는데 과거 광풍마도가 손수 새긴 것이었다.
첨벙.
동굴 벽 한쪽에 비스듬히 도를 세워 둔 혈무악이 웅덩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한참을 나오지 않던 혈무악이 이윽고 웅덩이에서 몸을 솟구쳤다.
“푸하아.”
한바탕 물을 내뱉은 혈무악이 몇 번 더 잠수를 반복했다.
이내 웅덩이에서 나온 혈무악이 내력(內力)을 이용해 몸에 묻은 물기를 날려 보냈다. 다부진 혈무악의 몸 위로 뽀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한쪽 벽에 걸린 옷을 챙긴 혈무악이 도를 들고 거처의 가장 상석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동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태사의였다.
과거 혈무악이 처음 두목이 되었을 때 백랑이 손수 상단을 털어 약탈한 물건이었다. 족히 장정 서너 명이 앉아도 될 법한 크기였다.
스윽.
태사의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혈무악이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우―웅.
찌릿찌릿한 통증과 함께 혈무악의 몸 여기저기에 퍼져 있던 기운이 단전으로 몰려들었다.
찌르르.
“크윽.”
가슴을 찌르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린 혈무악이 내력을 돋웠다.
우우우웅.
가부좌를 튼 혈무악의 몸이 태사의에서 한 치 정도 떠올랐다.
은은한 적광이 혈무악의 등 뒤에서 빛났다. 혈무악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적색 기운이 근처를 배회하다 그의 콧속에 스며들었다. 둥실 떠 있던 혈무악의 몸이 가볍게 떨어졌다.
번쩍.
지그시 감겼던 두 눈이 번쩍 뜨이며 붉은색 안광(眼光)을 내뿜었다.
“휴우.”
한숨과 함께 안광을 갈무리한 혈무악이 곧 시선을 돌려 자신의 거처를 훑었다. 저 멀리 동영(東瀛)의 무리에게서 약탈한 화려한 갑옷으로 시작해, 팔뚝만 한 이빨도 있었고, 한쪽에는 거대한 늑대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언뜻 보면 늑대의 머리에 인면(人面)의 형상이 남아 있는데 저 머리는 삼 년 전, 혈무악이 만월 때 산책을 하다 잡은 두 발로 걷는 늑대의 머리였다. 도로 베면 세 호흡도 하기 전에 원래대로 회복을 하는 회복력 덕에 고생을 한 기억이 있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박쥐 날개가 걸려 있었는데 저 날개는 이 년 전, 한밤중에 광풍처에 들어와 혈무악의 피를 빨려던 흡혈귀(吸血鬼)의 날개였다.
박쥐로도 변하고 어떨 때는 안개로도 변하며 기기묘묘한 환술(幻術)을 사용했지만 결국 혈무악의 도에 한쪽 날개를 내주고 도망쳤다.
그 밖에도 불꽃 덩어리를 만들던 색목인(色目人)의 지팡이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던 음침한 색목인이 사용하던 사람 가죽으로 만든 책, 자신과 계약을 하자며 나타난 뿔 달린 괴인의 꼬리 등, 혈무악의 거처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만족스러운 눈으로 거처를 둘러보던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거처의 입구를 바라봤다.
때를 맞춰 한 무리가 혈무악의 거처로 들어서고 있었다.
각 조의 조장인 백랑과 적돈, 흑서였다.
아마 혈갈은 먼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 듯했다.
“응?”
지루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천천히 무리를 훑던 혈무악의 눈이 반짝였다.
무리 속에 섞인 새로운 인영들 때문이었다.
이내 혈무악의 앞에 도착한 조장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조장들 중 대표인 흑서가 혈무악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누구냐?”
혈무악의 물음에 동그랗게 눈을 뜬 흑서가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답했다.
“그새 잊어버렸어요? 저 흑서입니다. 이 뚱뚱한 애는 적돈이고 옆에 똥폼 잡는 놈은 백랑이고…….”
흑서의 대답에 혈무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울컥 치솟는 마음을 진정시킨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너 말고, 새로운 얼굴 말이야.”
“아!”
그제야 혈무악의 말을 이해한 흑서가 한쪽으로 비켜서며 새로운 인영의 모습을 보여 줬다.
이십 대 초반의 청초한 모습의 여인과 염소수염을 가진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여인은 실로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미인이었고, 중년인은 제법 날카로운 기도를 뿌리는 무인이었다.
혈무악의 두 눈이 두 명의 인영을 훑었다.
‘응?’
여인의 얼굴에서 익숙한 얼굴을 느낀 혈무악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혈무악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것 봐라?’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는지 흑서가 헛기침을 하며 혈무악의 시선을 끌었다.
“흠흠. 두목?”
“아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혈무악이 볼을 긁적이며 흑서를 향해 물었다.
“뭐냐, 이것들은.”
“사람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냐?”
“아, 사내랑 여자입니다. 사내가 아니라 늙은이에 가깝지만 어쨌든…….”
“장난칠 기분 아니다.”
혈무악이 목소리를 내리깔자 흑서가 찔끔하며 입을 열었다.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함께 있던 자들입니다. 두목님을 안다고 하기에 일단 데려왔습니다.”
흑서의 말에 혈무악이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나 안다고 했던 인간들이 한둘이냐? 저번에 내 어머니라고 자처했던 계집이 왔었지? 그 계집 어떻게 됐더라?”
“사지를 잘라 늑대밥으로 사막에 내다버렸습니다.”
잠자코 있던 백랑이 답했다.
“내 동생이라고 왔던 꼬마 놈과 친할아버지라고 했던 늙은이는?”
“품속에 숨겨 두었던 독을 입속에 처넣고 사지를 묶어 말등에 태워 보냈습니다.”
살벌한 말에 여인과 중년인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씨익 하고 웃어 보인 혈무악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들었냐, 계집. 살고는 싶어서 거짓말을 했나 본데, 나는 그런 것에는 속지 않는 몸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차라리 저기 있는 흑서의 딸이라고 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거야.”
“왜 가만히 있는 날 잡고 그러십니까.”
“네가 데려왔잖아. 알아서 처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