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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3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획 돌리고 벌러덩 누운 혈무악을 바라보던 여인이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철려화(鐵麗花)를…… 알고 있죠?”
“……!”
벌러덩 드러누운 혈무악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흑서와 백랑, 적돈 역시 마찬가지였다.
벌떡.
“너 계집, 방금 뭐라고 했냐.”
“철려화를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
혈무악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목소리 또한 눈동자와 다르지 않았다.
“너,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냐.”
은은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담담히 받아넘긴 여인이 고개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철연화(鐵姸花), 당신의 어머님이신 려화 고모님의 조카 되는 여인입니다.”
모두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불신이 가득 담긴 혈무악의 눈동자가 여인, 철연화를 향했다.
“하, 계집. 어디서 제법 정보를 구한 모양인데 그분이 나의 어머님이신 건 맞는데 조카가 있다는 이야기는…….”
“이놈이 감히 아가씨에게 방자하게!”
잠자코 있던 중년인이 벌떡 일어나 혈무악을 향해 소리쳤다. 혈무악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적돈, 저놈이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머리통을 까부숴라.”
“예!”
육포를 씹던 적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집, 계속해라.”
파르르 눈썹을 떤 철연화가 말을 이었다.
“저는 맹검철가(猛劍鐵家)의 여식입니다. 당신…….”
“두목이라고 불러라.”
“……두목도 아시다시피 려화 고모님 또한 맹검철가의 여인이었습니다.”
“흑서, 사실이냐?”
고개를 돌린 혈무악이 흑서를 향해 물었다.
흑서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중원에서 대막으로 온 자였다. 그라면 진실을 알 터였다.
“예.”
굳은 얼굴의 흑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무악의 얼굴이 덩달아 굳어졌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어요?”
“……믿는다.”
혈무악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이 없던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날 찾아온 거지?”
“철가의 대표로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철연화의 당당한 말에 혈무악이 피식 조소를 흘렸다.
“이제껏 나 몰라라 하던 외가에서 날 찾은 이유가 고작 그것이었나? 계집, 너는 외가에서 보낸 선물이냐?”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철연화의 옆에 있던 중년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혈무악의 두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적돈.”
스윽.
육포를 씹던 적돈이 단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퍼억.
철연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년인의 머리가 바스러지며 허연 뇌수를 뿌렸다.
털썩.
부르르.
목 위가 너덜너덜하게 변한 중년인의 시체가 푸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새끼, 좋은 말 할 때 닥치고 있을 것이지.”
푸들거리는 중년인의 시체에 슥슥 단창에 묻은 뇌수를 닦은 적돈이 투덜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꾸욱.
입술을 깨무는 철연화의 얼굴 또한 파르르 떨렸다.
차가운 얼굴의 혈무악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난 분명히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머리통을 까부수겠다고.”
“당신……!”
“두목이라고 불러라.”
철연화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해 보았겠는가.
가녀린 몸을 떨던 철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 철가의 대표로 두목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도움을 주십시오.”
“…….”
말없이 철연화를 주시하던 혈무악이 두 눈을 감았다.
“흑서, 계집을 네 처소에 묵게 해라.”
“예.”
평소라면 투덜거렸을 흑서가 조용히 답하며 철연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 잠깐만요. 대답은…….”
“내일 말해 주도록 하지. 흑서, 데리고 가라.”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휙 고개를 돌린 혈무악이 태사의에 벌렁 드러누웠다.
꾸욱.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음을 느꼈는지 철연화가 입술을 깨물고는 흑서의 뒤를 따라 거처를 나섰다.
“…….”
이내 두 사람의 기척이 사라짐을 느낀 혈무악이 감았던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려 철연화가 나간 입구를 주시했다.
“백랑.”
“예, 두목.”
백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여자…….”
잠시 말을 멈춘 혈무악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닮았어.”
혈무악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잠자코 혈무악을 바라보던 백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당당한 모습은 대모(大母)를 닮았습니다.”
백랑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백랑은 기억하고 있었다.
전대 두목이 처음 대막에 왔을 때, 어린 혈무악을 품에 안은 한 여인을. 그 여인은 조용했고, 다정했으며 무엇보다 그 어떤 이보다 강했다.
누구보다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여인이었고 누구보다 많은 이들의 손을 잡아 준 여인이었다. 그녀의 손길에 구원을 받은 광풍사의 마적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전대 두목보다 두목의 부인이었던 대모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가 더 많았을까.
웃기는 것은 백랑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랑 또한 전대 두목이 아닌 대모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지금의 혈무악의 다섯 번째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암습을 당해 목숨을 잃었을 때, 가장 광분한 사람이 바로 백랑이었다.
그 당시 어린 나이였던 그는 도 한 자루를 들고 암습의 배후였던 마적단을 향해 단신으로 뛰어들었다. 혈풍대(血風隊)라 불리는 마적단이었는데 그 당시 위세가 광풍사와 맞먹는 유일한 마적단이었다.
당시 혈풍대 대주였던 혈풍전창(血風電槍) 흑귀(黑鬼)에게 입은 상처는 아직도 백랑의 가슴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혈풍대주의 창에 당해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전대 두목의 넓은 등판이었다.
그리고 그날, 대막 최강의 마적단인 광풍사와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었던 혈풍대가 사라졌다. 단 한 사내와 그 사내의 손에 들린 도 한 자루로 인해.
그리고 정확히 석 달 후, 대모를 팔아넘긴 배신자가 다섯 살 혈무악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물론 혈무악은 단순히 동료를 배신한 배신자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랑! 백랑!”
고막을 때리는 혈무악의 외침에 아련했던 추억이 바스러졌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대모의 미소를 가슴 한켠에 접어 둔 백랑이 고개를 숙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손을 휘휘 저은 혈무악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흑서를 반겼다.
“계집은?”
“제 숙소에 두고 왔습니다.”
“다른 놈들이 깝죽거리지 않게 말 잘해 놔야 하는데…….”
사막에서 흔치 않은 것은 물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보다 더 귀한 것이 여자였다.
혈무악이 말끝을 흐리자 흑서가 바닥에 대충 걸터앉으며 수염을 꼬았다.
“두목의 여자라고 했으니 건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뭐?”
뭔가를 말하려던 혈무악이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욕을 꿀꺽 삼키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다. 잘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안 건드리지.”
“그러게 우리도 다른 놈들처럼 여자도 취급하자니까요.”
보통 마적단들은 물건만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약탈한다.
약탈한 여자는 거처에 가둬 놓고 성 노리개로 쓰는 것이다.
하지만 광풍사는 혈무악이 두목이 되고 나서부터 여자에 관한 것은 엄격하게 금했다. 가끔 몇 명씩 큰 마을에 있는 사창가에 가서 돈을 주고 산 창녀들에게 욕정을 풀 뿐이었다.
“여자는 도구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냐.”
흑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 기세가 광폭하고 날카로워 흑서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이내 기세를 거둔 혈무악이 태사의에 등을 기댔다.
“여자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고, 오늘 약탈한 물건들에 대해서나 이야기하지.”
흑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염소수염 같은 수염을 비비 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별로 성과가 없습니다. 비단 오백 필하고 향신료 약간, 철광석이 전부입니다.”
“진짜 별로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혈무악이 흑서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비단은 모두 처분해서 식량을 사도록 하겠습니다. 향신료는 창고에 두고, 요즘 무기가 허한 애들이 많으니 약탈한 철광석으로는 무기를 만들겠습니다.”
“그래. 이왕이면 저 밑에 대장간에서 만들어라. 거기 영감이 실력이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혈무악이 입을 열었다.
“다친 애들은?”
“사조 애들 두 명이 다쳤습니다.”
“사조면 적돈인가?”
“예.”
적돈이 고개를 숙였다.
“사조는 앞으로 사흘 동안 물 한 모금도 먹지 마라. 물론 적돈 너도 포함해서.”
“알겠습니다…….”
적돈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돈을 향해 측은한 시선을 보낸 흑서가 혈무악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제 숙소에 있는 여자요.”
“어쩌긴, 그냥 집에 보내야지.”
“정말요?”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흑서가 말끝을 흐렸다.
잠자코 있던 백랑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모의 가문인데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보고 중원으로 가라고?”
“그게 아니라 일단 이야기만…….”
피식 웃은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그럼 백랑 네가 가든가.”
“당치도 않습니다!”
백랑이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너도 가기 싫고, 나도 가기 싫고, 다 가기 싫잖아. 그럼 끝난 거네?”
“나는 중원에 가서 맛있는 음식 좀 먹고 싶은데…….”
적돈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혈무악이 적돈을 향해 쏘아붙였다.
“사흘 동안 물도 못 처먹을 놈이 무슨 맛있는 음식이야. 닥치고 있어.”
“그건 그렇지만…….”
말끝을 흐린 적돈이 슬그머니 모두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대모를 좋아했습니다. 도와주는 것이…….”
동굴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자 적돈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저도 적돈의 말에 동의합니다. 대모는 두목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광풍사 모두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니 도와주는 것이…….”
“저는 반대입니다.”
반대한 사람은 흑서였다.
“두목은 이제 광풍사의 두목입니다. 홀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단체를 버리려고 하십니까.”
“흑서!”
백랑이 시퍼런 안광을 흘렸다.
‘어떻게 네가!’
과거 대모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자가 바로 흑서였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대모를 모시던 흑서였기에 자신과 마음이 통할 거라 의심치 않았건만!
백랑의 기세에도 흑서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모두 진정해라. 왜 너희끼리 싸움질이냐.”
백랑과 흑서의 기세 싸움을 저지한 혈무악이 볼을 긁적였다.
“모든 결정은 내가 한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도록 하지. 밤이 다 되어 가니 모두 자리로 돌아가라.”
스윽.
혈무악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랑과 흑서, 적돈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 밖으로 나섰다. 동굴 밖은 이미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당신은……?”
가장 먼저 동굴을 빠져나온 백랑의 눈이 흔들렸다.
“안이 답답해서 잠깐 나왔습니다.”
밤하늘을 구경하던 철연화가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험험 하고 헛기침을 한 적돈이 육포를 꺼내 질겅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흑서가 수염을 비비 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합니다. 사막에는 아직 저도 모르는 독물(毒物)들이 수백 종류니 물리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평소의 그와는 다른 말투에 백랑의 눈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