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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4화)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백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흑서는 분명 이 여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흑서의 말에 철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어르신께 드릴 말씀도 있고 하여…….”
“나에게?”
“예.”
철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흑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킬킬 웃어 보인 흑서가 수염을 꼬며 천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이놈에게 육보시(肉布施:몸을 바치는 것)라도 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흑서!”
흑서의 말이 지나침을 느꼈는지 백랑이 그를 저지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철연화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점이 흑서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그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검마(劍魔) 어르신께서 그런 천박한 말을 입에 담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
무언가 말하려던 흑서의 입이 그대로 굳었다.
굳은 것은 입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여유로운 웃음이 걸려 있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검마?’
처음 들어 보는 별호에 막 입을 열려던 백랑이 순간 느껴지는 살기에 자기도 모르게 도병(刀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섬뜩한 살기는 바로 흑서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저, 말은 물과 같아 한 번 흘리면 도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끈적끈적하고 소름 끼치는 무형의 살기가 철연화의 몸을 휘감았다. 꿀꺽 하고 목울대를 움직인 철연화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그리 소녀를 걱정해 주시니 저는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휙.
백랑이 미처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철연화가 몸을 돌려 흑서의 거처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그제야 흑서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살기 또한 사라졌다.
“흐음.”
신음 비슷한 소리를 흘리며 철연화가 사라진 거처를 주시하던 흑서가 허리춤에 달린 검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죽여 버렸어야 했나…….”
“……!”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결코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흑서, 너…….”
“나는 그만 가도록 하지.”
백랑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한 흑서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점이 되어 사라지는 흑서를 보던 백랑이 근처에 지나가는 부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오늘 두목의 여자의 안전을 위해 그 앞에서 보초를 서겠다.”
“예? 아, 안 물어봤는데…….”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휙.
자기 할 말을 마친 백랑이 몸을 돌려 철연화가 기거하는 거처의 앞으로 가 등을 기댔다.
졸지에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마적이 멍하니 백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백랑의 눈에 그 마적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렇게 유난히 긴 대막의 하룻밤이 지났다.
* * *
광풍사의 하루는 아침이 아니라 점심으로 시작된다.
모두가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일어나 당번은 식사를 준비하고 나머지는 연무장으로 가서 각자 병장기를 휘두른다.
조장들은 그보다 더 늦게 일어난다. 적돈이 허기를 참지 못하고 먼저 일어나면 백랑은 이미 연무장에 나가 있다.
그때쯤이면 혈갈이 오고 어김없이 흑서가 달려 나가 툴툴거리는 혈갈을 달랜다. 점심이 다 될 때쯤에 혈무악이 일어나 밥을 먹는다.
그리고 전날 알아 뒀던 경로로 오는 물건을 약탈하러 나간다.
약탈을 하지 않는 날에는 그냥 거처에 처박혀 빈둥거린다. 이것이 보통 광풍사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한 여인으로 인해 광풍사의 일상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물론 조장들에 한해서였지만.
“아니, 이게 누구야?”
어젯밤에 살기를 흘리던 모습은 마치 거짓말인 양, 예전의 헤실거리는 모습으로 돌아온 흑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백랑이 슬며시 눈을 떴다.
“백랑이다.”
“흐음.”
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 흑서가 수염을 비비 꼬며 혈무악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두목이 부르니까 어서 와라. 나머지 조장들은 모두 모여 있으니까 말이야. 아, 오기 전에 계집도 데리고 오는 거 잊지 말고.”
말을 마친 흑서가 기다란 장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사라졌다. 흑서의 등을 바라보던 백랑이 몸을 돌려 철연화가 있는 동굴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동굴 저편에서 철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목께서 부르십니다.”
잠시 말이 없는가 싶더니 곧 대답이 들려왔다.
“금방 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세요.”
“……알겠습니다.”
약간의 미련을 꼬리로 남긴 백랑이 몸을 돌려 혈무악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백랑이 혈무악의 거처로 들어서 태사의에 앉아 있는 혈무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너, 밤새 그 계집 처소를 지켰다며?”
대뜸 묻는 혈무악의 물음에 백랑의 얼굴이 굳었다.
잠시 뜸을 들인 백랑이 입을 열었다.
“예.”
“그래. 앉아라.”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인 백랑이 자리에 앉았다.
혈무악의 거처에는 흑서를 비롯해 적돈과 혈갈도 와 있었다.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뭐냐.”
혈무악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혈갈이 대뜸 물었다.
귀를 후비적 후빈 혈무악이 답했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곧 있으면 알게 될 테니 좀 기다리쇼. 노인네가 참을성 없게…….”
“으음.”
건방지기 짝이 없는 혈무악의 말에 혈갈이 신음을 삼켰다.
혈무악 딴에는 제일 연장자라 공경을 해 준 것이지만 혈갈 입장에서는 더 분통 터지게 하는 말투였다.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철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와 변함없는 청초한 모습이었다.
“모두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철연화가 묻자 흑서가 킬킬거렸다.
“우리는 잘 잤지만 여기 있는 누구는 아가씨를 지키느라 한숨도 못 잤소이다.”
조롱기 섞인 흑서의 말에 백랑의 미간이 구겨졌다.
울컥한 백랑이 뭐라 되받으려 하자 혈무악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여기 내 앞에 앉아라.”
혈무악이 권한 자리는 혈무악과 바로 마주 보는 자리였다.
모두가 모이자 혈무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어머니의 조카라는 것도 믿고, 내 사촌이라는 것도 믿는다.”
“고마워요.”
혈무악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달랑 단둘이서 표국의 표사들과 함께 온 거지? 마치 몰래 숨어서 오는 사람들처럼 말이야.”
“설명하려면 말이 길어질 텐데…….”
“상관없다.”
혈무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켠 철연화가 입을 열었다.
“중원에는 정무회(正武會)라는 이름의 세가연합이 있습니다. 남궁세가를 필두로 오대세가(五大世家), 그리고 여러 중소세가들이 모여 만든 단체지요. 정무회에서는 매년 회합을 가지는데 이번 회합 장소는 사천(四川)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두목님이 아실는지 모르지만 저희 맹검철가는 사천에서 제법 규모를 가진 세가입니다.”
“그럼 거기서 회합을 하면 되겠네.”
혈무악의 말에 철연화가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본래는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대세가 중 한 가문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묵묵히 철연화의 말을 듣던 흑서가 툭 던지는 말투로 말했다.
“사천당가(四川唐家).”
흑서의 말에 철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사천당가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떨렸다.
사천당가, 혹자는 당문(唐門)이라 부르는 곳으로 정무회를 구축하는 오대세가 중 한 곳이다. 본래부터 암기(暗器)의 제작 및 사용법에 대해서 권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거기에 독을 사용해 더욱 이름을 떨친 가문이다. 또 편법(鞭法)과 금나수(擒拿手) 등에도 능통해 남궁세가와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가문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사천당가?’
하지만 평생을 대막에서 커 온 혈무악이 당가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사천당가? 거기가 뭐 하는 데야?”
혈무악의 물음에 흑서와 철연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적돈, 사천당가가 뭐 하는 곳인 줄 아냐?”
“내가 어떻게 알아요. 배고파 죽겠는데…….”
적돈의 투정에 미간을 찌푸린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백랑을 바라봤다.
“너는 아냐?”
“저도 모릅니다.”
평생을 대막에서 커 온 것은 백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랑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혈갈뿐이었다.
“어이, 아저씨. 사천당가라고 아쇼?”
“모, 모른다.”
혈갈마저 고개를 흔들자 혈무악의 얼굴이 뚱하게 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흑서와 철연화를 제외한 모두가 사천당가라는 곳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졌다.
“흑서, 사천당가가 뭐 하는 곳이냐.”
혈무악의 물음에 나머지 조장들의 시선이 흑서의 입을 향했다.
“사천당가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흑서가 주춤하며 말을 이었다.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가문입니다.”
잠시간의 침묵. 가장 처음 불평을 토한 것은 태사의 위의 혈무악이었다.
“그럼 병신들이잖아?”
“병신이 아니죠. 겁쟁이들이죠.”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이들이군.”
혈무악의 물음에 적돈이 답했고 그 뒤를 이어 백랑이 싸늘히 조소했다. 심지어 혈갈마저도 코웃음을 쳤다.
“잡아서 노리개로 쓰면 쓸 만하겠군.”
자신이 한 말에 꽤나 만족했는지 혈갈이 뿌듯한 얼굴로 그리 길지 않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들의 모습에 흑서와 철연화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대막은 강자존의 세계다.
정정당당한 대결이 난무하는 곳은 아니지만 몇 개의 불문율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중 독과 암기는 불문율 중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것으로, 만약 그것을 어기면 평생을 겁쟁이로 불리며 살아간다. 대막의 사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독과 암기는 약하고 비겁한 겁쟁이들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그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휴우.”
흑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목, 대막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중원에서는 당가라고 하면 손가락으로 꼽는 곳입니다. 솔직히 우리랑 부딪치면 누가 이길지 모르는 곳이라고요.”
“우리가 그렇게 약해? 당간지 당관지 하는 병신들한테 질 만큼?”
“그게 아니라…….”
흑서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리가 약한 게 아니라 그놈들이 강한 거라니까요!”
“아, 근데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아휴, 말을 맙시다, 말을…….”
“저게 요즘 자꾸 맞먹으려고 드네?”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가자 철연화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요. 일단 제 이야기부터 들어 주세요!”
철연화가 말한 ‘일단’이라는 단어에 비중을 둔 혈무악이 흑서를 향해 이를 갈고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당가에서는 감히 맹검철가 따위에서 회합을 하냐면서 당가로 장소를 바꾸자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정무회의 회주인 남궁무성의 성격상, 한 번 정한 것은 절대 바꾸지 않았죠.”
철연화의 입에서 나온 남궁무성이라는 단어에 흑서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흔들린 것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사라졌다.
“남궁무성은 거절했고 당가는 자존심이 상해 계속해서 요구를 해 왔습니다. 당연히 마찰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마침내 남궁무성이 어쩔 수 없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한 가지 방법?”
“예.”
철연화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와 맹검철가가 비무를 해서 이기는 가문에서 회합을 열기로 한 것이지요.”
철연화의 얼굴은 더 이상 굳을 수 없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맹검철가가 아무리 사천에서는 규모를 가진 가문이라고 하지만 오대세가의 수좌인 남궁세가와 대적할 만한 세력을 가진 당가와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방법인 것이다.